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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기다리는 집▼/ 김명리

죽음을 기다리는 집▼      김명리    우산을 받아도 온몸이 젖는 세찬 빗줄기를 뚫고 파슈파티나트 사원에 도착했다   강둑 따라 늘어선 화장터에는 죽은 몸을 씻기고 꽃으로 장식하는 장례의식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강한 빗줄기들은 때로는 밧줄처럼 삼세三世의 인연을 동여매고 때로는 유리대공처럼 깨어져 허공에 흩어지기도 한다   목숨이 경각에 달했지만 아직은 살아 있는 자들이 속속 도착하는 집, 화장터 입구에는 죽음을 기다리는 집이 있다   숨을 거두기 무섭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그 육신을 태워야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믿음이 그 집을 세웠으리라   잠시 빗줄기의 눈금이 촘촘해졌던가 생과 멸이 화염에 휩싸이고 빗줄기마다 화엄세상이 진동한다   바그마티 강물 위 꽃잎처럼 떠 있는 몇 마리 소들은 인..

김경인_시인하다(발췌)/ 서정 : 김경인

서정      김경인    바닷마을에 갔었네  사랑하려고   겨울 한껏 낮아진   겸손한 지붕들을 돌아 나오다   보았네   멀리서  푸른 하늘 아래  순한 슬픔처럼 나부끼는  희디흰 빨래들을   나는 천천히 다가갔지  수백 오징어들이 줄줄이 꿰어  하얗게 말라가고 있었네   오장육부가 능숙하게 도려내진 채  전시되는 투명한 내부   저 멀리 아름답고  가까이서 보면  참혹뿐인    -전문-   ♣ 시인하다(발췌)_김경인/ 시인  요즘의 내게 시는 이런 것이다. "저 멀리 아름답고 가까이서 보면 참혹뿐"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비극이 우세한 세계에서, "도려내진 채 전시되는 투명한 내부"를 옮기는 일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죽은 듯이 침묵하다가, 문득 바라보고 증언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나는 시를..

정미주_한숨이 바람이 되는 당신의 천국(발췌)/ 스무고개 : 신동옥

스무고개      신동옥    모두 떠나는 집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집  집이 없어서 헤매는 게 아니라 헤매다 보니  집 같은 건 안중에도 없어진 집   당신이 대문에 가위표를 그리자  마법처럼 지워진 집 이 빠진 우체통에  주인 없는 편지가 쌓이고 문짝이 뒤틀리고  유리에 금이 가고   보풀 날리는 낮은 처마를 돌아간  당신은 돌아오지 않고 여기서 살기 지겨웠나  여기서 죽기 두려웠나 모두 모두  묻어두고 떠나는 집   덩굴장미 남천 줄기를 흔드는 눈보라에  도깨비들 춤추는 집 무말랭이 콩자반 거름에  짠 내 나는 구름이 뭉개고 앉은   마당 구석 웃자란 사과나무   홀로 언젠가 제 둥치에 잠들었을  당신을 기억하는 듯 버려진  화단을 점령한 꽃들은 밤에도  달빛을 끌어모으는데   나무에 등을 대고 ..

황유지_파롤의 빈손이 떨려올 때(발췌)/ 들쥐와 낙엽 : 김건영

들쥐와 낙엽      김건영    신자유주의의 모기가 방안을 떠돌고 있다 겨울에도 모기가 있다 자유란 얼마나 가려운 것인지 집이 부풀고 있다 굴러다니는 것들이 바깥에 있다 밟으면 부서지거나 터지는 것들 안에서 바깥으로, 다시 바깥으로부터 안으로의 검열이 있다 어린아이가 길에서 은행잎을 줍는 것을 보았다 아이 엄마는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문을 여닫는 사이 길에서 은행잎을 줍는 것을 보았다 아이 엄마는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문을 여닫는 사이 들이지 않은 것들이 들어온다 저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가 검역 속에서 막아야 하는 것들 속에서 내가, 내가 자주 집으로 돌아온다 쌀에도 벌레가 있다 이 집은 안전하니 한 마리쯤 더 키웠으면 좋겠군 그 은행잎들은 어디로 들어가게 되었을까 모든 집..

세상 가장 작은 뼈에게▼/ 정끝별

세상 가장 작은 뼈에게▼        정끝별    귓속 고막에서 달팽이관 사이  귓속뼈를 이루는 망치뼈, 모루뼈, 등자뼈라는 가장 작고 가벼운 뼈들이 가장 나중까지 듣는다기에  들을 때 속귀의 귓속뼈들이 움직인다기에   임종을 선고한 의사가 나가자  아직 따뜻한 엄마 겨드랑이에 손을 묻고  엄마 귀에 대고 말했다   엄마의 가장 작은 뼈들을 내 작은 목소리로 어루만지며   엄마,   엄마가 돌아간 시간을 잘 기억할게  엄마도 잘 기억해서 그 시간에 꼭 찾아와야 해      -전문(p. 80)    ※ 제목 끝에 [▼] 표시가 된 작품은 시인들이 직접 뽑은 1~2년 내의 근작대표시입니다. 이 작품은 현대시 작품상 후보작으로 검토됩니다.    ---------------------------  * 『현대시』..

추모-시) 퀸/ 이초우

추모>     퀸     이초우(1947-2023, 76세)    아버지는 어머니처럼 언제나 어린 나를 손잡고, 난 아빠와 결혼할래, 내 고갱이 속에  아버지가 자꾸만 자라나는 여왕의 자리에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었어요.   내 머리카락은 광명단처럼 붉었고, 우아한 인형의 옷 같은 내 원피스, 격조 높은 붉은색 유화를   그렸지요 여왕이 돼 가던 나의 아버지, 전교 수석이란 날 유령처럼 희롱한 그 아이들, 함께했던 나의 하느님은 몸시 바쁘셨나 봐요.    내가 세상의 디자인을 구상할 때였어요. 어쩐지 난 두 개의 손만으론 내가 여왕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나는 시시각각 우아! 하고 절규하곤 했지요. 그날 밤 나는 푸른 두 손바닥 위에 부처의 얼굴을 디자인해 넣었어요. 오! 나의 또 다른 손들.  ..

입동/ 박성우

입동     박성우    상강에 날아왔던 물오리들이 물결을 당겨 펴며 물그물을 쳤다   텃밭에서 몸집을 키우던 배추 두 포기가 뿌랭이만 남기고 갔다   포플러 가지 끝에 올라 흔들흔들 울던 까치가 겅중겅중 뛰었다   고춧대 뽑아낸 자리로 들어가 기지개를 켜는 겨울초가 푸르렀다   무시래기 삶는다던 팽나무집 할머니가 마당가 화덕에 불을 넣고   물오리같이, 배추 뿌랭이같이, 까치 꽁지깃같이, 겨울초같이 서 있었다     -전문(p. 23)   ------------------------  * 『현대시』 2023-12월(408)호 에서  * 박성우/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환절기/ 이심훈

환절기      이심훈    스쳐 지나는 바람의 표정도 수시로 변해  흘러가고 나면 되짚어 올 수 없는 감정   한 번 건너면 오지 못하는 환절기   강변 마른 갈대숲 살얼음으로 엉킨  옷자락 붙잡아 주기를 바라는 꽃샘 길   쇠기러기들 일순 날아올라 먼 길 떠난다.    평생 걸리고도 남을 가짓수를 품은 감기  견디는 것 외 치료법이 없는 불치의 감성   막힌 인후가 풀리고 기침이 터져야 봄이다.   지난 계절 서운했던 일들일랑 거둬들이고  혹여 서운하게 했던 일들이나 헤아려 보며   마음 비운 그 언저리에 가랑잎 모여든다.   겨우내 언 삭신 풀려 흐르는 여울목 버들개지  풍향계 방향 바뀌는 쪽으로 귀 기울이는 곡선   미련 없이 돌아서 갈 줄 알아야 철새다.   -전문, 시집 『뿌리의 행방』에서, ..

오대혁_구술의 시를 통한 죽음의 관조(발췌)/ 나무 : 박찬호

나무     박찬호    물어본다고 아는 것도 아니었고  안다고 크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는데  괜스레 한마디 물어본다  마지막 가을볕은 따가웠고  제법 바람이 차가운 오후에도  당신의 손은 따뜻했다  힐끗 보면 소나무 같고  자세히 보면 잣나무 같은  저 나무에 대해  저 나무의 떨어진 열매에 대해  물으면서도  대답하면서도  우리 서로는 답을 알고 있지만  단답형의 답이 두려워  다시 물음으로 대답했다  뭐지?  글쎄?  마음속 가문비나무는  그렇게 익명의 나무로  그 가을을 지나고 있었다      -전문-    ▶ 구술의 시를 통한 죽음의 관조(발췌)_ 오대혁/ 시인 · 문화비평  가문비나무는 소나무나 잣나무와 비슷하여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사전의 표현으로는 더더욱 구분하기 쉽지 않다. 어원을..

군산시인포럼 제4집 『바다의 메일』/ 책머리에 : 윤명규

전문      우리기 바다를 꿈꾸는 것은      윤명규/ 시인    유월이다   모내기 끝난 논에는 벼포기에 힘줄이 서고  뿌리에 발톱이 여물어 가고 있다  차창을 열고 들어오는 그들의 관절 쑥쑥  뽑아 올리는 소리가 기세등등 거칠 것 없다  벌판은 끝내 바다로 달려가고 있다  우리 또한 머나먼 바다로 달려가고 있다  그곳은 생명의 발원지요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무한한 에너지가 거기 있고 우리 꿈 또한 거기에 있다  우리가 바다를 꿈꾸는 것은 원초적  생명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인체의 70% 이상이 물이라고 한다면  물은 우리의 심장이요 근육이요 뼈인 것,  나아가 뇌인 것이다  우리의 사유는 곧잘 바다(물)에서 일어나고 詩 또한 바다에서 태어난다  바다가 깊듯 우리 생명의 비밀 또한 깊다  ..

권두언 2024.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