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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조_찰나적 동선과 버려지는 물상에서···(발췌)/ 신발論 : 마경덕

中 신발論 마경덕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무더기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 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전문(p. 201) ▶ 찰나적 동선과 버려지는 물상에서 찾은 객관적 상관물_마경덕 시인의 시를 읽으며(발췌)_ 김유조/ 소설가 마경덕 시인은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신발論」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20년도 더 전에 나온 ..

물이 깊다/ 지연

물이 깊다 - 소룡골 시편 지연 * -니 에미는 땡볕에 대수리 잡으로 가서 그냥 칵 뒈져버렸는갑다 입맛 잃은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는 물속을 헤매고 * 양재기에 염색약을 푼 어머니 몇 가닥 없는 아버지 머리카락을 칫솔로 곱게 빗어 내린다 앉은뱅이 의자에 아버지가 새침하다 * 빵빠레 아이스크림을 두 개 사다 주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임자 그만 일혀 * 아버지 돌아가시고 평생 함께하던 스탱 밥그릇이 없어졌다고 어머니는 어깨를 들썩였다 * 경로당에 쓰르라미로 달려가는 어머니 -전문(p. 196) ------------- * 『미래시학』 2024-봄(48)호 에서 * 지연/ 2013년『시산맥』 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등단, 2016년 《무등일보》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시집『건너와 빈칸으로』『내..

일반 병동의 저녁/ 정지윤

일반 병동의 저녁 정지윤 똑, 똑, 링거 방울 떨어진다 날카로운 소리들이 나를 찌른다 침대 밖으로 모르핀 같은 구름이 창을 가득 채운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맨발로 달려가는 햇살의 끝 몸을 뒤틀 때 묻어나는 아, 통증 없는 잠 매일 싸우다 흐릿해지는 나는 거울 뒤 다 보이는 버편의 환한 저녁을 왜곡한다 사라지는 것들에 전염된 얼굴아, 울지 마라 빠져나가는 머리카락 한 올 -전문(p. 188-189) ------------- * 『미래시학』 2024-봄(48)호 에서 * 정지윤/ 2015년 《경상일보》신춘문예 시 부문 & 2016년 《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 부문, 2014년 《창비 어린이》 신인문학상 동시 부문 당선, 시집『나는 뉴스보다 더 편파적이다』, 시조집『참치캔의 의족』『투명한 바리케이드』, 동시집『어..

브룩샤 아사나/ 정선희

브룩샤 아사나 정선희 그건 무의식 중에 새어 나오는 소리였다 옆에서 나는 소리인데 왜 내 가슴에 금이 가는 걸까 아야, 아야 소리를 내면서 견딜 수 있는 아픔이 있다 몸을 통해 마음의 통증이 빠져나오는 수가 있다 브룩샤 아사나 그녀가 한쪽 다리로 서서 두 손을 모아 머리 위로 쭉 폈을 때 촛불이 휘청, 나는 눈을 부릅뜬 채 거울 모서리에 있는 한 점을 노려보았다 생각이 끼어들면 점이 보이지 않아 점은 사라졌다가 두 개 세 개가 되었다 거울이 수면처럼 일그러지는 그때 발등에 떨어지는 촛농을 보았다 앗, 뜨거! 그녀 대신 내가 넘어졌다 -전문(p. 180) ------------- * 『미래시학』 2024-봄(48)호 에서 * 정선희/ 2012년 『문학과의식』 시 부문 등단 & 2013년⟪강원일보⟫ 신춘문예..

마라톤/ 김충래

마라톤 김충래 창공에 큰 고래 한 마리 날고 뱃고동 축포처럼 울리면 오색 갈매기 일제히 공중부양 환호성이다 청어, 고등어, 꽁치 떼 지어 파도타기 하며 썰물처럼 빠지면 아직은 준치랴 우기며 휩쓸린다 줄지어, 무리 지어 순행과 역행을 즐기다 홀로 파도와 맞선다 가끔 물 위로 솟구쳐 거칠게 찬물 내뿜는다 향고래 먹은 청어 웃으며 들어오고 만세 부르며 고등어 골인하고 상어한테 지느러미 공격당한 꽁치 절룩거리며 결승선 통과한다 밀물이 되어 밀려온다 썩지 않는 준치 되려 나아간 그 세월에 꼬리지느러미가 잡힌 채 휘청거리며 들어온다 살아있다는 것은 가끔 자기 몸을 꼬리로 한번 세워보는 것이다 그래도 준치는 눈동자에 고래 한 마리 키우며 먼 곳 바라본다 -전문(p. 117) --------------- * 군산시인포..

폭우 3/ 김차영

폭우 3 김차영 늦깎이 시인이 되어 비애 가득한 모난 돌의 상처를 언어로 씻어 광을 내자 한 권의 시집이 되었다 애주가인 친구에게 책을 건네자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우리 친구가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동네방네 술을 쏟아낸다 열이 뻗치면 친구들 사이에서 육두문자로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의 친구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술로 퍼부어댄다 자기 술처럼 술술술 퍼붓는 친구가 참, 훌륭한 사람이네 -전문(p. 102)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김차영/ 2021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미이라의 숲』

김원길_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부분)/ 무언재운 : 지촌 김방걸

무언재운無言齋韻 지촌 김방걸(芝村 金邦杰 1623-1695, 72세) 一臥蒼江歲月深(일와창강세월심) 강촌에 돌아온 지 몇 해이러뇨 幽居不受點塵侵(유거불수점진침) 숨어 사니 한 점 티끌 묻어오지 않네 已知漁釣還多事(이지어조환다사) 고기잡이 낚시질도 번거로웁고 更覺琴碁亦攪心(갱각금기역교심) 거문고며 바둑두기도 심란하구나 石榻任他風過掃(석탑임타풍과소) 앉아 쉬던 바윗돌은 바람이 쓸게 두고 梅壇輸與鳥來吟(매단수여조래음) 화단도 돌보잖아 새가 와서 우짖네 如今全省經營力(여금전생경영력) 이제금 해 오던 일 모두 접고서 終日無言對碧岑(종일무언대벽잠) 종일토록 말없이 푸른 산 보네 - 전문, 김원길 譯 ▶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발췌)_ 김원길/ 시인 나의 13대 조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 선생의 시, 무언재운無言..

고전시가 2024.04.21

혼자 먹는 점심/ 사공정숙

혼자 먹는 점심 사공정숙 평일 낮 시간에 아들과 점심을 먹었다. 모처럼 휴가를 받아 회사를 쉬는 아들과 얼굴을 맞대고 식탁에 앉았으니 즐겁지 않을 리 없었다. 한가로이 식사를 즐기는 가운데 문득 아들이 물었다. "엄마, 평소에는 점심을 어떻게 드시죠? 혼자서 드셔야겠네." 새삼스럽게 딱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걱정을 해주었다. 철이 들었을까. 아들은 혼자서 밥을 먹는 엄마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다가 누군가가 제 머리통을 통 하고 칠 때의 자극을 받은 양 아주 일상적인 문제를 수면 위로 떠올린 것이었다. 나는 아들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혼자서 밥을 먹으려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지 모른다고 하였다. 아들은 그런 제 엄마가 가여운지 친구들이나 가까이 사는 이모라도 불러서 같이 식사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

에세이 한 편 2024.04.21

등운곡(藤雲谷)/ 이명숙

등운곡藤雲谷 이명숙 이끼 묵묵한 부도탑 지나 대나무 숲을 헤치면 새벽종성 보라 빛 푸른 그늘 실개울 비스듬히 구름 위의 처마 끝 버들치 가볍게 받쳐 든 채 하루 종일 불어오는 풍경소리 너럭바위에서 오랫동안 잠이 들었다 간혹 계명암의 닭소리를 듣기도 했다 오월 눈부신 햇살은 눈물처럼 흘러 고여 골짜기 굽이 돌 때마다 발은 땅에 닿지 않고 늘 간당간당 절벽 끝에 서 있었다 달빛 그림자에 가슴 베이는 나날 주렁주렁 등꽃마다 불을 밝히고 초파일 밤을 지샐 때 홀로 듣는 바람의 살들 잊혀진 생각처럼 향수해香水海 어스름 닻을 내리면 삼배 마치고 일어서는 걸어다니는 절寺 한 채 수천 수만 삼매의 뿌리 더욱 질기다 -전문(p. 144-145) * 등운곡騰雲谷: 범어사 등나무 군락지, 국가 지정 문화재 ---------..

직박구리/ 박옥수

직박구리 박옥수 해저처럼 가라앉은 연말 하얀 눈발 내리던 그날 털실뭉치처럼 동그래한 배와 긴 꼬리를 가진 텃새가 갈고리 발로 베란다 난간을 휘감고 있다 무슨 연유로 내게 왔을까 시선은 늘 창가에 박혀있다 엄마의 혼령인 듯 잿빛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내 눈과 마주친다 경계를 넘어선 지도 오래인데 아직도 딸이 마음에 안 놓이는지 유리창너머로 내 맘을 꿰뚫으며 안부를 물어온다 엄마는 피난지에서 나를 낳고 삼일을 굶어 네게 빈 젖을 물렸다는 무수한 옛 이야기 달달한 걸 좋아했기에 찐 고구마를 잘라 창밖에 내어 놓는다 양식을 얻으려 새의 옷을 입고 우는 아우성인지 이제 마음이 놓여선지 식솔 하나를 달고 드나든다 새가 날아간 하얀 불곡산 너머로 내 눈길이 따라 간다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산봉우리마다 고봉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