'선한 대상화'와 '대상화하지 않기' (부분)
이병철/ 시인 · 문학평론가
지난해 출간된 시집들 중 가장 의미있는 작업으로 이산하의 『악의 평범성』(창비)을 꼽고 싶다. 주지하다시피 '악의 평범성'은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기록한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아이히만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장교로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였다. 패전 후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정체를 감춘 채 리카르도 클레멘테라는 이름의 자동차 수리공으로 살다가 10년 만에 이스라엘 비밀경찰 모사드에게 붙잡혀 예루살렘 법정에 세워졌다. 아이히만 아닌 클레멘테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누구에게나 성실하고 선한 이웃이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법정에 선 그가 지극히 평범하고 왜소한 한 중년 남성이라는 데 충격을 받았다. 악은 악마의 얼굴이 아니라 평범한 모습으로 온다는 것이 '악의 평범성'의 표층적 함의라면, 그 심층은 보다 복잡하다.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의 실행에 그 어떤 고민이나 반성, 죄의식도 갖고 있지 않았다. '악'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던 것이다. 나치 친위대 고위 장교라는 직책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그저 열심히 수행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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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 미학의 시초인 보들레르는 역설적이게도 문학이 일종의 '마법(magic)'이라고 말했다. 근대 주술과 결별한 합리적 이성과 지성의 시대이지만, 낭만주의 이후 문학은 현실과 이상 사이 괴리를 초월하여 매혹적이고 우연한 시대적 '모드(mode)'에서부터 영원하고 항구적인 '미美'를 발견하는 정신이 보들레르의 모더니티라면, 그 근대적 예술성에는 확실히 마법적인 요소가 있다. 이러한 보들레르의 모더니티 미학은 20세기 기욤 아폴리네르와 앙드레 브르통에게 와서 초현실주의(surrealism) 경향이 된다. 초현실주의의 핵심은 '일상적 순간을 낯설게 하기'다. 평범한 대상을 특별한 무엇으로 변화시키는 시의 연금술에서 우리는 초현실적 마법을 본다. (p. 174 *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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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로여는세상』 2022-봄(81)호 <비평가의 시선> 에서
* 이병철/ 2014년 『시인수첩』으로 시 & 『작가세계』로 평론 부문 등단, 시집『오늘의 냄새』『사랑이라는 신을 계속 믿을 수 있게』, 평론집『원룸 속의 시인들』, 산문집『낚 : 詩 - 물속에서 건진 말들』『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사랑의 무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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