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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편/ 최문자

시 한 편 최문자 시인의 반은 시를 식탁에 걸어둔다 우리 사이 얼만큼의 하늘이 있었는지 얼마만큼 찢어버린 편지가 있었는지 숟가락을 물고 쳐다본다 시가 사라질까 봐 키우던 꽃이름도 잊어버린다 죽을 때까지 살아있다 못 없이 묘하게 걸려있다 처음부터 쏟아질 것처럼 쏟아질 것처럼 모래인척 했다 시인이 키운 것 중에 가장 오래된 살기로 결심한 시 한 편 어제 보다 좀 더 깊다 모래를 통과한 영혼처럼 반짝인다 -전문- ----------------- * 『시결』 2024-봄(창간)호 에서 * 최문자/ 1982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사과 사이사이 새』 외 다수

계간『시결』_창간사(전문)/ 시의 물결, 참문학 : 김금용

전문 시의 물결, 참문학 김금용/ 본지 주간 최근 대학 입시생 중 100명 중 8, 9명만이 인문계 지원을 한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대학마다 인문의 근본이 되는 '문사철' 학과가 사라진다는 우려에 한 술 덧붙여 챗GPT의 시집 발간으로 적잖은 허탈감과 위기감에 당황하게 된다. 인문이 쇠락하고 시가 위기에 처하고 문명은 방향을 잃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AI가 생산한 시란 것은 사실상 기존 발표된 작품의 데이터를 통해 일정한 패턴을 추출하고, 시어를 수집, 모방한 것이어서 시인의 감각을 뚫고 나온 창의적 사고와 개성 넘치는 섬세함에는 다가갈 수가 없을 것이다. 인문학의 앞자리에 서온 문학은, 문학의 정점에 선 시는, 언제고 인간 사고의 정수를 뿜어냄으로써 시대정신을 선도해왔다. 시인은 여전히 우리 삶과..

고무인형 외 1편/ 조명신

고무인형 외 1편 조명신 내일로 이어지는 날들이 텅 빈 운동장에 부는 차디찬 겨울바람보다 가슴을 시리게 한다 꽝꽝 언 대야 속에 밀어 넣는 바가지는 얼음을 깨지 못하고 그 위를 빙빙 돌고 찬물은 손가락 사이사이 성난 가시처럼 파고든다 마른세수하고 나온 거리엔 먼지처럼 눈이 내리고 케이크 상자를 든 들뜬 손들 너머 곱은 손으로 빈 박스의 테이프를 뜯어낼 때 리어카 위 멸치박스에도 눈은 쌓인다 그리고 텅 빈 버스정류장 온열 의자에 앉아 해진 목장갑 겹겹이 낀 손 엉덩이 아래 밀어넣고 한숨 돌릴 때 울리는 핸드폰 소리 여보세요 엄마는 왜 그래 내가 뭐 어쩐대 그게 그렇게 아까워 너는 참말··· 징하게 너무한다 내가 좀 필요해서 부탁하잖아 엄마 아직 아침, 점심도 못 먹었어야 평소에 목소리라도 들으려고 전화함 ..

맥심모카마일드믹스/ 조명신

맥심모카마일드믹스 조명신 새벽 4시, 눈에서 알람이 켜지면 주머니 가득 커피믹스를 쑤셔 넣고 집을 나섭니다 잠이 덜 깬 주머니 속 녀석들이 걸을 때마다 투덜거립니다 친구를 만나는 날은 원두커피를 마시지만, 일하는 중간중간에는 휴게실로 숨어들어 맥심모카마일드믹스를 마십니다 믹스의 과묵한 편이지만 자극적인 매력에 이끌려 정수기 앞으로 끌려갑니다 나는 자동으로 100밀리 종이컵을 듭니다 컵에 물을 반쯤 붓고 3개를 한꺼번에 탑니다 그리고 꽤 사치스럽다고 생각하며 목구멍에 쏟아붓습니다 초콜릿보다 진한 단맛은, 혀에 닿자마자 음료 광고처럼 몸 구석구석으로 뻗칩니다 구석구석을 타고 흘러 내 피는 커피로 가득할 것입니다 쌀을 팔듯 쿠팡에서 맥심모카마일드믹스 200개입 한 박스를 삽니다 한 달도 못 가 바닥이 납니다빈..

눈사람 외 1편/ 유정

눈사람 외 1편 유정 까치 바람이 사르락 눈 밟으며 지나갔어요 지난밤을 뭉텅 선잠에 빼앗기고 부신 눈 비벼 창문을 여니 마당 위에 찍힌 발자국이 삐뚜름해요 아, 눈밭 길 걸어 온 아침 기별은 덜컹했어요 금쪽같은 청춘이 홀연 생의 껍질을 벗고 떠났다니요 천 근이나 되는 슬픔의 덩어리를 물고 온 까치는 눈길 밟아 밤을 걸어오는 동안 얼마나 애달팠을까요 톡톡 문자를 수신한 새의 발자국이 푹푹 젖어 있어요 어쩌나요 삼킬 수도 뱉어낼 수도 없는 참척의 아픔을 혹독하게 견디고 있을 남녘의 그녀, 문자 두드려 슬픔을 공유한다는 한 단락의 문장이 무슨 위로가 될까요 무너지는 가슴을 부축해 줄 단단한 어휘가 없다니요 행과 행이 온통 빨갛게 물들어 와르르 쏟아져요 바깥엔 누군가 새벽바람을 굴려 만든 눈사람이 서 있어요 열..

연민/ 유정

연민 유정 내가 자꾸 기울어 갑니다 가깝다고 믿었던 것들이 아득해지고 신음처럼 흐릿합니다 소리가 멀어지고 어깨가 헐거워 중심이 흔들립니다 저녁 빛이 서늘해 잔뜩 웅크립니다 시간이란 것, 사막의 모래바람 같은 것 동쪽에서 밝아 와 서쪽으로 저물어가는 하루치의 햇볕 같은 것 움켜쥐려고만 해서 내가 빨리 아득해진 걸까요 늘 경계만 하다가 귀가 점점 멀어진 걸까요 포장된 껍데기 속을 탈출한다면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있을까요 저물어가는 눈썹 끝에 희디흰 초승달이 뜹니다 아직은 낮달이라고 우기고 싶어 누군가의 이름을 부릅니다 낡아서 해진 옷자락을 여미며 서 있는 빈 들의 바람 같은 저녁이라는 적막한 이름, 애잔한 당신 -전문- 해설> 한 문장: "내가 자꾸 기울어갑니다" 시 「연민」의 도입부 첫 행이다. 삶은 늘 ..

이숭원_서정의 행로/ 짐승을 토하고 죽는 식물이거나 식물을··· : 김경주

짐승을 토하고 죽는 식물이거나 식물을 토하고 죽는 짐승이거나 김경주 부정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삶이여 내 혐오의 가장이여 그래, 누구나 자신과 가장 가까운 짐승 한 마리 앓다가는 거지 식물은 자기 안의 짐승을 토하다 가는 거고 인간은 피를 토하고 죽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식물을 모두 토하고 가는 거지 (나는 그 극의 이 부분이 수정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 바깥에 무슨 일이 있어도 멈추지 말아야 할 참혹 같은 거 부정의 힘으로 식물은 짐승을 앓고 있고 짐승은 식물의 소리로 울고 있지 생이란 부정을 저지르면서 매우 사적인 방식이 되어간다 자기 부정을 수정할 때 열 손가락에서 생겨나는 얼 거짓말의 글쓰기 같은 거, (채찍이 노예를 만든다) 그래, 우린 아주 다정하게 사적인 방식으로 멀어지고 있지 나..

간절곶 외 1편/ 김안

간절곶 외 1편 김안 나는 몰래 집에 사는, 어린 딸아이가 바닷가에서 몰래 들고 와 어느 구석에 놓아둔, 그리고 곧장 잊어버린 돌멩이가 되었고, 돌멩이가 둥근 배를 부풀리다 커다란 한숨을 쉬다가,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처럼 냉장고 구석 곰팡이 슨 사과처럼 유행 지난 철학서나 읽으니, 차고 아름다운 말만 고르며 온종일 앉아 있다 보니, 딸아이는 어느새 자라나 책상 옆에 지층처럼 쌓인 문예지 속에서 내 수줍은 얼굴을 찾아낸다. 배고프지 않은 저녁, 나도 모르는 새 책상 위에 놓인 돌멩이들처럼 딸아이와 나란히 앉아서 써본다 천천히 썩고 닳아가는 세갈 같은 이름들, 각지고 투명한 이름들, 녹아 발밑으로 흘러 긴긴 세월의 평행선이 될 이름, 말의 곳에 숨겨진 이름 모를 것들을 -전문(p. 90) ----------..

이 문장을 끝내지 못한 곳에서/ 김안

이 문장을 끝내지 못한 곳에서 김안 망각이 용서를 낳는다고 했던가, 그 용서가 영혼을 병들게 만든다고 했던가. 딸아이와 함께 나온 초저녁 산책길에 본, 죽은 나무 그늘 아래 죽은 잿빛 비둘기와, 죽은 새끼 고양이와, 이미 죽어 있던 것들, 갓 죽은 것들. 울던 딸아이를 달래 그네에 태우고 힘껏 밀다 보면 집집마다 뿌옇게 등 켜지고, 딸아이는 죽은 풍경을 잊고, 그네를 타며 작고 둥근 머리를 치켜들고 제 집이 몇 층인지 헤아리고, 그렇게 높고 가파르게 적재된 가정들 틈에서 나는 선한 의지와 땅과 몸, 얕고 서글픈 역사, 눈 밖에 있는 자들 등만을 딴에 멋지게만 기억하려 하겠지. 어쩔 수 없는 걸까. 과연 그럴까? 그럴 수밖에······ 이 문장을 끝내지 못한 곳에서, 이렇게 함께 너와 느릿느릿 춤추다 어리..

세계는 왜 존재하(지 않)는가??(발췌)/ 왜 차라리 무가 아닌가 : 박찬일

왜 차라리 무가 아닌가 박찬일 농구공 위를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다니지만 늘 그 자리다. 원주 위다. 2차원 시공간을 빠져나갈 재간이 없다. 원주는 동일하게 무한히 반복되나 어느 지점에 있건 농구공 표면이다. 2차원 시공간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농구공 표면이 우리집이라. 몰락은 3차원에서 왔다. 농구공 바람이 빠질 때 왜 차라리 무가 아닌가?로 끝나는 시詩가 무슨 상관인가? 농구공 반지름이 제로가 된 날, 농구공이 사라졌다. 왜 차라리 무가 아닌가?? -전문(『시와반시』, 2014-봄호) ▶세계는 왜 존재하(지 않)는가??(발췌)_박찬일/ 시인 '왜 차라리 무가 아닌가?' 라이프니츠의 질문이었다; 양자역학의 여러 빅퀘스천을 다룬 책 제목은 『세계는 왜 존재하는가?』였다. (······) 멸종은 늘 진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