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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밤바다/ 신은숙

강릉 밤바다 신은숙 울까 말까 할 때는 우는 게 낫다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는 게 낫다 바람이 등을 떠미는 밤 동쪽으로 흘러와 해변의 그네에 앉으면 살아있음은 흔들리는 것이라는 걸 부서져 포말로 흩어질지라도 길게 누운 해안선 빛이 있는 곳으로 파도가 온다 칠흑 바다를 달리는 캉캉 주름들 말할까 말까 할 때는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낫다 어둠을 삼킬수록 환한 침묵의 달 파도 손잡고 해변을 걸으면 그림자 하나 묵묵히 따라오는데 마침내 달도 보이지 않고 화엄경 같은 밤바다만 출렁거린다 -전문(p. 119-120) -------------- * 여여시 3집 『꽃이라는 이름을 벗고』에서/ 2023. 11. 11. 펴냄 * 신은숙/ 1970년 강원 양양 출생, 2013년 ⟪세계일보⟫ 시 부문 등단, 시집『모란이 가..

노랑매미 꽃여자 외 산문 1편/ 박미산

노랑매미 꽃여자 외 산문 1편 무명의 시인에게 박미산 봄여름가을겨울이 한 호흡인 듯 시간 여행 중이던 그녀 만행을 삼 년씩 여덟 번 하고도 양손에 쥔 건 꼬깃꼬깃한 문장 몇 줄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 흔한 날갯짓 한 번도 하지 못한, 견고한 자세를 유지하고 그늘 읽기에 빠져버린 여인, 눈부 신 사월의 햇살에 산그늘을 놓친다 햇빛에 사냥당한 노란 몸 푸른 잎에서 붉은 피가 흐른다 삼일계곡에 흐르는 여인이 빗장뼈가 하얗게 드러난다, 꽃 이 진다 꽃 진 자리에 수지침을 꽂으며 팔순 노모의 안부보다 형이 상학을 돌보는 여자 어머니의 뿌리를 산그늘에 끌어 놓고 언제 배반할 줄 모르 는 시 몇 편을 몸속에 넣는다 화악산이 크게 한숨을 쉰다 잠들었던 구름이 비를 부른다 음지에서 펄럭이던 낡은 글발이 쏟아진다 -전문(p..

플라스틱에게/ 김추인

플라스틱에게 homo oilicus 김추인 진실로 그대의 잘못은 아닌데 우리, 죽음의 경계에 다가서고 있네 죽음이란 블랙홀로 달리고있네 손발 맞지 않은 세기의 정책이 무기력한 지성이 결단이 우리네 흐릿한 의식이 나의 삭고 낡은 나이가 어둠의 문 앞에 서 있네 가볍고 예쁜 질기고 값싼 그대가 우리 행성을 알록달록 덮어가네 플라스틱, 그대의 본명은 '아세틸렌' 나 쓰는 가방도 가전류도 옷가지도 다 석유, 석탄의 연금술이라고 그러니까 탄소가 행성의 대기를 무겁게 끌고 가겠는데 여린 목숨들 사라지고 있겠는데 마약 같은 그대를 끊자하고 집안의 플라스틱이란 플라스틱은 다 내다 버렸는데 사흘 안 가 집안 곳곳 다시 들어앉는 그대여 나 그대를 끊어내지 못하네 차차 방도가 나올 거야 잠시만 더 사랑하자 우리는 계속 미루..

우주적 경계/ 김지헌

우주적 경계 김지헌 마켓에서 화초 몇 점 데리고 왔다 화초들을 정리 중이라는 나보다 몇 살 아래로 보이는 여자 말기 암이라고 했다 사랑만 쏟아 줄 것처럼 감언이설로 마당을 채워간다 저 고운 얼굴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휙휙 건너뛰는 시간을 이만하면 잘 쓰는 거라고 쏟아지는 햇빛을 마지막인 양 아껴 쓰는 거라고 그녀는 그랬을 것이다 내 앞에 도착했던 수많은 오늘을 무심코 흘려보낸 시간을 넘어지고 피 흘리며 달려 왔다고 할 수 있을까 쓸쓸히 늙어가는 것과 조금 일찍 가는 것의 간격은 잊혀지는 속도 만큼일까 누군가에겐 마지막 순간이 나에겐 시작이 되기도 하는, 제라늄과 다육이들 새집에 적응하느라 구름처럼 잎을 피워내고 있다 주인이 바뀌어도 꽃들은 맹렬하게 제 삶을 끌고 갔다 -전문(p. 78-79) -------..

나무/ 김유자

나무 김유자 내가 들어가기에는 나무가 작았다 내가 작아서 나무가 들어오다 부러졌다 나란히 서있으면 안 되는 거야? 누가 먼저 그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란히 서로의 옆에 서도 나란해지지 않았다 흔들리거나 벗어나거나 둘 다 휘청거리거나 휘청거리는 날을 우리는 좋아한 것 같다 내 생각뿐일 수 있다 나에게서 잎이 자라고 지고 꽃 피고 열매 맺는 한 해가 있기도 없기도 했다 나무는 웃다가도 멈춰 울고는 했다 햇빛은 마른 강줄기로 남아있고 밤은 조금씩 자신을 떼어서 물관에 숨겨두곤 했다 우리가 정말 서로에게 들어가길 원했는지 알 수 없다 서로를 오래 바라보던 날들이 있었다 -전문(p. 61-62) -------------- * 여여시 3집 『꽃이라는 이름을 벗고』에서/ 2023. 11. 11. 펴냄 * 김유..

파란 대문집 외 산문 1편/ 김금용

파란 대문집 외 산문 1편 김금용 서쪽이 빨갛게 익은 노을을 불러내도 동쪽의 푸른 아침이 날 깨워줘서 파란 대문집 여학생으로 불러주는 걸 좋아했다 벽에 너울거리는 그림자까지 담뱃불 안에 끌어 모아 내게 따뜻한 빛을 건네주던 아버지 닮은 담배 피우는 남자를 사랑했다 동향집은 춥고 그림자가 길었지만 노을을 쫓는 어둠이 저녁연기에 그슬리면 강 너머로 길 떠난 동생이 눈에 밟혀 서쪽 창엔 커튼을 늘어뜨리고 겨울을 나는 콩새에 귀를 기울였다 단풍나무 그림자가 붉어지면 씨앗을 따먹으러 일곱 살 동생처럼 파란 대문 담장을 뛰어오르는 콩새 쓸데없이 길어지는 우울증을 벗어나려고 콩새처럼 동에서 서쪽으로 다시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날개를 폈다 동향집은 빛이 짧아서 꽃 피우기가 힘들지만 동쪽은 푸른 빛이 많다고 믿어서 노을..

초대 외 1편/ 진서윤

초대 외 1편 진서윤 벚나무 아래 나무 벤치 햇살 장판 깔렸습니다 손을 대보면 미열의 이마를 짚었던 손바닥입니다 세상의 벤치들은 모두 초대장 같습니다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빈 들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연두색 칠이 벗겨진 결마다 꽃무늬가 촘촘 박힙니다 불면 날아가는 봄날일까요 아니면 털갈이 중인 순한 짐승일까요 다시 계절이 바뀌었는데 가난한 가지에서 새처럼 날아든 나뭇잎만 들뜨고 있습니다 누군가 앉았다 갈 듯하여 막 시작된 봄날의 자리 작은 돌멩이 같은 비밀 하나 눌러놓습니다 -전문(p. 88-89) ------------------------------ 생이 아름답다는 말 갈증 같기도 하고 성취 같기도 한 필연의 날들을 보냈습니다 추억으로 봉합된 몇 개의 기억에서 서로 어깨를 다독이기도 했습니다 어깻죽..

제법무아(諸法無我)/ 진서윤

제법무아諸法無我 진서윤 그림자는 빛과 함께 태어났다가 어둠에 멸합니다 남은 잔을 비우고 일어서야 해요 이마에 땀이 난다는 건 어쨌든 아직 통증이 남아 있다는 것, 각자 숙제가 있으니까 그렇게 살라고 혼미한 음성을 보냅니다 참 독특한데 흩어지는 소리, 호명은 난청을 부르지요 아웃사이드의 이점은 그의, 그들의 눈 밖에 있어도 잃을 게 없다는 것 다만 추측이 가라앉고, 좀 덜 가렵기를 바라요 그럼에도 암담하다고 말하는 건 농담인 것 같아요 싫은 게 아니라 그들은 듣는 이들만큼 신중하진 않아요 이별에 암순응이 필요할까요? 그냥 흘려보내는 감정에 실린 편도체를 자극하는 거겠지요 9시 30분 이제 당신이 떠날 시간이네요 내가 떠나든가, 별 사이가 아니란 게 별스럽게 자유를 주는 밤이네요 여기까지가 인연입니다 -전문..

[가상 인터뷰]_ 시의 순교자, 박제천 시인/ 이혜선

시의 순교자, 박제천 시인 이혜선/ 시인 이혜선_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승에서 모습을 못 뵌 지 몇 달이 되었네요. 그래도 시인에게 죽음은 없고 그의 시를 통해 늘 부활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곳에서도 시와 함께 잘 놀고 계시지요? 박제천_ 그럼! 나는 거기서나 여기서나 어디서나 시가 있는 한 시와 함께 노느라고 바쁘고 행복하다네. 더구나 이곳에선 내가 좋아하는 장자도 노자도 한비자도, 를 그린 추사 노옹도 모두 만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새는 줄도 모른다네. 이혜선_ '가시덤불에 산삼 나듯이 새로 돋아니는 우리 문학 아카데미여'라고 축원해주신 미당 스승님도 만나고 붕새를 타고 장자도 만나셨지요? 남명南冥을 다녀오면서 매미와 비둘기의 놀림도 받았겠군요. 하긴 선생님은 이곳에서도 가면놀이 무지개놀이로..

대담 2024.01.20

차성환_유령의 시간, 청시(淸詩)의 시간(발췌)/ 한 점 하늘 : 이은수

한 점 하늘 이은수 점을 찍기 시작합니다 고달픈 그 시간 속으로 발을 내디뎠습니다 드러난 모래알의 굴곡과 감춰진 영역이 끝없이 펼쳐진 사막 선인장의 몸처럼 물은 안에서 길어 올려야 강이 뜨고 별이 뜹니다 정지된 점은 선으로 움직여 둥글게 큰 곡선을 만들어 나가고 그 틈 사이로 生이 지나갑니다 많은 생각을 떼어놓고 우주와 교신을 시도합니다 서로를 비추며 끊임없이 흘러가는 나선 세계에 붓을 들었다 내려놓는 일 운석의 부스러기가 빛으로 떨어지고 빛이 때론 남빛으로 칭얼거리고 실오라기 같은 숨과 숨 사이는 하얀빛으로 파닥거립니다 내 안에 들어온 청시淸詩는 딱딱한지 말랑한지 애매한 눈물 같기도, 한숨 같기도 합니다 단, 한 점이 물같이 번져 부끄러운 진실에 풀어놓았습니다 -전문- ▶ 유령의 시간, 청시淸詩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