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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2/ 박두진

바다 2 박두진 바다가 와락 달려든다. 내가 앉은 모래 위에······ 가슴으로, 벅찬 가슴으로 되어 달려오는, 푸른 바다! 바다는, 내게로 오는 바다는, 와락 와락 거센 숨결, 날 데릴러 어디서 오나! 귀가 열려, 머언 바다에서 오는 소리에 자꾸만, 내, 귀가 열려, 나는 일어선다. 일어서며, 푸른 물 위로 걸어가고 싶다. 쩔벙 쩔벙 머언 바다 위로 걸어가고 싶다. 햇볕 함빡 받고, 푸른 물 위를 밟으며 오는 당신의 바닷길······ 바닷길을 나도, 푸른 바다를 밟으며 나도, 먼, 당신이 오는 길로 걸어 가고 싶다. - 전문(p. 10-11) * 블로그 註/ 참고 문헌: 韓國現代文學大系 20 『朴 斗 鎭』 (1983, 지식산업사. 49-50쪽)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그리하여 서정은 이 시대의 우회로이다/ 박동억

박동억 평론집 『침묵과 쟁론』에서    * 말은 곧 인간의 법정이다. (p. 11)   * 휴머니즘의 회복을 주장하는 독일의 철학자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는 말한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지라도 "휴머니즘의 파괴는 결코 진보가 아니라는 것이다."1) 무엇보다 그는 인공지능 개발은 효율적인 경제 발전을 목적으로 한 기업들의 자본에 기대어 이루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인공지능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기대어 모든 것을 자본화하는 데 동원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 과정에서 야기될 것은 인간의 도구화다. 그렇다면 시를 쓰는 인공지능의 미래 또한 자명하다. 누구나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시 쓰는 '노동'을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시 쓰기는 인간 존재의 고차적인 능력을 증명하지 않게 될 것이고, 시..

한 줄 노트 2024.04.07

박동억 평론집 『침묵과 쟁론』/ 사람을 만나러 간다 : 김언

사람을 만나러 간다      김언    사람을 만나러 간다.  사람을 만나는 게 전혀 시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 후로도 나의 만남은 지속적이고 끈질기다.  나는 조바심이 많은 문학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러 간다.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가겠는가.  우리는 사적으로 충분히 지쳤다. 둘 사이에  어떤 시도 오고 가지 않지만 우리는 충분히  괴로워하고 힜다. 그 얼굴이 모여서  시를 얘기하고 충분히 억울해하고 짜증을 부리고  돌아왔다. 사람을 만나러 간다.  더 만날 것도 없는 사람이 더 만날 것도 없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 시를 얘기하려고  오늘은 내 주머니 사정을 들먹이고  내일은 내 자존심의 밑바닥을 꽝꽝 두드리고  망치나 해머 뭐 이런 것들로 내 ..

박동억 평론집 『침묵과 쟁론』/ 유리의 존재 : 김행숙

유리의 존재 김행숙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통과할 수 없는 것을 만지면서······ 비로소 나는 꿈을 깰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벽이란 유리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넘어지면 깨졌던 것이다. 그래서 너를 안으면 피가 났던 것이다. 유리창에서 손바닥을 떼면서······생각했다. 만질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검은 눈동자처럼 맑게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유리는 어떤 경우에도 표정을 짓지 않는다. 유리에 남은 손자국은 유리의 것이 아니다. 유리에 남은 흐릿한 입김은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제발 내게 돌을 던져줘. 안 그러면 내가 돌을 던지고 말 거야. 나는 곧, 곧,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야 말 것 같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죽음처..

늦은 눈 외 1편/ 이광소

늦은 눈 외 1편 다산초당에서 이광소 쫓긴 듯 내려온 곳 강진 도암 땅에 한 자字 두 자字 눈이 내리네 어제도 기다리고 오늘도 기다리는 마음 알았다는 듯 한 줄 두 줄 눈이 내리네 늦어서 급히 서둘렀다는 듯 지붕에도 나뭇가지에도 다섯 줄 여섯 줄 내리네 반가워서 뜰에 나가 손을 흔드니 그래, 알았다는 듯 한 페이지 두 페이지 내리네 기쁜 소식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새로운 소식 기다렸던 다산도 이렇게 들뜬 마음이었을까 살을 적시고 마음을 적시고 눈물이 앞을 가려 뒤뜰 연지못으로 돌아가 보니 밤새 몰래 내린 두꺼운 얼음책이 있네 녹지 않은 소식은 얼마나 달콤한지 비바림 속을 견뎌온 정든 나무들은 다산 유배되어 있을 때 경소리 들은 듯 야윈 가지 초당을 향해 굽어 있네 시린 겨울밤 내내 목민심서를 쓰던 ..

불타는 행성이 달려온다/ 이광소

불타는 행성이 달려온다 이광소 안과병원 수술실에서 레이저 불빛을 바라본다 불타는 행성이 달려온다 세 개의 행성이 덮쳐오고 있다 내 유년 시절의 회전목마를 불태우고 내 청년 시절 독서실을 불태우며 내 전 생애를 달리던 도로의 가로수들을 불태우는 동안 의사는 수정체를 빼고 인공수정체를 삽입한다 아, 사라진 내 눈의 고유성 만약에 관절마저 인공관절로 대체한다면 심장마저 인공심장으로 대체한다면 항문마저 인공항문으로 대체한다면 나는 안드로이드가 되는 것일까 아직도 보이는 세계에 대한 미련이 강해 백내장 수술실에 누워 있지만 언제쯤 눈을 감고서도 보이지 않은 세계를 볼 수 있을까 눈은 있지만 정신맹이 있듯이 보이는 세계에 집착하고 살아온 생애 보이지 않는 세계는 얼마나 광활한지 알 수 없지만 태양은 어둠 속으로 아..

이구한 _ 타자의 죽음에 대한 태도(발췌)/ 화장(火葬) : 이영주

화장火葬 이영주 여인이 강가에 앉아 탯줄을 태우고 있습니다 아이의 목을 휘감던 탯줄을 잘라내고 하얗게 질린 아이의 영혼을 먼 땅으로 보내기 위해 여인은 바구니를 띄웁니다 두 손을 모으고 폭염에 달아오른 별을 빨아들이다 툭툭, 붉은 물집이 터지는 여인의 뒷목 알 수 없는 주문이 물살에 떠밀리며 휘청거립니다 타오르던 연기가 올라가 박힌 뜨거운 별들 까맣게 물들어가는 하늘의 흉터들, 여인이 불러낸 주문은 흉터 속에 봉인된 채 함께 썩어갑니다 어디론가 떠밀려간 바구니의 목을 휘감고 두꺼운 꼬리를 탁탁 내리치는 거친 물살 온몸이 점점 녹아가는 여인은 불구덩이를 끊임없이 쑤셔댑니다 얼굴 없는 아이가 불길 속에서 웃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걸어온 지친 소가 강물에 머리를 담그로 자갈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열에 들뜬 콧김이..

점자블록/ 옥인정

中 점자블록 옥인정 길마다 아빠에게는 노란색 전용도로가 있다 톡톡, 톡톡 거기에서 아빠는 하얀 지팡이로 땅을 노크한다 톡톡, 톡톡 손가락보다 예민해지는 아빠 발바닥 톡톡, 톡톡 쭉 가라는 줄무늬블록 길가에 시설물이나 돌기둥이 툭 나와 있으면 멈추라는 동그랑무늬 블록 지팡이를 쭉 길게 빼서 책을 짚으며 간다 톡톡, 톡톡 노란색 전용도로 두 번씩 점자를 노크하는 하얀 지팡이 톡톡, 톡톡 -전문(p. 236-237) * 심사위원 : 김동수(시인_심사평) 이구한(문학평론가) 김영진(시인) -------------------- * 반년간 『미당문학』 2024-상반기(17)호 에서 * 옥인정/ 전남 무안 출생, 2021년 ⟪전북문단⟫ 95호 시 부문 & 2023년『미당문학』으로 동시 부문 당선

동시 2024.04.06

안녕은 무사입니까?/ 진혜진

안녕은 무사입니까? 진혜진 무협지 속 우리는 순간순간 죽지 못해 적이 됩니다 권법을 정독한 고수가 아니라서 말의 혈만 찌르는 자객들 서로에게 긍정만 겨누지 못합니다 태양 아래 우뚝 선 두 그림자 아래 당신의 긍정과 나의 긍정은 방향이 달라 말이 달리면 온통 찢어지는 세상 같아 우린 종로를 누비다 강호고등어구이집에서 간신히 두 젓가락을 든 무사가 됩니다 안녕의 맛이 이처럼 담백하니 무적의 고등어를 오늘의 진정한 고수로 인정합시다 말과 말을 거쳐 온 자객 하나, 자객 둘······ 안녕의 목이 계속 베입니다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어렵다는 말 앞에서 가장으로부터 멀어지는 당신 안녕엔 착한 그림자와 착한 바람과 착한 지상이 필요한데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을 고쳐 쓴 말들로 무성한 무림은 계속되어 우리의 안녕을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2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2 정숙자 바람이 조용하고 맑은 햇빛을 동그란 탁자 위에 놓고 갑니다. 저는 이 꽃다운 편지를 마저 읽지 못하고 당신께 갑니다. 당신의 초대에 늦을까 봐 서둘러 눈을 감고 지름길로 ᄀᆞᆸ니다. 당신은 사원이나 궁중에 아니 계시고 무한한 대기 중에, 공기 중에 계십니다. 당신께서 초대하신 장소는 언제나 제 마음속 가장 깊고 조용한 골ᄍᆞ기임을 외웠기 때문입니다. (1990. 9. 20.) 방금 samsung man이 다녀갔습니다. 냉장고 야채박스 밑에 자꾸만 얼음이 깔리기 때문이었어요. 거뜬히 A/S를 마친 뒤 그는 뭐 더 불편한 게 없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전기를 넣어도 움직이지 않는, 20년은 족히 넘었을 소형 분쇄기를 꺼냈습니다. 바쁠 텐데도 그는 분쇄기를 해체/조립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