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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_'원서헌'에서 오탁번 시인을 만나다(부분)/ 백두산 천지 : 오탁번

백두산 천지 오탁번(1943-2023, 80세) 1.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가까워 장백소나무 종비나무 자작나무 우거진 원시림 헤치고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순례의 한나절에 내 발길 내딛을 자리는 아예 없다 사스레나무도 바람에 넘어져 흰 살결이 시리고 자잘한 산꽃들이 하늘 가까이 기어가다 가까스로 뿌리 내린다 속손톱 만한 하양 물매화 나비날개인 듯 바람결에 날아가는 노랑 애기금매화 새색시의 연지빛 곤지처럼 수줍게 피어 있는 두메자운이 나의 눈망울 따라 야린 볼 붉히며 눈썹 날린다 무리를 지어 하늘 위로 고사리 손길 흔드는 산미나리아재비 구름국화 산매발톱도 이제 더 가까이 갈 수 없는 백두산 산마루를 나 홀로 이마에 받들면서 드센 바람 속으로 죄지은 듯 숨죽이며 발걸음 옮긴다 2. 솟구쳐 오른 백두산 멧부리..

오드아이/ 한영수

오드아이 한영수 햇빛을 탁발한다 짝눈을 깜박거리며 어둡다 말하지는 않는다 어디에도 편입되지 못한 바람이 온다 불에 스친 발바닥이 또 뜨거워진다 흰밥에도 흰 사골국물에도 입맛을 잃었다 노래는 단조로 바뀌고 앉아 있기가 어렵다 서 있기는 더 어려운 그런 때다 비현실적으로 용감해져서 현실을 횡단하는 거다 처음 늑대의 얼굴을 하고 빨래가 날리는 마당을 지난다 닫힌 문을 넘어 신호등 같은 건 상관없디 6차선 자동차 사이로 길은 길게 이어져 있고 달린다 달린다 달려버린다 이상하고 아름답게 발자국이 발자국을 지우며 발자국에 발자국이 겹치며 짝눈이 짝눈으로 짝눈을 짝눈에게 -전문(p. 43~44)/ 『시와반시』 2023-여름(124)호 p.41-42 ------------------------- * 서정시학회 『미래 ..

복국/ 염창권

복국 염창권 그가 서 있다, 그 옆의 개가 함께 짖어준다 집 나온 개처럼 나는 그를 쳐다본다 적어도 그는 나보다 외롭지는 않겠지 속을 좀 풀어볼까, 그 골목을 돌았다 나는 개를 동반한 적이 없다, 어딜 가도 노포를 찾지 못하고 다시 그 집 앞이다 그는 가고 없는 채로 내 안에서 머물렀다 골목은 막 개복을 한 내장같이 추지다 짧아진 내 그림자가 빈 그릇에 담긴다 개가 그를 끌었거나, 그 역이라 하더라도 누군가의 탕일지도 모르겠다, 숱한 나는 국물이 나를 먹일 때, 허기라는 개가 있다. -전문(p. 114-115) ----------------- * 『시결』 2024-봄(창간)호 에서 * 염창권/ 1990년 ⟪동아일보⟫로 시 부문 & 1996년 ⟪서울신문⟫으로 시 부문 등단, 시집『한밤의 우편취급소』『오후의..

역 안에서/ 정재율

역 안에서 정재율 가만히 앉아 배낭을 메고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있는 사람과 역 안에 놓인 TV를 보고 있는 사람 TV에서는 몽골의 유목민들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었다 유목민의 아이들은 게르에서 울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누군가 오기만을 기다린다고 했다 기다리는 것은 배우는 것일까 어쩔 수 없이 견뎌지는 것일까 큰 가방 하나와 함께 한참 동안 어깨를 들썩이다가 소리 죽여 우는 사람도 보았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시간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역 안으로 몰려들었고 옆 사람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든 사람과 시간을 확인하며 트렁크를 좌우로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목민의 다큐멘터리를 끝까지 본 사람은 나뿐이었다 계속 이동했어야 하므로 장소가 아니라 시간을 기..

서정이 인식과 결합하지 못하면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숭원

서정이 인식과 결합하지 못하면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숭원 감동을 주는 시에는 시와 삶에 대한 새로운 성찰과 인식이 담겨 있다.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여 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돌이켜 보게 하거나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해야 그것이 진짜 시다. 이것은 삶을 철저히 사유하고 대상을 진실하게 탐구하는 데서 자연스럽게 실현된다. 진실한 서정은 우리 마음에 직접 파고들어 파문을 일으키면서 삶의 반성을 유도하고 새로운 정동을 체험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정교한 서사, 선명한 논설과 구분되는 서정만의 독특한 형질이다. 훌륭한 시는 이 요소를 유전적 형질로 갖추고 있다. 서정의 차원을 떠나 이러한 요소가 부족한 시는 제대로 된 시라고 할 수 없다. 모든 시의 서정이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 변별의 지점을 제..

한 줄 노트 2024.03.11

전생의 노래/ 정선희

전생의 노래 정선희 너와 나 사이에 물이 흐르고 있구나* 몇 겁의 세월을 흘러온 것일까 눈앞이 아득해지고 수평선과 하늘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어디선가 노 젓는 소리 들린다 오래 전 이별이 미간에 흐릿한 물길을 새겼다 얼굴도 모르는 얼굴이 그리웠다 떠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싶은 것도 강가에 서면 저편이 그리운 것도 사연은 잊었지만 감정이 남아 있다는 너와 나 사이에 물이 흐르고 있었네 어떤 사연을 뒤로 하고 너를 떠나온 것일까 해가 지는 강가를 거닐 때마다 물결이 완성하는 이 그림자는 누가 물길 같은 노래에 구성진 사연을 입혔을까 빈 배에 빈 가락 한 가득 실어놓고 물길이 닿는 곳을 상상한다 내가 살았던, 저 끝 -전문(p. 94-95) * 삼도천 노래 중에서 ----------------- * 『시결』 20..

아름다움을 설정하기/ 황인찬

아름다움을 설정하기 황인찬 조선시대 정초부라는 노비가 있었는데 그는 시에 재능이 있어 양반들의 시회에 초대받아 그들과 함께 시를 짓기도 하였다 김홍도는 그의 시에 감명을 받아 '도선도'라는 그림을 남겼는데 시의 내용을 풀면 다음과 같다 쪽빛처럼 푸른 강물 위에 두세 마리 해오라기가 앉아 있어 그 푸름과 흼이 대비되었다 가까이 가고자 천천히 노를 저었으나 고요한 물 위에 울리는 노 젓는 소리에 놀라 해오라기들은 모두 날아가버렸다 이제 깊고 푸른 물만 조용히 흐르고 있었고 그 위로 석양의 붉은빛이 내려앉았다 지금 내 눈앞에도 강이 흐르고 있노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 해오라기는 아니어도 오리 정도는 있을 것이라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노를 저어 오리에게 다가갈 수는 없지만 카메라의 줌을 최대한..

여독/ 윤의섭

여독 윤의섭 일주문을 들어서자 비가 내리는 중이었다 이번 여행은 무난하게 끝내기도 쉽지 않은 경우였다 인생을 처음 길에 비유한 사람은 독에 대해 잘 아는 자였을 것이다 걸을수록 독이 쌓이고 때로 풀렸다 다시 차오르고 어떤 독은 미량이라도 살면서는 치사량이 될 수도 있고 길에서 마주친 그 모든 유독성 어쩌면 내가 독을 끼치는 독종이어서 내 꿈이 누군가의 꿈을 죽였을지 모르고 내 말이 누군가의 말을 매장시켰을지 모르고 그 중에서도 사랑이라는 독은 해독제도 없이 서로의 심장을 녹이고 내가 잠시 머물렀던 풀밭은 시들어버렸지 독단일 수도 있지 여름에서 겨울 사이는 떠오르는 게 없어 시력은 점점 나빠졌고 풍경은 흐릿해지기를 포기하지 않았지 불면증은 나의 독력을 증명해 죽지 않으려고 수은에 중독되어 죽은 왕도 있다는..

연민/ 송재학

연민 송재학 어떤 흐린 날 해안은 바다를 향해 뛰어들고 있다 이름이 생긴 구부러진 손가락이 하염없이 짚어가면서 방파제 끝까지 걸어가는 길 바다 안개가 통점을 잘 에워싸는 중이다 때로 파도가 부서지는 곳 불빛이 직렬로 켜지면서 지평선이라는 넓이를 채운다 해수면을 응시하는 마음 중에 내 휘파람이 가장 쓸쓸하다는 독백을 들었다 또한 연민이 바다의 기울기를 결정한다 오늘의 햇빛은 어제의 흐림처럼 해수면에서 입때껏 머물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기억처럼 섬 하나가 둥실 떠 있다 심해에서 올라왔기에 내 얼굴과 닮았다 -전문(p. 71-72) ----------------- * 『시결』 2024-봄(창간)호 에서 * 송재학/ 1986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시집『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 등

슬픔의 깊이와 애도의 시간(부분)/ 전해수

슬픔의 깊이와 애도의 시간(부분) 조디 피코, 『코끼리의 무덤은 없다』 전해수/ 문학평론가 조디 피코의 『코끼리의 무덤은 없다』는 동물학자 앨리스의 일지에 기록된 '코끼리의 슬픔을 이해하는 모습'을 통해서 애도의 방식을 보여준다. 2년간의 임신 기간을 거쳐 새끼를 낳은 코끼리는 분만 중에 새끼를 잃거나 새끼가 자연사하는 경우 더욱이 여러 날을 식음을 끊고 새끼 주변을 배회하며 오랫동안 맴돈다. 그때는 슬픔을 온몸으로 감당하는 어미 코끼리를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불문율,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거친 후에 어미 코끼리는 비로소 새끼 곁을 떠난다. (p. 184~185) 스토리를 간단하게 재구성해보면 이렇다. 코끼리를 연구하고 돌보는 앨리스와 토마스 부부에게는 어린 딸 제나가 있다. 이외에도 기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