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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6/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6 정숙자 여름날 뭉게구름만큼이나 많은 슬픔을 농사지었습니다. 그 목화로 실을 뽑아 하늘 닿는 가락을 수놓으려 합니다. 희디흰 실을 뽑고 남은 씨앗으로는 내일을 그리지요. 검고 검은 겨울밤이면 창문 흔드는 바람 소리와 ᄒᆞᆷ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삐걱삐걱 세상을 읽겠습니다. (1990. 10. 8.) 지금, 이곳은 어디일까요? 연옥이란 단테 알리기에리가 『신곡』에 쓴 사후 세계 어디일까요? 아닌 듯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고 보니… 하루하루ᄀᆞ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고 보니… 저녁노을이 새삼 꽃ᄃᆞ웠습니다 -전문(p. 2_자필// p. 160-161_활자) ----------------------- * 『딩아돌하』 2024-봄(70)호 에서 * 정숙자/ 전북 김제 출생..

박순원_우리시 다시 읽기(전문)/ 창의문외 : 백석

창의문외     백석 (1912-1996, 84세)    무밭에 흰나비 나는 집 밤나무 머루 넝쿨 속에 키질하는 소리만이 들린다  우물가에서 까치가 자꾸 짖거니 하면  붉은 수탉이 높이 샛더미 위에 올랐다  텃밭가 재래종의 임금林檎나무에는 이제도 콩알만 한 푸른 알이 달렸고 희스므레한 꽃도 하나 둘 피어 있다  돌담 기슭에 오지항아리 독이 빛난다    -이숭원, 『백석 시, 백 편』, 태학사, 2023, 149쪽, (전문)   ◈ '창의문'은 조선시대 4소문 중의 하나로, 1396년도성을 쌓을 때 북서쪽에 세운 문으로 '자하문'이라고도 한다. 돌로 쌓은 홍예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구조의 문루가 있다. 4대문 중 북대문인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었으므로 경기도 양주 등 북쪽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은 이 ..

이판사판문인(理判事判文人)의 꽃나무 그늘/ 김홍은

이판사판문인理判事判文人의 꽃나무 그늘 김홍은/ 수필가 이판사판문인理判事判文人 문학에도 이판사판문인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작가가 글은 안 쓰고 문학의 길을 선도하는 인도작가引導作家의 역할만 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소재를 찾아서 서론, 본론, 결론을 설명하다 보면 결국은 내가 쓰고자 하였던 생각을 다른 사람이 쓰고 마는 형편이었습니다. 이런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남다른 작품을 쓰는 작가다운 작가를 배출하지 못함에 늘 욕심만 앞세우고 채찍을 하지만 좋은 작품 쓴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임에 고민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수강신청을 하고 작가의 길을 걷는 수필가가 좋은 수필을 발표하지 못하면 자신이라도 문단에 좋은 글을 써야 하는데, 못 씀에 한탄뿐입니다. 그동안 각 문학지에 신작수필..

에세이 한 편 2024.04.11

사람이라는 곳으로 가 보다 외 1편/ 동시영

사람이라는 곳으로 가 보다 외 1편 동시영 오월, 줄장미가 줄지어 꽃이라는 곳으로 가 보고 있다 해마다 가도 아직 다 못 간 모양이다 담에서 벽으로 끝없는 행렬 길에서 길로, 사람들 줄지어 사람이라는 곳으로 가 보고 있다 목숨은 다, 붉은 장미 다만, 가 보는 곳이다 -전문- ------------- 판화전 인산인해 인사동 네거리 찍고 찍혀 나온 생생한 판화 속 박수근 판화전이 판을 벌였다 '빨래하고' '기름 팔고' '집으로 가고' 판화와 판화 사이 구경하는 나도 판화 서로 봐 주는 판화와 판화 사이 세상은 거대 상설 판화전 판화가 없을 때도 판화는 있었고 복사기가 없을 때도 복사는 있었다 찍고 찍히고 찍어 걸고, 날마다는 나와 발자국으로라도 찍고 봄날은 더욱 판화의 계절 매화, 라이락, 산수유, 매발톱..

오징어/ 동시영

오징어 동시영 몸이 화살표다 어디로 가라는 화살표인가? 온 바다 헤매는 화살표, 따로, 방향할 곳이 없다는 거냐? 사는 건, 그냥, 헤매는 거란 말인가? -전문- 해설> 한 문장: 참으로 유머러스하다. "몸이 화살표"인 오징어에게 화자가 묻는다. "어디로 가라는 화살표인가?" 이것은 삶에 대한 화자의 물음이요, "따로, 방향할 곳이 없다는 거냐?" 이것은 화자 자신의 대답이라고 보아도 된다. 삶에 무슨 필연적인 방향이 있나? "그냥, 헤매는 거" 아니냐. "화살표"인 것 같지만 가리킬 곳이 없다. "온 바다 헤매는 화살표" 이게 우리의 인생 아니냐. (···) 그러니까 이 시집은 방향 모를. "화살표" 없는 바닷속 같은 세상을 바람처럼 멀리, 가까이 떠돌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오늘"을 ..

낙월도, 물안개에 갇힌/ 김금용

낙월도, 물안개에 갇힌      김금용    전남 영광 끝머리  서쪽 바다 낙월도에서  당분간 나는 패랭이꽃이나 되리   어쩌다 찾아오는 외지인에게  꺾이고 휘둘리며 묻어뒀던 사랑  종아리에 달라붙는 끈끈이주걱풀꽃인 듯  하얗게 가슴 부풀려 서 있을 터   달은 져서 비릿한 갯벌에 숨고  물안개에 갇힌 낙월도  사흘째 뭍으로 나갈 기미도 없이  당분간의 이 유예가 행복할 뿐,  법성포 순도 높은 증류수 몇 잔에 취해  한 눈빛으로 돌아드는 꺽새 춤사위  열 손가락 닿는 대로 화들짝 깨어나는  자귀나무의 연지빛 사랑  때늦은 설렘 빈 잔에 채워  새벽 열리는 퍼런 하늘가로 뿌려 버릴 터   품에 안기면 곧 부스러질  눈물 일렁이며 뱃전 쫓는  하얀 포말로 달려가 서 있을 터      -전문(p. 24) -..

『서울문학광장』을 열며/ 권용태

『서울문학광장』을 열며 권용태/ 시인· 서울문학광장 이사장 갑진년 청룡의 해가 밝았습니다. 임원진들과 회원님들의 가정에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한국 문단의 위상을 더 높이고 새로운 문학의 지평을 열어갈 「서울문학광장」의 출범은 명실공히 범문단적인 신뢰와 소통의 광장을 마련하게 되었다는 데 큰 의미를 갖습니다. 2001년 10월 설립된 사단법인 의 창립 정신과 목적을 계승하는 가운데 한국문단 전체를 아우르는 여러 활동을 통해 문인과 시민, 특히 청소년들과의 교감을 넓혀 우리 문학의 진면목을 널리 알리고 자아실현과 상생의 기풍을 진작해 나가고자 합니다. 사단법인 「서울문학광장」은 한국 문단의 구심점이자 보금자리로서 문인들에게는 보다 수준 높은 문학작품을 낳을 수 있도록 창작의욕을 북돋우고 독자들에게는 ..

권두언 2024.04.09

바다/ 강우식

바다 강우식 1 바다 곁에 오면 시끄러운 세상사 파도에게 도거리 줘 말끔히 밀어내고 싶다 바다 곁에 오면 갑자기 율리시즈처럼 배 밑창이 울리도록 가슴을 쾅쾅 치고 싶다 2 바다에 한번 빠지면 그 심연의 밑바닥까지 간다 그 심연의 세상은 너무 어둡고 캄캄하다 절망의 외침보다 더 크고 묵중한 침묵이 있다 경험한다는 거 배운다는 거 안다는 치 너무 하찮다 물이 커서 놀기 좋고 뜨기 좋다고 하지만 그 죄여 오는 압력을 어이 감당하랴 발버둥질 친다는 거 자체가 꿈속의 행동 같다 모든 것이 항공모함 같은 육중한 문이면서 모든 것이 문이 없는 첩첩산중과 같은 감옥이다 인간은 그런 바다에서 허우적대며 살아간다 3 생맥주 잔 만한 내 머리가 바다 쪽으로 기운다 파도가 흰 거품을 일으키며 출렁 담긴다 젊은 날에는 가슴에 ..

암향부동(暗香浮動) 외 1편/ 강우식

암향부동暗香浮動 외 1편 강우식 환자들은 의사에게 한번 잡히면 죽어서야 풀려난다. 비뇨기과는 여섯 달에 1번 새로 다니는 신장내과는 매달마다 1번 혈액종양내과는 일 년 걸쳐 1번 진료 때마다 채혈실에 들러 피를 뺀다. 그밖에 종합검진에서 뽑는 피도 있다. 피가 아까워서 적게 뽑으려고 시도도 해 보았지만 말짱 도루묵이다. 내 병의 경과는 피검사로 끝난다. 쉽다. 피검사 차트만 볼 줄 알면 의사도 되겠네. 병을 고치기보다 점점 몸에 피가 말라서 죽겠다. 피는 내 몸의 향기다. 내가 가진 사람냄새를 풍기는 향기다. 그 향기가 사라지면 죽는다. 어젯밤 꿈에는 15,6년 사별한 아내가 그동안 홀로 살아 갸륵해선지 머언 먼 길을 암향부동으로 와서 그 향기를 내 몸에 수혈해 주고 갔다. 감격해 아내 이름을 부르며 비..

주마간산(走馬看山)/ 강우식

주마간산走馬看山 강우식 1. 주마간산은 세월 속의 행운유수行雲流水처럼 흐르는 파노라마다. 어사화御賜花를 꽂지는 않았지만 말 타고 달리며 산천경개를 대충이라도 보고 싶지 않았겠느냐. 흐르면서 지나치면서 그냥 무심한 듯 본 산이 무위자연으로 있어 부끄러움이 없고 나그네 행색이라도 눈썰미가 있어 산자락을 그냥 지나친 것이 아니라 부모님 모실 묫자리로 안성맞춤으로 점찍어 염두에 두었나니. 그냥 바쁘게 무심히 본 것인데 무욕이 되어 삭여서는 마침내는 티를 거른 욕심이 되었다. 저 산을 사서 부모님 묘로 쓰려면 아무래도 수중에 푼돈이라도 챙겨야겠기에 주마가편走馬加鞭하며 하루를 내딛는다. 2. 고향에는 어머니만 계신 게 아니라 오래도록 떨어져 살은 내 짝도 있다. 그런 정을 과거에 묻고 떠돌았다. 날품팔이 같은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