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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영_ 영원이 된 시의 무늬(발췌)/ 빗살무늬 : 송재학

빗살무늬     송재학    어떤 무늬가 너의 몸에 기워진 건 알고 있니,  물고기 뼈처럼 생긴 무늬는 희고 촘촘하면서 지워지지 않을 게 분명해, 거치무늬, 격자무늬, 결뉴무늬, 궐수무늬, 귀면무늬, 기봉무늬, 길상무늬,  능삼무늬, 무늬의 이름을 말해보다가 마지막에 만난 빗살무늬, 무늬를 처음 그려본 사람은 어떤 슬픔에 누웠을까, 눈물이 흘러 앞섶을 적신다면 이런 무늬는 오래 기억할 수 있어, 그게 가엽지만 나쁘지만 않아. 주검을 포함해서 희로애락을 덮을 수 있는 호의는 지상에 가득 널렸어    -전문(p. 116)   ▶ 영원이 된 시의 무늬(발췌)_안지영/ 시인  「빗살무늬」에서 시적 주체는 우리 몸에 어떠한 무늬들이 기워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무늬가 너의 몸에 기워진 건 알고 있니 (···..

불멍 소회/ 손수진

불멍 소회      손수진    무심코 텔레비전을 켜는데 머리 하얀 망구望九가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살면서 숱하게 눈물 나는 일 많고, 기막힌 일 한두 번이었겠는가 그때마다 아궁이에 불을 지폈네.  활활 타는 불꽃을 보면서 그 세월을 다 견디고 살았네.  이상하게도 불꽃을 보고 있으면 팥죽 솥같이 폭폭 끓던 가슴도 가라앉데야.   이른 봄에는 왜 이리 비 오는 날이 많을까요.  이른 봄에는 왜 이리 바람 부는 날이 많을까요.   어머니는 집안의 눅눅한 공기가 번지면 아궁이 앞에 앉아 말없이 물을 끓였습니다.  젖은 솔가지를 아궁이에 몰아 넣고 후후 바람을 불어 불꽃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어머니의 입김은 젖은 솔가지에 불을 붙이기엔 역부족이었는지 안개 같은 연기만 뭉게뭉게 피어올라 ..

산상꽃밭 천상별밭▼/ 김영산

산상꽃밭 천상별밭▼         망우리 공동묘지      김영산    사는데 이유가 없지만  죽는데 이유가 많다   나는 죽어서 묻혔노라,  살아 있는데 죽음보다 큰 고통이 온다면  이미 죽어서 무덤에 묻힌 것이다   소나무 가지마다 올가미가 보이고  "시마왕이 아니라면 나를 무덤에 데리고 올 수 없어!"  그도 아니라면, 나쁜 시가 벌이는 놀이인지 몰라? 나쁜 시는 있느냐   모두 꿈이길 바라지만  누군가 내 시를 무덤에 가두고  봉합하여   봉분을 만들어 꽃밭을 가꾼다,  일찍이 나도 죽은 그녀를 위해  산상꽃밭 천상별밭의 시를 써서   애인의 묘비에 깨알 글씨로 쓴 적이 있다,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돌이켜보니  『하얀 별』이란 시집이 파비가 되기 전에 시가 이랬다   내 시는 장시가 아니라 ..

추모-시) 동경/ 노혜봉

추모>     동경     노혜봉(1941-2024, 83세)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金子의 슬픔을 알아주네  金子 홀로  모든 기쁨에서 동떨어져  푸른 하늘 저 편을 바라보네  아! 나를 사랑하고 나를 아는 이  저 멀리 있는데  눈은 어지럽고 내 마음 불타네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金子의 괴로움을 알아주네*   金子는수선화다노란색만좋아한다金子는 호로비츠가연주하는슈만의꿈쌍쌍의호수를건너는백조다金子는피아노의시인쇼팽드볼작브람스브루흐의협주곡2악장이다金子는소펜하우어가가장아끼는제자다金子는젊은베르테르의슬픔의주인공그러나권총자살을미루어버린용감한처녀金子는젊은이의양지를찾아나선단두대의몬티金子의자존심은겨울바닷가에파묻힌열아홉개의소라껍데기金子는쟝모레아스나는흐느낌과눈물에젖은사랑을생각한다노란싸인지에적힌세종문화회관뒷골목판잣집서..

박은정_가시가 박힌 채로 걸어 다니는 춤(발췌)/ 악력 : 박은정

악력     박은정    꽃병의 물이 썩어간다 나는 누웠다 창밖에선 날카로운 감탄사들이 들려온다 오토바이 시동 소리가 퍼지고 개들은 더위 속에서 조금씩 미쳐간다 눈을 감고 생각한다 이 폭염 아래서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무엇일까 노래는 한 곡 반복된다 주먹을 쥐면 모든 것들이 빠져나간다, 유년의 침울한 내가 옆에 눕는다 넌 변한 게 없구나 내 오른뺨을 찰싹 때리는 소리, 나의 슬픔은 맞아도 싸다 눈물이 귓속으로 떨어지는 동안 이 방은 안전한 어둠이다 인중에 땀이 맺힌다 눈물이 땀과 뒤섞인다 이 물질은 이제 무엇으로 연동되나 나는 걷고 있었다 부유하고 있었다 어떤 습관과 함께 나는 나로 인정받고 있었다 희미하게 방 안을 맴도는 기억들이 있다 나는 새장에 갇힌 새를 보며 세계의 종말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등..

돌이 천둥이다/ 이재훈

돌이 천둥이다     이재훈    아득히 높은 곳에서 넘친다  우리들의 간원으로 쏟아지는 소리.  사람을 뒤덮고  소원을 뒤덮고  울분을 뒤덮고  단단한 죄악을 뒤덮는다.  작은 돌이 굴러가는 소리.  머릿속이 눈물로 가득하다.  새벽마다 삼각산 나무 밑에서  방언을 부르짖는 사람들.  맨살을 철썩철썩 때리며  병을 고치는 사람들.  소리는 시간을 앞질러 간다.  엄마, 하고 부르면  한없이 슬픈 짐승이 된다.  아주 오래전  돌로 하늘을 내리치면  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렸다.  천상의 소리가 대답했다.  울 곳이 없어  돌 속으로 들어왔다.  온몸이 징징 울리는 날들이다.   -전문, (시집『돌이 천둥이다』, 2023, 아시아)    * 中/ (p. 273-274)    -  좌담: 서윤후 · 이지아..

홍성희_소란騷亂(발췌)/ 눈송이는 많은 복도를 가졌다▼ : 이설빈

눈송이는 많은 복도를 가졌다▼     이설빈    창문에 눈송이가 붙어 있다  입을 벌리고  아무도 없는  복도를 들여다보고 있다   내 눈도 눈송이를 들여다본다  두 눈에서 맥박이 뛰고  번갈아 발소리가 녹아든다   내 눈은 나보다 오래 깨어  복도를 서성인다   눈송이는 많은 복도를 가졌다   *   밤새 얼굴을 감싼 손에  햇빛보다 부드럽고 환한  진흙이 묻어나온다 진실을 털어놓을 때마다  복도의 문이 열린다 지나쳐온 의문과 지나치게 가까운 질문이  한몸으로 나를 호흡한다   녹아내릴 것 같아  그렇다고 창문을 열면  눈이 달라붙겠지 온몸에 발소리가 번지겠지  복도는 많은 문을 가졌다 그보다 더 많은 창문을   계속 닫고 있을래?   복도에 불이 들어온다  언제까지 눈을 뭉칠래?   *   불이 나..

순간/ 이태관

순간     이태관    그대가 내게 한아름의  사랑이란 이름에 꽃을 던져 주었을 때  난 들길을 걷고 있었네   그래, 짧지 않은 삶에  간장 고추장 이런 된장까지 다 버무려  한 끼의 식사  한 잔의 커피   하룻밤은 언제나 누추한  순간이란 걸 알고 있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만남은 허점투성이의 약속일뿐인데   꽃이 터져 오르는 순간   난 그대에게  눈길만 주었을 뿐이네   바람은 불어가더군  꽃은 지더군   지는 꽃들이 거름 된다는 걸  훗날, 알게 되었네    -전문(p. 212-213)  ---------------------------  * 『현대시』 2024-2월(410)호 中  * 이태관/ 1990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 1994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저리도 붉..

안지영_ 희미하고 불완전한(발췌)/ 아무도 없는 우리 : 서윤후

아무도 없는 우리         겨울 밀회     서윤후    수감자들에게 처음 눈싸움을 허락한 것은 이례적인 폭설이 지나고 이틀 뒤였다 눈 치우는 사역을 이토록 다정한 방식으로 알려줄 수 있을까?   눈사람들은 모두 눈 코 입 하나 없이 표정도 없이 앞뒤 분간도 없이 기분이나 마음도 없이 산발적으로 태어났다   베개는 차가운 것이 좋다고 한다 깊은 잠에 발이 빠져본 사람만이 헤맬 수 있는 꿈의 풍경은 창백했다 풍경을 기워 꿰매는 저 발자국을 따라가볼 거라고    멈추게 하려는 마음에 사로잡혀 영원히 움직이게 된 모빌도 있다   이번 겨울잠엔 선회병에 걸린 양들이 반시계 방향으로 돌고 있다 죽은 양을 둘러싸고 수호하듯 경건히 규칙적인 애도를 미쳐버렸다고 생각한 적 있었지만   맴돌았던 걸음만이 도착할 수..

카테고리 없음 2024.07.31

김언_아무도 떠나지 않았으나 모두가···(발췌)/ 못이 자라는 숲 : 신동옥

못이 자라는 숲     신동옥    낫과 부삽을 들고  정원에서 시를 썼지 백일홍과 덩굴장미가 뒤엉키고  라일락 향을 품은 사과가 쏟아졌다  웃자란 꽃 덤불에 누웠지만 향기에는 라임이 없어서  벌 나비는 깜빡이는 커서를 선회하고  구겨버린 종이 같은 하늘이 손끝에 휘감겨 왔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방울 속으로 난 푸른 길을 따라  떠나는 사람을 쫓아서 길을 나섰다   그다음 거리의 시를 썼어 애초에  다듬어 놓은 정원이 오래갈 거라 믿지는 않았다  비가 그친 틈에 화분을 파헤쳐 보면  망가진 장난감과 깨진 술병투성이였다  비를 피할 곳을 찾아 헤매다  눈을 뜨면 어김없이 꿈속이었다  거리의 끝에는 광장이 펼쳐졌고 거기서는  저마다 자기 플롯을 이끌고 온 사람들  자기만의 방식으로 우리의 시라고 불러온 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