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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가 기억하는 잠버릇 외 1편/ 김추인

세포가 기억하는 잠버릇 외 1편         homo           김추인    새도 외로울 땐  부리를 날갯죽지 속에 묻어 어미의 심장박동 같은 제 심장 소리에 잠이 든다지   내가 잠을 부를 땐   혼자의 잠, 제 오른 손을 베고 왼손을 둘러 목을 감싸 안아야만 잠이 살글살금 눈꺼풀로 내려온다는 것도  나만 아는 사실   내 잠을 부르는 백색소음, 철썩이는 파도소리도 어린 날바닷가의 잠을 기억하는 탓이지     -전문(p. 44)       ------------    인류세*        homo consumus    사람 여러분  인간의 힘은 모든 종種을 휘하에 두고 호령합니다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애  인간의 방식으로   한때, 야생의 날지도 못하는 새,  붉은 들닭이던 우리는  인류세..

자코메티의 긴 다리들에게/ 김추인

자코메티의 긴 다리들에게        Homo evolutis      김추인    자코메티의 남자, 오늘도 걷고 또 걷는다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보폭  무릎 끓을 수 없는 긴 다리,  허허 빈 천공을 뚫어낼 듯   육십 년을 내내 걷고 있다  숱한 문짝들을 지나  암흑물질과 광자들 지나 양자의 물결 속을 걸어가고 있다  소립자들의 문은 끊임없이 열리고 닫히고 아직 어느 누구도  들여다보지 못한  지평선 저 너머를  별들의 저 너머를 응시하며 걷고 걷는다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쉿! 비밀 하나, 남자의 닉네임은 '보이저'라고도 하는데)   새 천년의 무탄트, 암호를 풀다  기사 한 토막 없었지만  화성, 목성을 지나 토성을, 해왕성의 고리를 곁 보고 지나고 지나고 지나 태양계 바깥, 오르트 구..

문학의 빛이여! 자연의 등불이여!/ 신달자

문학의 빛이여! 자연의 등불이여!      신달자    하나의 손 위에  하나의 손이 겹친다  다시 하나의 손 위에  하나의 손이 와 하나가 된다  그 하나의 손을 따라  우루루 해가 따라 온다  달이 따라 온다 별이 따라 온다  따라와 새로운 우주 하나 우뚝 선다  그 우주 위로 천만 개의 눈을 뜨는  새벽 여명이 열리고  기우는 저녁노을이 천만 개의 산을 물들이고  꽃불로 활활 타오른다  오! 눈부신 응집력이여  산을 데리고 오고 바다를 데리고 오고  하늘을 땅을 나무를 꽃을  그리고 사람들의 세상을 가져오는 빛이여!  사람의 길을 열고 사람의 꿈을 향하여 달려가게 하는  그래서 드디어 의지의 탑 하나를 세우는 이여!  여기 소중한 일 하나 이 시..

권두언 2024.04.24

내 마음의 돌/ 김참

내 마음의 돌 김참 토요일 아침, 강변 돌밭에서 돌 하나 들고 보다가 내려놓는다. 다시 하나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강변엔 돌이 많다. 하얀 선 들어간 돌을 들었다가 내려놓고 구멍 숭숭 뚫린 돌도 들었다 내려놓는다. 흰 물새 한 마리 고요히 떠 있는 푸른 강과 돌 찾는 내가 돌아다니는 뜨거운 강변 돌밭. 서로 다른 세계 같다. 강변엔 돌이 많지만 내가 찾는 돌은 보이지 않는다. 9월의 태양은 여전히 뜨거워서 돌밭도 아직 뜨겁다. 삼을 한 바퀴 돌았는데 돌밭이 보이지 않는다. 섬을 빠져나오는데 절벽 아래 보이는 돌밭. 물놀이하는 아이들과 낚시꾼 두엇 보이지만 내려 가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잡목을 헤치며 비탈을 따라 조심조심 내려가니 마침내 나타나는 넓은 돌밭. 크고 작은 돌들을 살피며 천천히 걸어본다. 해..

격리의 격리/ 김정수

격리의 격리 김정수 통째 집이 이사할 것만 같은 오후입니다 반가움에 머물던 눈금이 급격히 당혹으로 기울자 저울을 벗어난 발은 캄캄해집니다 발이 하얀 모델은 앵글을 벗어나 영혼이 털리고요 어디에 초점을 맞추든 사물은 달라지지 않아요 느닷없는 사실만 울음 너머 쟁쟁합니다 전파를 회피해도 바람이 다 녹아내리는 듯합니다 무게중심을 잃어버린 방은 현관을 나서기도 전에 빠르게 변질되는 속성으로 쉽게 양비론에 빠집니다 동반 격리된 셔츠는 제대로 칩거에 들어갔고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후통을 앓고 있는 규격 상자에서 빠져나온 지 벌써 40년째입니다 행동을 잃어버린 통증은 밀폐된 관계에서 최선을 다해야 별들의 언저리에 가 닿습니다 세 번 격리되니까 이젠 익숙해졌어요 혼자가 아닌 둘 둘이 아닌 하나의 모면입니다 정적을 돌려..

인사드립니다/ 김후란

인사드립니다 김후란 2024년 평화의 서기 어린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2001년 10월 26일 개관한 '자연을 사랑하는 「문학의 집 · 서울」'은 소식지를 매달 한 호도 거르지 않고 발간해 왔으나, 지난해 9월호 제263호를 끝으로 일시 중단되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이었음을 양해하시기를 바라며, 올해부터는 사정이 허락되는 대로 속간을 하려 합니다. 따뜻한 격려의 성원을 바랍니다. ▩ (p. 2) 자연을 사랑하는 · 「문학의 집 · 서울」 이사장 김후란 ------------------------------------ * 『문학의 집 · 서울』 2024. 1월(264)호

권두언 2024.04.24

눈물/ 문화빈

눈물 문화빈 꼭 껴안아주세요 동요 가득한 입술에 일렁이던 파도 나는 당신을 일그러지게 한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거친 열망 달콤하고 모호했던 화학작용 시원한 눈매, 아름다운 턱 선이 밑면에 닿는다 맥주 거품처럼 무서운 속도로 허물어지는 당신, 보이지 않는 이마를 잡는다 하얀 거품이 내 몸속으로 침투된다 나는 모든 하루로부터 소외된다 -전문(p. 137)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문화빈/ 2020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파이(π) 3.141592...』

상흔(傷痕)/ 나채형

상흔傷痕 나채형 기생 논개제가 있던 음력 9월 9일 외삼촌댁 워리가 생을 마쳤다 그날 한 사춘기 소녀의 왼팔에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혔다 열다섯 어린 소녀는 마당에 걸린 불구덩 화덕 옆에 셋째 동생과 막내 동생이 쪼그려 앉아있는 헛것이 보여 조바심 들었다. 행주를 든 양손은 용광로를 들고 정지 문턱을 넘어서 바닥에 놓는 순간 얇은 먼지 합판에 걸려 넘어졌다. 앗! 뜨거워! 비명과 함께 지옥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걷어 올린 나일론 옷소매 시뻘건 기름덩이 살가죽은 훌러덩 벗겨지고 일그러졌다 찢어지는 절규의 비명에 뛰어나온 집주인아주머니 품에 털썩 안겨 시집 못 가면 어떡해요? 悲嘆의 눈물을 흘린 철부지 "괜찮아 시집 갈 수 있어 오늘 니가 쎠댔구만!"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하고 병원으로 데리고 가셨다. 장..

42.195/ 신선희

42.195 신선희 42.195㎞. 마라톤 풀코스 거리다. 일반사람이 뛸 수 있는 거리일까. 아니 정확히 내가 뛸 수 있는 거리일까가 궁금했다. 5년 전, 우연히 춘마를 알게 되었다. 춘마를 간다는 젊은 친구에게 춘마가 뭐냐하니 춘천마라톤의 줄임말이라 했다. 줄임말도 낯설지만 일반인이 마라톤을 뛴다는 사실이 더 생소했다. 놀란 나에게 그 친구는 곧 있을 동네 마라톤 하나를 툭 던졌다. 한 번 해보라며 심지어 잘할 것 같다며 부추기기까지 했다. 그 옛날 체력장 오래 달리기가 전부인 내가 이 나이에 굳이 뛸 거까지야··· 그러나 궁금했다. 그래서 5㎞만 뛰어보자며 나갔다. 죽는 줄 알았다. 숨이 턱턱 막히고 다리는 꼬이고 도대체 끝은 보이지 않고 겨우 죽기 직전 들어왔다. 나에게 마라톤은 이것으로 충분했고 ..

에세이 한 편 2024.04.22

김관식_영산강 명소의 시비(詩碑)에 대한 제언(발췌)/ 「동다송」中: 초의선사

「동다송東茶頌」 中 초의선사(1786-1866, 80세) 古來聖賢俱愛多(고래성현구애다) 예로부터 성현들은 차를 좋아했으니 茶如君子性無邪(다여군자성무사) 차는 성품이 군자와 같아 삿됨이 없기 때문이다 人間艸茶差嘗盡(인간초다차상진) 부처님이 세상의 풀잎차를 다 맛보고 나서 遠人雪嶺採露芽(원인설령채노아) 멀리 히말라야(=설령)에 들어가 이슬 맺힌 어린 찻잎을 따다가 法製從他受題品(법제종타수제품) 이를 법제하여 차를 만들어 玉壜盛裏十樣錦(옥담성리십양금) 온갖 비단으로 감싸서 옥항아리에 담았다 -「동다송」 부분- ▶영산강 시비詩碑에 대한 제언(발췌)_ 김관식/ 문학평론가 · 시인 초의선사(본명, 장의순)는 전남 무안 출신이며, 조선 후기의 승려로 한국의 다례를 소개할 때 손꼽히는 인물 중의 한 분으로 1828년 ..

고전시가 2024.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