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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아홉 살의 강물/ 전순영

서른아홉 살의 강물 전순영 '콩코르드' 광장 나무도 풀도 뛰어나와 박수치고 은하의 별들도 반짝 반짝 웃음을 보태주었다 서른아홉 살 손끝에서 쓸려나가는 임산부처럼 배가 부른 그들을 싹싹 쓸어버리는 그 눈빛에 두 손 번쩍 들고 꼬꾸라지는 카리스마는 국경을 넘는 바람이 배달하고 있다 깨진 밥그릇을 수리하고 휘어진 척추를 수리하고 햇볕과 에어컨을 불러와 땀과 냉기가 핏줄을 타고 함께 돌아가라고 등을 다독이며 가지런히 추켜들고 찰랑찰랑 차오른 무논에다 다시 심고 있다 뽕나무밭을 움켜쥐고 훌훌 털어낼 때 매달린 벌레들이 두 손을 비비는데 시들었던 뽕나무밭이 새파랗게 살아나고 있다 뽀얗게 흙먼지 뒤집어쓰고 길바닥에 뒹굴던 돌들이 바퀴 굴리며 달려 나오는데 지금 지옥에 떨어져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그들의 날개는..

말모이/ 이현실

말모이 이현실 을지로 3가 뒷골목 얽히고설킨 전깃줄 아래 하늘이 손수건만큼 보이는 골목 2층 삐걱대는 나무계단 위에 K씨의 말모이 공장이 있다 온종일 탈탈탈 폐지 실어 나르는 이륜 오토바이 시동 거는 소리와 40년 함께 늙어가는 활자들 노안으로 흐려진 자판 위에 머리통만 한 볼록렌즈 바싹 들이대어 문장의 어긋난 뼈를 집어내고 가지런히 가다듬기도 하지 안구 건조증으로 침침한 눈 인공눈물 짜 넣으면서도 까끌까끌 모래알 같은 글자들 흩어진 말을 한자리에 모으지 모래바람 능선을 넘으면서 말들의 발자국을 그러모으는 낙타 한 마리 오늘도 구부정한 노구로 한 권의 책을 짓기 위해 닥나무 숲, 말모이 공장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전문(p. 160-161) * 말모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사전 시작노트> 인간의 삶을 바..

눈 온 날 아침/ 문근영

눈 온 날 아침 문근영 하얀 도화지에 발바닥 도장을 찍는다 닭은 새싹 도장 오리는 잎사귀 도장 강아지는 꽃 도장 세상을 포근하게 덮어주는 눈에게 참 잘했다고 제각기 칭찬 도장 꾹꾹 찍는다 -전문(p. 84) ------------- * 『미래시학』 2024-봄(48)호 에서 * 문근영/ 201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동시집『연못 유치원』『앗! 이럴 수가』『두루마리 화장지』『깔깔깔 말놀이 동시』외 공저 다수

동시 2024.04.21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8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8 정숙자 창조 창작 자연 예술 태양 등불 태양도 때로는 눈물에 휠까? 피가 끓기도 할까? (1990. 10. 4.) ‘싶은’ 그것이 사라졌다. 더 갖고 싶은, 더 맺고 싶은, 더- 더- ‘더’가 ᄉᆞᄅᆞ졌다. 이런 게 정화인가? 승화인가? 순화인가? (요즘 빈번히 체감하는 악 중 악) (그로 인한 효과일까?) 소박한 말씨와 웃음들이 미래형으로 안착한다. 각인은 공간을 겸한 시간까지도 거기 고정시킨다. -전문(p. 67) ------------- * 『미래시학』 2024-봄(48)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8/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8 정숙자 창조 창작 자연 예술 태양 등불 태양도 때로는 눈물에 휠까? 피가 끓기도 할까? (1990. 10. 4.) ‘싶은’ 그것이 사라졌다. 더 갖고 싶은, 더 맺고 싶은, 더- 더- ‘더’가 ᄉᆞᄅᆞ졌다. 이런 게 정화인가? 승화인가? 순화인가? (요즘 빈번히 체감하는 악 중 악) (그로 인한 효과일까?) 소박한 말씨와 웃음들이 미래형으로 안착한다. 각인은 공간을 겸한 시간까지도 거기 고정시킨다. -전문(p. 67) ------------- * 『미래시학』 2024-봄(48)호 에서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공검 & 굴원』『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등, 산문집『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

우크라이나 외 1편/ 박민서

우크라이나 외 1편 박민서 북반구의 찬 기류 속으로 수많은 길들이 생기고 있다 목적지 없는 발자국들은 양손의 짐보다 몸이 더 무겁고 불꽃으로 날아온 공중좌표 따라 숨소리들이 힘없이 부서져 내린다 곡식의 저장창고를 비워가는 사람들 빈 밭의 낙곡들은 입을 길게 내밀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들을 따라가고 싶을 것이다 살기 위해 떠나는 새들은 발자국이 없다 씨앗보다 총알이 더 많이 박힌 땅 입을 굳게 다문 곡식들은 새날의 종자가 될 수 있을까 깃털이 큰 새들은 평온한 땅을 찾아갈 것이고 깃털이 작은 새는 봄날을 기다릴 것이다 싸우는 자와 떠나는 자의 슬픔의 각은 같다 지상에서 한꺼번에 치른 장례들 추위가 몰아치면 달의 그늘에서 죽은 새의 모습이 보인다 아직 따듯한 묘지들 먼 북반구 쪽의 하늘은 잿빛 날개의 끝을 ..

실을 키우는 몸통이 있다는 사실/ 박민서

실을 키우는 몸통이 있다는 사실      박민서    모든 저녁은 목초지에서 돌아온다  빈방 가득 빛이 없는 연료들  이불 속에 가득 찬 실뭉치에  따듯한 말이 들어 있긴 할까   양 떼는 웅성거리는 밤에 자라서  등과 불룩한 배는 누구의 몸 치수를 재는지   길게 풀어져 나온 실뭉치들로  엉킨 저녁 페이지를 넘긴다   그때 서로의 얼굴에서 터진 솔기 같은 표정이 적힌다   바깥과 안쪽 모서리에 상처가 난다  저녁을 다 감기 전에는 아침이 오지 않을 것이고  풀밭에 떠도는 말을 양 떼가 몰고 다닌다   두 번 다시 감을 수 없는 서로에게 묶인 실타래  양 떼의 울음으로 실은 풀어지고 초식동물의 잠은 감긴다   입구를 흔들면 저녁이 짧아진 양 떼들이..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7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7 정숙자 그믐달에 줄 매어 공후로 탈까? 화살촉에 꽃 매겨 서편에 쏠까? 마음 없는 마음은 천지도 한 뼘 오르ᄅᆞᆨ내리ᄅᆞᆨ 먼먼 그네를 타네 (1990.10. 4.) 오래전 저 뒤뜰이 서리 낀 하늘이었군요 그 밤은 분명 협곡이었는데, 어떻게 빠져나왔을까요? 생각하고, 생각하고, 다시 생각합니다. 그뿐입니다. 협곡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란 슬퍼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고… 괴로워하지도 말고… 다만 수직/수평으로 한 올 한 올 ᄍᆞ보는 거였습니다. 아무리 가느다란 실일지라도 진실/진심을 부어보는 거, 그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협곡의 삶, 오늘도 진행 중입니다 니체의… 영원-회귀, 캄캄히 진화 중입니다 -전문(p. 66) ------------- * 『미래시학』 2024-봄(48)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7/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7 정숙자 그믐달에 줄 매어 공후로 탈까? 화살촉에 꽃 매겨 서편에 쏠까? 마음 없는 마음은 천지도 한 뼘 오르ᄅᆞᆨ내리ᄅᆞᆨ 먼먼 그네를 타네 (1990.10. 4.) 오래전 저 뒤뜰이 서리 낀 하늘이었군요 그 밤은 분명 협곡이었는데, 어떻게 빠져나왔을까요? 생각하고, 생각하고, 다시 생각합니다. 그뿐입니다. 협곡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란 슬퍼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고… 괴로워하지도 말고… 다만 수직/수평으로 한 올 한 올 ᄍᆞ보는 거였습니다. 아무리 가느다란 실일지라도 진실/진심을 부어보는 거, 그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협곡의 삶, 오늘도 진행 중입니다 니체의… 영원-회귀, 캄캄히 진화 중입니다 -전문(p. 66) ------------- * 『미래시학』 2024-봄(48..

종이시계/ 이서란

종이시계 이서란 꽃이 핀 자리에 시간이 맺혔다 어떤 시간은 히말라야산 핑크 소금 빛 같은 노을로 피기도 한다 피는 것들은 쉽게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지켜보는 눈동자가 촉촉하기 때문이리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피는 시간은 시계에 의존하는 명사名詞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끊임없이 초침의 페달을 밟고 밟아야 닿는 기억 가을이 오면 흰꽃나도샤프란은 선회하는 날개로 온다 젊은 날의 격동과 혼돈 삶의 애환과 살아 숨 쉬는 욕망이 싱싱한 꽃잎으로 유영하는 시간을 정복해야 한다 시간의 집 앞에서 날갯짓으로 초인종을 눌러보지만 눌러지지 않는 돌아가는 길을 어디에다 두고 온 것인지 시간이 핀 자리에는 색이 바랜 꽃잎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전문(p. 84-85)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