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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시공(時空) 허물어뜨리는 외 1편/ 장욱

낡은 시공時空 허물어뜨리는 외 1편 장욱 툭, 툭, 툭, 은행잎이 떨어진다 천년 금화 눈부신 질감으로 축성築城된 은행나무 황금 대궐이 허물어진다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 땅 가을벌레 흠 없는 눈물이 새벽까지 쌓아 올린 통곡의 벽을 부수는 것이리라 햇빛 정결한 손이 빈 나뭇가지 사이로 지상의 무게를 흔든다 공활한 가을 하는 푸른 여백을 내려놓는다 쿵, 쿵, 쿵, 낡은 시공時空 허물어뜨리는 소리 바깥으로 빈 새 집 하나 걸렸다 출판비 걱정없는 시의 집이 무심히 흔들린다 무게도 없이 높이도 없이 값도 없이, 하늘을 던지다 -전문(p. 105) ---------------------------------- 깨진 질그룻 조각이 간장 된장 고추장은커녕 묵은 소금 덩이도 담아 두지 않은 생활 밖 장독대 조상님들 제삿날..

의자, 출렁이다/ 장욱

의자, 출렁이다 장욱 내면을 흔들어 질문하고 답하고 소리치고 내동댕이쳐, 부스러진 껍데기 파편을 버리는 중이다 비틀린 모서리 핏빛 관절을 못질하여 하나의 의자로 깊이를 파내는, 끙끙 앓는 사랑 망가진 시간 틈에 끼어들어 고뇌와 고심을 앓는 병 영靈은 쓸쓸해지고 겉은 후패朽敗하여 낡아가는 여백 깨끗한 손이 마디 없이 투명하게 얽힌 긴 끈을 끌어다 모든 삶을 엮어내는 그의 영혼 속에는 별들의 일상이 치열하게 반짝이는 푸른 갈등, 무궁한 힘으로 끌어당겼다가 놓았다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깨끗이 떨궈낸다 편한 팔걸이와 등받이 높이를 버리고 하늘을 깊숙이 받아들이는 우물은 지상에 가장 큰 의자가 된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의자의 편한 팔걸이와 높은 등받이는 지상에서의 권세를 상징한다. 먼 중세 유럽에서 교황이 ..

시인과의 대화(추려 뽑은, 일 문답) / 엄창섭 : 오탁번

시인과의 대화(추려 뽑은, 일 문답) - interviewer : 엄창섭 - interviewee : 오탁번 엄창섭: 재학생들에게 '중간, 기말고사' 때에,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신 까닭에 "시험 준비는 하지 않는 것이 답이라." 하신 언어의 뉘앙스에 대해서도 한 말씀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p. 384) 오탁번: 나는 영문과를 나와서 대학원은 국문과를 다녔는데, 당시의 대부분의 문학 강의가 문학하고는 거리가 먼 무슨 서지학 같은 것이었지요. 자유로운 문학적 영혼을 지닌 학생들이 딱 질식할 정도로 황폐화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을 때 강의실을 아주 자유로운 방식으로 운영했습니다. 창작론 강의실에서는 학생들에게 담배도 마음 놓고 피우라고 했어요. 시험을 치를 때 "중앙도서..

대담 2024.03.14

시인과의 대화(추려 뽑은, 일 문답)/ 이창수 : 오탁번

시인과의 대화(추려 뽑은, 일 문답) - interviewer : 이창수 - interviewee : 오탁번 이창수: 사실 선생님의 입을 통해서도 다른 잡지를 통해서도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알고 있습니다만 『시와사람』이 독자들을 위해 드리는 질문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계간 시지 『시안』을 창간하여 10년 이상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IMF 이후 전국이 환란의 고통에서 신음하고 있을 무렵 잡지를 간행하여 그 어려운 시기를 건너고 있습니다. 13년째 『시안』을 운영하고 계시는데 특별한 사명감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p. 377) 오탁번: 그냥 이번 봄호 통권 47호 『시안』을 보면 그 안에 내 대답이 있어요. 시안은 시를 시이게 하는 한 글자, 시를 알아보는 안목이라는 뜻이지요. 예전에 말한 대로 제 눈이 ..

대담 2024.03.14

오탁번 시 읽기 2 『좋은 시는 다 우스개다』/ 20인의 '한 문장'들

오탁번 시 읽기 2 『좋은 시는 다 우스개다』         20인의 '한 문장'들       오탁번 외 19인                  '비백飛白'은 후한後漢 시대의 서예가 채옹蔡邕이 흰 벽을 귀얄로 칠하는 것을 보고 창시한 서체라고 한다. 비로 쓴 것처럼 잘게 갈라져 획이 비동飛動하면서 흰 귀얄자국이 나타나는 서체다. 붓의 끝마무리가 깃발처럼 휘날려서 편액 같은 대자大字에 잘 어울리는 서체로서 붓에 먹물을 많이 묻히지 않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 갈필渴筆과는 다른, 서예의 고도한 수법이라 할 수 있다. (p. 39-40) (오탁번)   어느덧 세월이 흘렀다. 옛날에 그는, 그의 시는 무엇인가, 어떤 갈증으로 가득 차 있다. 지금 그의 시는 빈 곳 투성이다. 이 새 ..

한 줄 노트 2024.03.14

김주원_심장의 역할을 사랑하는 사람(발췌)/ 오브제와 너 : 양안다

오브제와 너 양안다 너는 밤 골목을 걷는다. 유난히 걸음이 빠르다고 너는 생각한다. 너는 풍경이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본다. 너는 밤 골목을 걷는다. 너와 함께 밤이 걷는다. 골목은 달리지 않는다. 너는 행인과 취객이 어울리는 것을 본다. 너는 누군가의 타액을 본다. 너는 대리석에 누운 아이를 본다. 너는 열기에 대해 생각한다. 너의 몸을 식어가고 너는 어둠보다 인간이 더 많은 장면을 본다. 너는 빈 병을 보고 관악기를 떠올린다. 너는 너의 입술 모양을 가늠한다. 너는 밤 골목을 걷는다. 너는 인파 속에 있다. 너는 함정 같던 지난날을 복기한다. 너는 엎어진다. 너는 취객이 깨뜨린 맥주잔을 본다. 너는 확산과 감염을 사랑한다. 너는 흩어진다. 너는 밤 골목을 걷는다. 너는 지난날로부터 걷는다. 너는 밤 골..

포플러의 말 외 1편/ 이명덕

포플러의 말 외 1편 이명덕 바람의 말은 주변을 일으켜 명사와 동사로 씁니다 열매 키워 마침표로 쓰고 새잎 틔워 쉼표로 씁니다 포플러는 나무들 선생 바람을 불러오지요 꽃바람 펄럭이는 바람 간지러운 바람 사나운 바람 크고 작은 다국적 사람들 만지고 가는 바람의 교과서가 됩니다 바람이라고 다 똑같은 바람 아니지요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는 실존의 바람 온갖 불량한 바람도 이파리에 불러들여 길들여 훈육하여 온순하게 돌려보냅니다 우리는 작은 산소 공장 지구의 공기청정기가 되고 새들의 이웃이 됩니다 -전문(p. 104-105) --------------------- 당신에게 봄 문득 넘어지고 싶어 비틀거릴 때가 있다 저문 봄 푸른 가지 끝 그때 넘어지는 곳이 수렁이라도 괜찮다 돌아 나오는 다급한 발끝에 늘 당신을 ..

메갈로케로스*/ 이명덕

메갈로케로스* 이명덕 거대한 뿔은 덤불에 걸리기 쉽나니 아름다운 사람은 반드시 비대칭을 경계하라 너는 가질 수 있으나 나는 가질 수 없는 것 찾아야 하고 찾아서는 혹독한 다짐으로 섬기라 뿔이 거대할수록 그 속은 비어 있다 화려하고 웅장한 뿔은 풀꽃에 걸리게 되리라 -전문- * 거대한 뿔을 가진 덩치가 큰 사슴. 플라이스토세 후기에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퍼져 살았다. 해설> 한 문장: 이 시는 완전미를 유지하는 일의 어려움을 말하면서 외양으로 판단하는 아름다움의 가치들이 실상은 실속이 없는 것임을 시사한다. 화자가 경계하는 것은 거대함 · 화려함 · 웅장함, 그리고 비대칭이다. 추진력과 힘의 상징인 "거대한 뿔"에 비하면 풀꽃"은 미약하지만 그는 작고 보잘것없는 미물에 가없는 마음을 기울인다. 이것이 "혹..

오태환_자기 응시의 순정하고 오연한 형식(부분)/ 저녁연기 : 오탁번

저녁연기 오탁번(1943-2023, 80세)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나의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기, 마을의 높지 않은 굴뚝에서 피어올라 하늘로 멀리멀리 올라가지 않고 대추나무 살구나무 높이까지만 퍼져 오르다가는, 저녁때도 모르는 나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논두럭 밭두럭을 넘어와서, 어머니의 근심을 전해주던 바로 그 저녁연기였다. -전문- ▶자기 응시의 순정하고 오연한 형식(발췌) _오태환/ 시인 모두 하나의 문장으로 짜여진 이 시는 소설 「저녁연기」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는다. 차이가 있다면, 쉼표의 위치가 "퍼져 오르다가는" 뒤에서 "넘어와서" 뒤로 옯겨진다는 점이다. 소설은 군청 공무원인 화자가 형의 갑작스..

오민석_포르투갈에서 페소아 읽기(발췌)/ 폐위 : 페소아

폐위 페르난도 페소아 오, 영원한 밤이여, 나를 당신의 아들이라 부르고 당신의 팔로 나를 품어주오. 나는 왕이라네 기꺼이 내 꿈과 권태의, 왕좌를 버린 사람. 내 약한 팔을 끌어내린 나의 검을 나는 강하고 한결같은 손들에 넘겨주었지, 그리고 바로 옆방에서 나는 산산조각 난 홀과 왕관을 포기했다네. 내 박차는 헛되이 딸랑거리고 나는 이제 쓸모없어진 내 갑옷을 차가운 돌계단 위에 버려두었네. 나는 왕권과, 몸과 영혼을 버렸어, 그리고 그렇게 고요하고, 그렇게 오래된 밤으로 돌아왔지, 해가 질 때의 풍경처럼. -전문(영역본, 오민석 역) ▶포르투갈에서 페소아 읽기(발췌) _오민석/ 시인 · 문학평론가 페소아가 스물다섯 살(1913)에 쓴 시이다. 그는 그때 이미 적멸의 의미를 알았다. 결국 우리 모두 "폐위"..

외국시 2024.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