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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시(부분)/ 장석원

음악과 시(부분) 장석원/ 시인 시의 문법과 노래의 문법은 다르다. 좋은 시니까 좋은 가사가 될 것이라고 믿는가. 좋은 노래는 좋지 않은 가사도 좋은 의미로 바꾸는 마법을 실행한다. 노래는 음악과 가사를 함께 거느린다. 둘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음악이라고 말할 것이다. 많은 고전음악은 가사를 갖지 않는다. 세고비아의 기타 연주에는 가사가 없다. 현대의 힙합 장르는 음악을 배경으로 밀어놓은 채 실연實演하는 새로운 구술口述 예술이 되었다. 시가 노래와 결합해야 한다고? 크로스오버(crossover),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 등등 여러 용어들이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단어는 '혼종(hybrid)'이다. 피와 피를 섞는 법을, 유전자를 교배하여 새로운 잡종과 돌연변이를 일으키..

한 줄 노트 2024.04.16

김덕근_장엄으로 펴는 바람의 경전(부분)/ 두타제월 : 한원진

두타제월頭陀霽月 한원진(1682-1751, 69세) 山如衆佛號頭陀(산여중불호두타) 부처님 모습 같아 두타산頭陀山이라 하는데 雨洗天邊足翠螺(우세천변족취라) 비가 내린 하늘가 파란 빛깔이 엉키었네 松上迢迢孤月擧(송상초초고월거) 달은 소나무 위로 높이 떠오르고 入簾靑影十分多(입렴청영십분다) 발 사이로 흐르는 그림자 너무 많은 듯하여라 -전문- ▶장엄으로 펴는 바람의 경전_ 진천군 두타산 영수사 영산회괘불탱(발췌)_ 김덕근/ 시인 절을 품은 두타산이 부처가 누워있는 와불 형상을 닮아 '두타산'이라 불렸기에 자연스럽게 보입나다. 두타는 단지 안분이나 지족이 아니라 깨달음을 위한 위대한 여정입니다. 부처의 제자에서 제일은 마하가섭이지요. '두타'를 흔들어 털어버린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두타산에 입산한다는 것은 번뇌와..

고전시가 2024.04.16

버려진 닻/ 김차영

버려진 닻 김차영 갯벌 속에 처박혀 녹슬어가는 뿌리 외로움을 힘껏 움켜쥐고 있다 저 뿌리에 매달려 몸피를 키워 잎도 피우고 열매도 매달았던 것들 썰물처럼 바다로 갔다 한데로만 떠도는 뿌리를 잊어버린, 아니 잃어버린 것들 망둥어처럼 바다에 가득하다 시나브로 뻘 속에 묻혀가며 눈은 수평선 위 고깃배를 따라가는데 그리움 더욱 붉어지는 버려진 닻 -전문(p. 52)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김차영/ 2021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미이라의 숲』

한국의 돌멘,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부분)/ 박상일

한국의 돌멘,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부분) 박상일/ 청주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 무덤은 종족과 사회집단마다 고유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보존성이 강해서 그 분포 범위와 이동 경로는 그들의 역사를 실증해 준다. 우리나라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무덤 양식이 나타나는데 청동기시대의 일반적인 무덤은 고인돌이었다. 비슷한 시기의 석관묘와 옹관묘, 그리고 돌무지무덤, 돌방무덤,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변화하면서 나라마다의 특징을 나타내고, 여기에 순장의 풍습과 풍수도참사상이 더해졌다. 고인돌은 거석기념물로 만들어진 돌무덤의 일종으로 영어로는 돌멘(Dolmen)이라 하고 한자로는 지석묘支石墓라 쓴다. 예전에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지석묘라는 명칭이 더 익숙하고 지금도 전국 각지의 문화재 명칭에 함께 쓰이고 있다. 이밖..

한 줄 노트 2024.04.16

광어/ 이서란

광어 이서란 해녀의 집 앞에서는 성산 일출봉이 대왕고래가 엎드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붉은 태양의 그물에 걸린 바다를 바라보며 유통기한이 언제까지일까를 생각했다 일출봉에 걸린 멍게와 소라 문어에 목을 맨 어머니 줄줄이 엮어지는 것들 살아서 결코 행복하지 못했던 삶 살아있는 것들의 유통기한을 바다는 쇄빙선처럼 부수고 있었다 고기 잡으러 먼 바다로 나간 아버지가 대왕고래인 양 엎드려 실려 온 날 어머니는 납작해져 꽃물을 흘렸다 몇 날 며칠 속을 다 비워내 조개껍데기같이 가벼워진 어머니 이어도사나 노래 박자에 맞춰 칼질하며 회를 떴다 비린내를 뒤집어쓰고 물질하는 어머니의 몸에 어느덧 비늘이 눌어붙어 있었다 햇빛의 궤적에 따라 바다의 바닥까지 누비며 어머니는 바다를 내재율로 품고 있다 나는 물질하는 어머니의 유통..

팥빛 파도/ 윤명규

팥빛 파도 윤명규 입천장에서 울음을 내려 본 적이 없다 꼬불꼬불 물 주름 사이로 양철 대문 삐걱거리듯 갯새들 목울대 세우며 햇살 비벼대고 그 찢긴 쇳소리 섬산 종아리에 쌓여 시장통 욕지거리처럼 서성인다 하늘이 옷을 벗고 뛰어들던 곳 별과 달은 저들끼리 속살 훤히 내보이도록 놀다 간 그곳 나 지금 미친 바람의 폭력으로 시린 몸 한 다발씩 허물어져 내리지만 출생의 비밀을 결코 발설하지 않았다 붉게 충혈된 서해의 눈 다리가 없는 파도 수장되듯 몸 담그고 있는 립스틱 지워진 노을의 추한 입술 퍽퍽 가슴을 치며 피울음 운다 -전문(p. 38-39)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윤명규/ 2020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허물..

공중은 누구의 것인가/ 김령

공중은 누구의 것인가 김령 누군가 슬피 울고 있다 창밖에서 누군가 숨어서 울고 있다 우는 것들은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가 숨을 토하듯 울음을 토해내야 한다고 너는 말했다 제때 울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무엇을 시작해도 정해진 것처럼 내리막길만 걷는다 영업 중, 임대합니다, 라는 팻말을 동시에 내건 가게 어떤 결단은 칼로 자르듯 단호할 수가 없지 행복한 건지 불행한 건지 짐작할 수 없는 노인의 표정 아이의 표정도 애매할 때가 있다는 걸 아이일 때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 몸이 사라진 체셔고양이의 웃음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길들, 모퉁이들 무논에 개구리들이 떼지어 울고 그 울음 끝을 먼 산의 올빼미가 따라 운다 우는 것들의 힘으로 초목이 자란다 -전문(p. 205-206) ---------..

처음 본 사람/ 정한아

처음 본 사람 정한아 입을 닫고 있을 때와 입을 열었을 때는 얼마나 다른지 인식과 판단을 오가면서 두려움과 사랑을 오가면서 인식을 죽이고 다시 판단을 죽이면서 흑백의 진공 총천연색의 어지러움 무수한 살해 속에 비로소 살아나는 숲 여전히 무언가 썩어가고 있을 테지만 내가 거기 묻힐 수도 있을 테지만 거기서 무섭고 슬픈 비밀을 노래하는 작은 새들 거기서 솟아나는 기름지고 향기로운 풀 -전문(p. 188) ----------------------- * 『딩아돌하』 2024-봄(70)호 에서 * 정한아/ 경남 울산 출생, 2006년『현대시』로 등단, 시집『어른스런 입맞춤』『울프 노트』, 시산문집『왼손의 투쟁』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 한강교 밑을/ 박순원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 한강교 밑을 박순원 명실상부 명불허전 명실공히 유명무실 자타공인 명약관화 나는 박순원이다 실명도 필명도 예금주도 박순원이다 주민등록상으로도 호적상으로도 박순원이다 친구들은 나를 수너니 수너니 수너나 수너나 부른다 박순원 박수넌은 무엇과 어울릴까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어떻게 쓰일까 박순원 씨 박순원 님 박순원 귀하 박순원 대리 박순원 과장 부장 박순원 사장님 박순원 대표 박순원 선생님 박순원 작 박순원 곡 박순원 해설 박순원 감독 음악 박순원 음향 편집 박순원 행인3 박순원 박순원의원 박순원부동산 수너니논술학원 (주)박순원 (사)박순원 박순원재단 박순원뼈해장국 우거지등뼈해장국 박순원갈비탕 박순원족발 박순원생식 박순원 만세 박순원의 봄 박순원과 아이들 박순원의 시간 박순원 시대 수너니..

새가 두 번 우는 까닭은/ 채상우

새가 두 번 우는 까닭은 채상우 왜 그렇다잖아 사람이 말야 사람이 죽기 전에 말야 사람이 죽기 몇 분 전에 말야 자기가 살아온 한생을 통째로 기억한다잖아 낱낱이 되산다잖아 주마등처럼 내달리는 등불처럼 어쩌면 지금이 바로 그때인지도 몰라 바로 지금이 마지막 숨결을 삼키고 있는 그 찰나인지도 몰라 그래서 몇 십 년 전 일이 아까만 같고 시방 피고 있는 저 목련이 이미 오래전에 지던 그 목련만 싶고 그래서 금방 지나고도 영영 그리워지고 내내 서운해지고 그래서 그래서인 거야 새가 두 번 우는 까닭은 피고 지는 목련 아래 아내 손을 맨 처음인 듯 꼬옥 쥐는 까닭은 -전문(p. 175) ----------------------- * 『딩아돌하』 2024-봄(70)호 에서 * 채상우/ 경북 영주 출생, 2003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