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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남자/ 한선자

두 번째 남자      한선자    한 남자가 카페로 들어선다  머리에는 제멋대로 자란 조팝꽃이 수북하다   함께 근무했던 동료다   바다 한가운데 떨어졌다고  갑자기 수영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천천히 지느러미를 키워 보고 있다고   드론을 수천 번 띄운다고  갑자기 하늘을 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천천히 날개를 달아 보기로 한다고   그러나, 삼십 몇 년 굳은 몸에 새싹이 돋는다는 것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뒤돌아보면, 굳은 몸에 새겨진 물결과 발자국들  어디 쉽게 버리겠는가   말쑥하게 차린 한 남자가 사무실 출구로 나가고  새로 태어난 두 번째 남자가 카페 입구로 들어선다     -전문(p. 59)   --------------------  * 『월간문학』 2024-2월(660)호 > ..

버들가지 외 1편/ 이병초

버들가지 외 1편      이병초    혼자일수록 술 담배 끊고  이마를 차게 하자고  지난겨울 구들장을 지었다  때론 일주일 넘게 누구와 말을 한 기억이 없어  말의 씨가 말랐는가 싶어  이불 뒤집어쓰고  따옥따옥 따오기를 부르다 보면,  올겨울도 별일 없냐고  옻닭 국물처럼 구수한 목소리들이  다가오곤 했다 그럴 때면  내가 고장 난 기억회로 같았다   두어 차례 송이눈을 받아먹으며  날은 속절없이 지나가고  2023년 1월 9일, 같은 학교에서  두 번씩이나 파면당한 동료들은 어찌 지낼까  학교 주소를 삐뚤빼뚤 적으며  무를 깎아 먹기도 하며  말의 씨가 말랐을까  잠을 청하는 게 두려웠을까  고장 난 기억회로를 못 벗고  춘분을 맞고 말았는데   복직 소식은 없어도  제비꽃은 보자고 시냇가에 나오..

버스/ 이병초

버스     이병초    본관동 앞 농성 천막 곁으로  마을 버스가 삼십 분 간격으로 들어왔다가  학생들을 태우고 떠났다  나는 엔진 소리만 듣고도 시간을 짐작한다는 듯  천막 기둥에 머리를 기대곤 했다  그러다 빵빵거리는 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뜨면   "동료들 해고시키겠다는 구조조정 안에  과반수 가까운 동료들이 찬성표를 던졌다  2017년 2월 13일이었다  문득 중국 단편영화 가 생각났다  내 숨소리를 똘똘 뭉쳐 검처럼  뽑고 깊었던 걸까  밤늦도록 베갯잇이 달빛에 빛났다"라고   2년 전 일기장에 써 놓은 글씨가 천막에 어른거렸다  동료라고 믿었던 그들의 시간은 알 수 없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천막의 안과 밖은 전혀 다른 시간대입니다. 이 시차時差는 너무나 커 보입니다. 학생..

전영관_아름다움 없이 아름다웠던 날들(발췌)/ 플라시보 당신 : 천서봉

플라시보 당신      천서봉    저녁이 어두워서 분홍과 연두를 착오하고  외롭다는 걸 괴롭다고 잘못 읽었습니다 그깟  시 몇 편 읽느라 약이 는다고 고백 뒤에도  여전히 알알의 고백이 남는다고 어두워서 당신은  수위치를 더듬듯 다시 아픈 위를 쓰다듬고,  당신을 가졌다고도 잃었다고도 말 못하겠는 건  지는 꽃들의 미필이라고 색색의 어지럼들이  저녁 속으로 문병 다녀갑니다 한발 다가서면  또 한발 도망간다던 당신 격정처럼 참 새카맣게  저녁은 어두워지고 뒤를 따라 어두워진 우리가  나와 당신을 조금씩 착오할 때 세상에는  바꾸고 싶지 않은 슬픔도 있다고 일기에 적었습니다    -전문,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2023. 문학동네)    ▶ 아름다움 없이 아름다웠던 날들(발췌)_전영관/ 시..

우리나라가 지정한 태풍 이름/ 이영식

우리나라가 지정한 태풍 이름      이영식/ 시인    태풍의 이름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는 동시에 여러 지역에서 발생하는 열대성 저기압들에 대한 예보 시 혼동을 막기 위한 것이다. 처음에는 미국 해공군 합동태풍경보센터(JTWC)에서 남녀 이름을 정해 사용했으며, 2000년부터는 태풍이 자주 출몰하는 아시아지역 14개국이 제출한 고유의 이름을 붙이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지정한 태풍 이름은 개미, 나리, 장미, 미리내, 노루, 제비, 너구리, 고니, 메기, 독수리 등이 있다. (p. 124-125)    -------------------------  * 이규자 시집 『낙타로 은유하는 밤』 해설 中 (2024, 상상인)   * 이영식/ 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꽃의 정치』『휴』 외

한 줄 노트 2024.04.27

전봇대에게 전해 듣는 말 외 1편/ 이규자

전봇대에게 전해 듣는 말 외 1편      이규자    수레바퀴처럼 늘어선 국화 다발 속  조문객이 꽃길을 내고 있다   태극기 휘장 고이 덮고  아버지는 96세 일기로 영면하셨다  장기 전투 승리로 이끈 역전의 장수將帥처럼  한 세기 전투 마치고   이제, 영영 돌아오지 못할 강 건너셨다   엄마는 혼잣말로  사람 팔자는 관뚜껑 열어봐야 알 수 있다 했다  이승에서 자식들과 마지막 인사 나누고  관 모서리 이해되는 어머니의 말   "칠 남매 자식 앞세우지 않고  배웅해 주는 아내도 있으니  젊은 날 목숨 바쳐 나라에 충성했고  자식들 모자람 없이 키웠으니  이만하면 됐소, 암 됐고말고"   젊은 날, 자랑 같아  전봇대에 대고 귀엣말로 속삭였다는 엄마  금실 좋았던 남편 별 탈 없는 자식 자랑 들으면 ..

낙타로 은유하는 밤/ 이규자

낙타로 은유하는 밤      이규자    하늘길  닿을 듯 말 듯   사막 건너온 늙은 낙타  모래 위에 무릎 꺾고 누워 있다  눈꺼풀조차 무거운 듯 실눈 겨우 뜨고  새끼 발소리에 귀 세우고 있다   낙타 등처럼 구부러진 엄마  참 먼 길 오셨다  잠깐 머무는 사람의 온기  너무 아쉽고 목말라   혹여 잠든 새 떠날까 봐  잠들지도 못한다   누워 있어도 힘이 센 엄마  딸자식 발목을 묶어 놓았는지  한 걸음도 뗄 수가 없다   오늘도  하늘에서 보낸 청첩 마다하고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낙타     -전문-    해설> 한 문장: "낙타의 등처럼 구부러진 엄마/ 참 먼 길 오셨다"는 고백이 눈물겹다. 엄마는 오늘 하룻밤 잠깐 머무는 자식의 온기가 "너무 아쉽고 목"마른 모양인데 혹시 "잠든 새"에 사..

해무/ 김제욱

해무     김제욱    그림자로 가득한 컴컴한 새벽.  서해대교에 들어서자, 죽은 자의 입김이 물씬 풍긴다.   가려진 창문 뒤 유리알처럼 서 있는 사람들.  흰 입술이 표지판을 스치고 지나간다.   지난밤 꿈까지 속도를 매달고 따라와  짙은 안갯속을 헤집는다.   가려진 중앙선을 바라보며  상행선과 하행선의 의미를 되묻는다.  생으로 나부끼며,  안개에 가려진 난간의 몰락을 가늠한다.   이곳의 전망이란  동굴 속에서 빛을 찾는  믿음과 용기.  시선으로 쌓은 다짐.   식어가는 가슴으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눈앞에 펼쳐진 아득한 동공  속도가 공포를 끈질기게 물고 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어둠이 펼친 입김의 흔적을 뒤쫓는다.   새벽빛이 내려오길 바라지만,  안개 낀 어둠은 여전히 ..

마지막 외 1편/ 이향아

마지막 외 1편     이향아    바람도 없는데 집안은 한기로 출렁거렸습니다. 막힌 줄도 몰랐던 파이프에서 새어 나온 절규, 죽음을 이기려는 마지막 숨소리, 다시는 당신의 더운 이마를 짚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어디가 제일 편찮으세요"   말로 통할 수 없는 고통이라니!  허망이란 최후에 남아 있는 침묵  당신이 벼르고 벼르다가 때를 골라서  광풍을 한바탕 휘몰고 가신 후에야  붉은 피를 닦아내며 깨우쳤습니다   뿌리째 뽑혀서 흔들리지 않을 때야, 당신이 뒤척이던 처절한 손짓이, 참으려고 악물었던 마디마디 숨소리가, 마지막을 알리는 웅변이었다는 것을    -전문(p. 87)      ------------------------------------------    바다가 보이는 풀밭교실    그해 여..

모감주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 이향아

모감주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      이향아    모감주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  날마다 양재천변 둑길을 걸었던 것은  모감주나무를 만나고 싶어서였네  비탈에서 가지 뻗어 금빛 꽃을 피워 올리는  자리를 탓하지 않는 연두색 주머니에  먹구슬 같은 염주알이 나날이 익어가면  내 가슴도 터질 듯이 차 올랐었네  "무슨 나무지요?"  걷다가 멈춰 나무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지나던 사람들이 내 곁에 모여들고  나는 기쁜 듯이 대답했어  "모감주나무예요"  내가 심어 기른 듯이 뽐내면서  내 나무라도 되는 듯이 자랑스럽게  그와 아주 친한 듯이 다가서면서   재작년 폭우로 무너진 둑은 검은 뻘밭이었어  관청에서 수해 보상금을 청구하라고 할 때  눈만 뜨면 이런저런 탓들만 칡넝쿨처럼 뒤엉키고  모감주나무는 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