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김광섭(1905-1977, 72세)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전문-
▶별에 이르는 길(발췌)_ 임승빈/ 시인
이 시는 1969년 11월에 발행된 시집 『성북동 비둘기』에 실려 있다. 당시에 나는 이 시집을 사고도, 이 시는 읽을 수가 없었다. 목차에 보면 이 시는 83쪽에 있어야 하는데, 내 시집은 77쪽부터 96쪽까지가 없었다. 파본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군 복무 중이던 1976년 초봄에 외출을 나갔다가 전주에 있는 <문성당서림>에서 1975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나온 김광섭 시선집 『겨울날』을 샀고, 거기에서 비로소 이 시를 읽을 수 있었다.
1980년 가수 유심초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려서 1970년 한국일보사가 주최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출품, 대상을 받기도 했다.
(···)
이렇게 어느 날 시인은 별과 하나가 된다. 별을 통해 하늘과 땅이, 이상과 현실이, 별의 신성神性과 시인의 속성俗姓까지도 모두 하나가 되었다. 별은 땅을 딛고 서서 시인의 심장으로 뛰고, 시인 또한 별빛으로 무한과 영겁을 유영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염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잠깐! 시인은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다시 만나랴'라고 하지 않았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고 말하고 있다.
어차피 만나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그러니까 이 싯구의 무게 중심은 '어디서'가 아니라, '무엇이 되어'에 있다. 먼 후일 다시 만날 때는 지금 이대로의 '나', 지금 이대로의 '별'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우리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것은 그냥 바라보는 것에 불과한 것일까. 별을 통해 우러르는 하늘이 신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신성공간이고, 완전하고 이상적인 세계일 뿐만 아니라,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도록 스스로를 경계하게 하는 것이라면, 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그냥 단순히 정다운 별과 내가 먼 후일에도 잊지 않고 다시 만나자는 것이 아니라, 별을 매개로한 묵상(theoria)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과는 좀 더 다른 그 무엇인가가 되어 더 큰 기쁨으로 만나자는 것은 아닐까. 그러기를 꿈꾸어야 한다는 것은 아닐까.
오늘도 어김없이 밤은 오고,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별은 빛날 것이다. 무슨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별빛을 쏘아댈 것이다. 그러다가 혹시 열려 있는 마음의 창을 발견이라도 하면, 아무도 몰래 그 꿈속을 흘러들 것이다. 어느새 많이 변해버린,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의 모습으로. (p. 시 267/ 론 268 (···) 272 (···) 273-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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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딩아돌하』 2024-봄(70)호 【<44+1>개 의자의 시 읽기·1】에서
* 임승빈/ 충북 보은 출생, 1983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아버지는 두릅나무 새순만 따고』『분리된 꿈』『속초행』『하늘뜨락』『흐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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