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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묘소에서/ 윤명규

미당 묘소에서 윤명규 초입의 말라비틀어진 고샅길 가파르게 구불텅거리고 시퍼렇게 날을 세운 억새들만 봉분 위로 쟁쟁했다 고개 숙인 엉겅퀴들 주홍 글씨로 속절없이 피어나 여기저기 숙명처럼 널브러져 있는가 따뤄 올린 술잔 속에 그의 아린 춤 그림자가 덩실덩실 흐느끼고 있다 첩첩으로 쌓인 세월의 더께 독침 세운 저 엉겅퀴는 언제 자기꽃 피워낼까 장수강 물바람이 상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동천冬天을 읊조린다 -전문(p. 79)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윤명규/ 2020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허물의 온기』

춘몽인화(春夢印畵) 외 1편/ 송뽈깡

춘몽인화春夢印畵 외 1편 송뽈깡 또 번지는 아지랑이. 벌리는 입술이 떨리네. 추억은 저절로 피어나는 것 잔잔한 불꽃이네. 그 미소 사진 한 컷 접지 않는 날개에 걸어두리라. 춘풍이란 셔터 누르며 벌이 윙윙거리면 용용한 봉오리 안에서 은근히 곰곰 웅크려대기만 하던 목련꽃잎이 밖으로 조심스레 너울거리네. 마주친 눈빛 위해 더욱이 부드럽게 펄럭여대는 이 아지랑이는 얇은 플레어스커트 자락의 우아한 흐느적거림이네. 심연이 떨리네. 지상의 모든 설렘이 그리 재발하고 시간은 더불어 노 젓게 되네. 흐드러지게 유희할 순筍 붕붕거려대는 15개 입춘으로부터 던져진 소년이여. 끈적하게 팔짱 껴대는 꽃잎 미소 25개 봄으로 진수한 나룻배에 싣고 소녀가 흐르네. 만연하게 춘풍이 부네. 더더욱 두근대는 이 에스프레시보 그리움은 ..

그 새는 새장이 구워준 빵으로 일생을 산다/ 송뽈깡

그 새는 새장이 구워준 빵으로 일생을 산다 송뽈깡 여러모로 날개여, 거뜬히 날아다닐 자작곡 걸쳤는가. 밖으로 나도는 음악이 새장을 소환하자 비상 길쌈해대는 새소리가 솟는다. 이때 길이 지휘해줄 터. 깃털 선언한 음표들이 흐른다. 운명이여, 바람으로부터 태어난 노래와 놀아날 일이다. 캄캄할수록 더 환해지는 법 그 길 쫓는 눈빛에서 발화해 솟은 등불 태우며 저를 가둔 새장 팔아, 활활 날개 사 먹는 새 말이다. -전문- 에필로그(저자) 상처가 큼큼거리고 눈물이 뚜벅거리는 이유 나 내 운명을 외상해버렸듯 이 시집은 해설을 달지 않는다. 신이 세상을 허한 것같이 나는 내가 시 쓰는 것 태초에 허락했기 때문이다. 냉큼 사로잡힐 줄 아는 느낌의 주인들이여. 감히 내 상처가 감동의 시간을 선포한다. 그로 말미암아 끈..

대패를 밀며/ 문화빈

대패를 밀며 문화빈 나는 아버지 염전이 내키지 않는다 바닷물을 가두면 나 자신도 갇혀야 한다 비옥한 햇볕은 질기다 촘촘한 햇볕의 눈치를 살피다가 장악되고, 과잉되다, 쓰러진다 그러다 바다를 방치하고,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준 건 무기력한 정차역 들이닥치는 뙤약볕 상큼을 모르는 땀방울 나는 대패를 밀며 휘적휘적 걸었다 퀴퀴 묵은 생이 발효될 때까지 길은 점점 잔인해지고 있었다 -전문(p. 63)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문화빈/ 2020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파이(π) 3.141592...』

무심(無心)/ 나채형

무심無心 나채형 엉큼성큼 무심無心 울퉁불퉁 비윗덩이 허황한 창고 무모한 사고 망상이 살고 있는 섬 붓 한 자루에서 세상이 풀려나오던 위리안치의 어두운 밤 저기 수선화 한 포기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뿐 -전문(p. 59)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나채형/ 2021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사막의 보트 타기』

마음 머는 소리 외 1편/ 정수자

마음 머는 소리 외 1편 정수자 이화우 좀 보자는데 살이 선뜩 떨려서 몸살약 뒤져보다 빈 약갑을 구기고 널뛰는 잎샘 꽃샘을 갑인 양 흘겨주다 뉘보다 깊이 정든 스마트 체위라고 위문이나 주문할까 폰을 들고 엎드리다 속 모를 흰소리 판에 속이 외려 시린 날 무람없는 톡이며 인증샷 팍팍 지우다 지음이란 너마저! 버리고 돌아서니 꽃 적실 수작酬酌도 없이 마음 머는 소리만 -전문(p. 65) ----------- 호적 결국은 보가 터진 개발지의 형제 필지 호적까지 들먹거린 명절 끝이 파묘라니 그나마 헌 집도 헐고 찬 우물도 꾹 메우고 그런 한때 흘리고 간 대못 같은 뼈 한 편이 선산에 달 좋다고 호적胡笛 찾아 부는지 놓아둔 눈물 고르듯 은하수도 파르라니 -전문(p. 70) ----------------------..

사족/ 정수자

사족 정수자 입술을 댈 듯 말 듯 서운히 보낸 어깨 돌아서고 나서야 없는 너를 만질 때 귓전에 연해 밟히는 중저음의 느린 여음 끝동을 길게 두다 서운해진 노을처럼 말 없는 말 그리며 사족사족 매만지네 자판에 자그락대는 자모음을 깨물어보듯 -전문(p. 24) 해설> 한 문장: 3 · 4조 혹은 4 · 4조가 거의 그대로 지켜지는 이 작품은 바로 그 오래 익숙한 가락 때문에 읽는 순간 이미 절반은 읽는 자의 피부 속으로 바로 들어간다. '육화된 가락'이라고 하면 정확할 이 소리는 적어도 한국어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겐 매우 중요한 것이다. 포르투갈의 전통 음악인 파두에 '사우다드Saudade'라 불리는 포르투갈 고유의 정서가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시조의 가락엔 한국어 공동체의 오래된 공유 정서가 깔려 있다...

송현지_기르는 마음(발췌)/ 당근밭 걷기 : 안희연

당근밭 걷기 안희연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모두 나의 땅이라 했다. 이렇게 큰 땅은 가져본 적이 없어서. 나는 눈을 감았다 뜬다. 있다. 무엇을 심어볼까. 그게 뭐든 무해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눈을 감았다 뜨면, 무언가 자라기 시작하고. 나는 기르는 사람이 된다. 주황은 난색暖色이에요. 약동과 활력을 주는 색. 그는 내가 머잖아 당근을 수확할 거라 했다. 나는 내가 바라온 것이 당근이었는지 생각하느라 잠시 휘청했으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한 쏟아짐이라 믿었다. 하지만 당근은 보고 있었네. 나의 눈빛. 번뜩이며 나를 가르고 간 것. 나의 당근들, 흙을 파고 두더지를 들였다. 눈을 가졌다. 자루를 나눠드릴게요. 원하는 만큼 담아가셔도 좋아요. 혼자 먹기 아까운 당근들, 수확의 기쁨을 누리며 떠나보낸 ..

임승빈_별에 이르는 길(발췌)/ 저녁에 : 김광섭

저녁에 김광섭(1905-1977, 72세)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전문- ▶별에 이르는 길(발췌)_ 임승빈/ 시인 이 시는 1969년 11월에 발행된 시집 『성북동 비둘기』에 실려 있다. 당시에 나는 이 시집을 사고도, 이 시는 읽을 수가 없었다. 목차에 보면 이 시는 83쪽에 있어야 하는데, 내 시집은 77쪽부터 96쪽까지가 없었다. 파본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군 복무 중이던 1976년 초봄에 외출을 나갔다가 전주에 있는 에서 1975년 에서 나온 김광섭 시선집 『겨울날』을 샀고, 거기에서 비로소 이..

파도의 걸음/ 김충래

파도의 걸음 김충래 끝이 보이지 않는 길 걷다 보면 깨알 같은 글자들이 빼곡히 쌓여 있는 모래사장에 닿는다 가볍게 흰 등짐을 내려놓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다시 일어서서 모래 속을 걷는다 떨림으로 자지러지기도 하도 가늘게 우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때때로 만나는 썩은 웅덩이 발이 흐느낀다 파고와 싸우며 무작정 걸어온 생 멀리 갈수록 가까이 있는 듯 아리송한데 뒤돌아보아도 발자국은 없다 -전문(p. 56)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김충래/ 2002년 『미네르바』로 등단, 미네르바문학회 & 군산문협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