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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등(飛騰) 5/ 최승철

비등飛騰 5 최승철 '컷쇼*' 라는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직장을 잃을 것 같다는 두려움과 절박감 비가 내리자 향초처럼 흙 냄새가 피어올랐다 이혼 후 많은 것을 잃었다 행복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꿈속에서 당신의 알몸을 매만지면 무엇인가 생각이 날 것만 같아 허둥대다 깨어 방금 전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번엔 정말 소중한 기억이 생각나지 않을까 두려워졌다 꿈이 아니었다 어느 아침 나는 온전치 못한 혼자다 -전문(p. 173-174) * 톱날을 밀고 당기는 전동 톱의 일종. 보통 건설현장에서는 '컷쇼'라고 부르는데 영어식 표현은 reciprocating-saw이다. ----------------------- * 『딩아돌하』 2024-봄(70)호 에서 * 최승철/ 전북 남원 출생, 2002년『작가세계..

토월천/ 배한봉

토월천 참새 배한봉 잠시 찬 바람 잦아들고 비닐 조각처럼 햇볕이 걸린 천변 난간에 예닐곱 참새가 앉아 짹짹거리고 있다. 몸 숨길 마른 풀도 없고 식량이 될 벌레나 알곡도 없고 둥지 틀 처마 밑이나 흙담 구멍도 없는 하천 바닥을 몇 번이나 맴돌다가 천변 난간으로 날아올라 앉아 저들끼리 뭐라뭐라 토론하고 있다. 할아버지 참새들이 여기서 모래 목욕 즐겼다더라고 옛이야기 재잘대는지 모른다. 종족들과 이사 오려 했는데 혹한기에 낭패라고 한탄하는지 모른다. 뭔지 할 말 남았다고 짹짹거리다 조그맣고 까만 부리 닦던 비닐 조각 같은 햇볕을 놓치고는 황급히 날아오르는 참새들. -전문 (p. 166) ----------------------- * 『딩아돌하』 2024-봄(70)호 에서 * 배한봉/ 경남 함안 출생, 199..

바다 풍경/ 이경아

바다 풍경 이경아 흐르는 것들은 흘러가는 시간에 맡기라 노래하는 것들은 내일을 노래하게 하고 고이는 것들은 별처럼 가라앉게 하라 장밋빛 목선을 고즈넉이 저어가며 어부는 바다에 그물을 깊이 던지고 별을 건져 올려 바람 따라 갯내를 실어 나르네 놀란 파도 흰 거품 물고 젖은 머리채를 흔들어도 생사生死 넘나들 깃발을 펄럭이는 한 폭의 바다 풍경 눈에 밟힌 목선이 오래도록 바다를 어지럽게 붙들고 있네 -전문(p. 33)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이경아/ 1965년 수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물 위에 뜨는 바람』『내 안의 풀댓잎 소리』『오래된 풍경』『시간은 회전을 꿈꾸지 않는다』『겨울 숲에 들다』『지우개가 없는 나는..

천수호_사랑과 하나인 자의식(발췌)/ 그늘을 만드는 시간 : 이규리

그늘을 만드는 시간 이규리 열차가 달리는 동안 하늘은 개다 흐리다를 반복했다 터널을 몇 개 지나면서 창 쪽의 내가 가리개를 살며시 올렸다가 빛이 돌아오면 내리곤 했다 옆자리의 책 읽는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게 나의 일 몇 차례 가리개를 올리고 내리는 동안 나는 책 읽는 사람 옆에서 그늘을 만들어주는 사람으로 사는 게 퍽 어울린다 생각했다 어둠과 밝음을 발명해내는 시간 안에는 반지하의 터널이 있고 옥탑의 가파름이 있었다 그렇더라도 들고 나는 마음은 왜 이토록 세심한가 쓸쓸할 때 하찮음은 몸에 밴 나의 일, 그게 누구라도 부디 가리개를 올리고 내릴 때의 힘이 고요하기를, 적당하였기를 햇빛을 조절하던 집중은 꽤 쓸 만했지만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모르게 끝나야 하지 않은가 책의 제목이 궁금했던 한 사람을 ..

전철희_유토피아를 향한 열망과 자유(발췌)/ 연두 : 신동옥

연두 신동옥 아름다운 시절에는 거짓부렁으로 슬픈 이야기를 지어 나누어 가졌다 온몸으로 흐느끼며 기둥을 감아 오르다가 댓돌에 스미어 번지던 봄빛 오래 버려둔 마당으로 잡풀이 옮아가고 홀씨 터럭 날리는 박석 위에 살림을 차린 고양이 주인을 잃은 처마 밑으로 예년의 제비가 돌아왔는데 지붕은 반나마 내려앉았고 아귀가 틀어진 문틈으로 보인다 더는 견딜 수 없던 그 언젠가 부러 나누었던 서글픈 이야기 그마저 이제는 꿈만 같아서 넘치는 설움을 봄빛에 비벼 고수레로 모셔둔 지붕 너머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뒤꼍 대숲 언저리 새잎 곧 돋아나는 봄 한철 일없이 무성해 갈 꽃과 이파리의 계절 사이를 긋고 지나가는 소낙비에 물든다 기묘히도 흐렸던 하늘 갈라 터지는 구름장 아래로 눈..

파도 보호무역/ 김영

파도 보호무역 김영 해안은 음모를 거래한다 이 파고를 다독이지 못하면 더 높은 바람이 찾아온다 수평선이 오늘도 몇몇 사건을 보내온다 집어등은 늦은 새벽까지 물결의 동선을 추적한다 해외 직송의 물품은 좀 더 찰랑이는 상품으로 바꾸어 팔기도 한다 매진되기 전에 주문하라는 광고를 우리는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질 좋은 부패는 유통기한이 지날수록 싱싱하다 각종 물목이 차오르는 해안에서는 한물간 파도가 최신 유행이다 - 전문 (p. 30)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김영/ 1996년 시집 『눈감아서 환한 세상』으로 등단, 시집『벚꽃 지느러미』『파이디아』『나비편지』외 다수

거울 속 한 송이 꽃 외 1편/ 한이나

거울 속 한 송이 꽃 외 1편      한이나    누구를 닮은 것일까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  그 아득한 연결점의 누군가를 허공에서 꺼내본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한 번도 보이지 않은 사람 아버지, 거울 속 나를  뜯어보면서  그 누군가의 성향과 정서와 용모  그 무엇이 그에게서 내게 전해 왔는지  자식에서 자식 다시 자식까지  뿌리를 내려다보며 기질까지 낱낱이  유추해 본다   내 안의 피와 살과 뼈를 준 숫자와 기호들  살아 무성했을 말과 공허했을 몸짓들   전전긍긍 여기까지 무사히 온 것만도 덕분이라고  물결무늬 감정이 레테 강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은총의 실마리를 찾아 간신히 바늘귀에 꿰어놓는다   누구를 닮은 것일까  어떻게'  꽃 한 송이로 피어 있을까  나는     -..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한이나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한이나 삼십 년 된 목백합 한 그루가 창을 가린다 내가 오두마니 앉아있는 그늘의 집에 그가 낮에도 불을 켜라고 성화다 그는 조금의 어둠도 참지 못하고 불을 켜는 사람, 나에겐 불 밝혀 어둠을 몰아내는 그가 있다 그늘에 상주하는 내가 있다 나는 녹색의 장원에 꽁꽁 숨어 등뼈가 굽었다 푸른 그늘로 뒤덮여 조금은 어둡고 침울한 집, 환한 햇살에 칸칸이 슬픔을 알몸으로 내보이지 않아서 좋다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불운도 시샘 안 하고 비껴갈 푸른 잎사귀 그늘의 집, 행여 뼛속 저 깊은 곳 또아리 튼 슬픔이 도질까 세상과 대적하지 않고 창밖 숲속 쪽문을 가만히 연다 내 안의 다른 길, 비밀의 정원 행간을 풀어 읽는다. 나에겐 어둠을 내쫓는 그가 있고 그늘을 찾아 앉는 내가 있다 -전..

앤솔로지, 꽃잎을 모은(전문)/ 임승빈

앤솔로지, 꽃잎을 모은(전문) 임승빈/ 본지 주간 『딩아돌하』가 벌써 통권 제70호다. 편집진은 이 일흔 번째의 발간에 의미를 두어 특집을 엮자고 했다. 지금까지는 5년(제20호), 10년(제40호)에 새로운 각오를 다지곤 했는데, 18년째인 제70호를 기념하자고? 어느 한 호 쉬운 적이 없었지만, 열악한 재정 형편 속에서 편집진도 어지간히 힘이 들었나보다.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 오래 전, 어느 자리에서 나는 '시는 꽃잎으로 만든 폭탄'이라 말한 적이 있다. 꽃잎을 모아 만든 폭탄이 우리 머리 위에서 터지고 또 터진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그래서 우리는 시를 쓰고, 또 읽는 게 아니냐는 취지였는데, 좌중의 몇은 그게 누구의 말인지를 궁금해 했다. 분명..

권두언 2024.04.13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6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6 정숙자 여름날 뭉게구름만큼이나 많은 슬픔을 농사지었습니다. 그 목화로 실을 뽑아 하늘 닿는 가락을 수놓으려 합니다. 희디흰 실을 뽑고 남은 씨앗으로는 내일을 그리지요. 검고 검은 겨울밤이면 창문 흔드는 바람 소리와 ᄒᆞᆷ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삐걱삐걱 세상을 읽겠습니다. (1990. 10. 8.) 지금, 이곳은 어디일까요? 연옥이란 단테 알리기에리가 『신곡』에 쓴 사후 세계 어디일까요? 아닌 듯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고 보니… 하루하루ᄀᆞ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고 보니… 저녁노을이 새삼 꽃ᄃᆞ웠습니다 -전문(p. 2_자필// p. 160-161_한컴) ----------------------- * 『딩아돌하』 2024-봄(7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