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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라는 이름을 벗고/ 이경

꽃이라는 이름을 벗고 이경 오랜 침묵을 깨고 나리꽃 피었다 꽃이라는 이름을 벗고 이름의 바깥에 적나라하다 공들여 꽃대를 밀어 올리고 잎으로 꽃봉오리를 받들면서 천천히 꽃 머리를 수그리면서 사라질 것이 분명한 색을 활짝 열어젖히면서 꽃은 많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한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다만 타오르는 중이다 차가운 불 손가락으로 말이 닿을 수 없는 곳을 가리키는 중이다 나리꽃! 부르기 전에 이미 대답하는 너 벙어리처럼 따라 웃는다 세상에는 한마디도 너에게 맞는 말이 없어 벗은 꽃에게 옷 입힐 수 없다 -전문(p. 15-16) -------------- * 여여시 3집 『꽃이라는 이름을 벗고』에서/ 2023. 11. 11. 펴냄 * 이경/ 경남 산청 출생, 1993년『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푸..

못/ 김광선

못 김광선 언제부턴가 구두를 신으면 왼쪽 발이 아팠다. 가만히 살펴보니 새끼발가락 관절이 있는 곳에 '못'이 박혔다. 원래는 굳은살이라 하겠지만 치이고 또 치이고 동동거리면서 같은 곳으로만 힘을 지탱해야 했던 자리 나는 그 곳에 못을 치고 있었다. 헐렁한 작업신발 빡빡한 삶으로, 헐떡거리며 들숨날숨처럼 쾅쾅 못이 박히는 줄도 모르고 옹이진 자리였다. 희망이라며 생업이라며 절벽 끝에서 버티었던 자리, 오늘 그 고통을 사포로 문지른다. 생살이 싸락눈처럼 하얗게 벗겨지고 있다. -전문(p. 240) ▣ 몸과 몸의 교차점에서 흘러넘치기/ - 다섯편의 신작시 속에서의 몸(발췌)_이병금/ 시인 어느새 둘러보니 절벽 끝에 자신의 몸이 서 있다. 몸이 느끼는 고통의 원인은 육체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길이 시작하면서부터 ..

김미연_실존의 현장과 그 너머 사랑의 광야(발췌)/ 카타콤베 -6.25에게 : 고정희

카타콤베 6.25에게 고정희(1948~1991, 43세) 아버지 호적에 그어진 붉은 줄 30년 잠에서 내가 깨어났을 때 나는 이미 붉은 줄 무덤 안에 있었다 가없게도 공허한 아버지의 눈 삼십 지층마다 눈물을 뿌리며 반항의 이빨로 붉은 줄 물어뜯으며 무덤 밖을 날고 싶은 나의 영혼은 캄캄한 벽 안에 촉수를 박고 단절의 실꾸리를 친친 감았다 살아남기 위하여 맹렬한 싸움은 시작되었다 단 한 번 극복을 알기 위하여 삭발의 앙심으로 푸른 삽 곧추세워 무덤 안, 잡풀들의 뿌리를 찍었다. 맨살처럼 보드라운 잔정이 끊기고 잔정 끊긴 뒤 아픔도 끊겨 법 무서운 줄 모르는 욕망을 내리칠 때 눈물보다 질긴 피바다로 흘러 흘러 너 올 수 없는 곳에 나는 닿아 있었다 너 모르는 곳에 정신을 가둬두고 동서로 휘두르는 칼춤 아래서..

이병금 평론집『시 읽기의 새로운 물음』/ 구름 농사 : 유재영

구름 농사 유재영 일용할 이슬 몇 홉, 악기 대용 귀뚜라미 울음 몇 말, 언제고 떠날 추녀 끝 초승달, 책 대신 읽어도 좋을 저녁 어스름 아, 그 집에도 밥 먹는 사람이 있어 하늘 한 귀퉁이 빌려 구름 농사짓는다 -전문- ▣ 구름 농사와 인공 자연/ 유재영의 『구름 농사』, 구름 농사를 짓다 (발췌)_이병금/ 시인 시각과 청각, 촉각, 후각 등 신체의 모든 감각을 마치도 마술사처럼 통시적으로 감지해내는 것은 그의 시를 선명한 색깔과 형태로 도드라지게 한다. 그의 시가 자연을 압축, 재현하여 기호화에 성공한 이유는 기억의 지층 속 오래 살아남은 감각 촉수들의 강렬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작품에 등장하는 개체들, 그들의 얽혀듦의 장인 고요, 적막, 여백, 빔을 창작 방법론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

이병금 평론집『시 읽기의 새로운 물음』/ 나비가 날아간 깊이 : 이진희

나비가 날아간 깊이 이진희 눈, 부셔 허공을 가차 없이 후려쳐 벤 듯 총성이 터지기 직전 하염없이 반짝이던 차고 새하얀 겨울 산비탈처럼 폭포 소리 무심한 해안 절벽의 지나친 아름다움처럼 유해의 흔적마저 없이 얕은 음각으로 남은 이름 -전문- ▣ 그녀는 그럼에도 시를 쓴다/ 1. 처음 빛에 매혹당하다(발췌)_이병금/ 시인 「나비가 날아간 깊이」에서 빛을 감지하는 또 하나의 눈은 그녀 자신의 내부로 한없이 빠져들어 그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그 단단한 바닥에서 갑골문자처럼 오래된 언어를 만난다. 유해의 흔적마저 없는 이곳은 죽음조차 미끄러지는 빛의 피부일까. 그녀가 이끌린 매혹의 순간은 그녀만의 것이기에 육체 밑바닥에 침전물로 쌓인 언어의 사리들로 잡혀지지 않는 빛의 몸을 그려보고자 한다. 아니 빛의 육..

김미연_불가적 사색과 현란한 상상력(발췌)/ 이소당 시편 : 임영조

이소당 시편 임영조(1943~2003, 60세) 대학 때 未堂 선생이 주신 아호에 집 堂자 붙여 近園이 써준 '耳笑堂' 걸고 나니, 가가대소 누옥 한 칸이 확 넓어진다 귀가 웃는 집인가? 잠시 엿듣다 가는 바람 코로 웃어도 상관없는 집이다. 머리 어깨 힘 빼고 허파에 든 바람도 빼고 몸 가두면 들린다 시계가 내 생애 좀먹는 소리 마음벽 쩍쩍 금가는 소리 벌어진 틈 다시 메우고 어혈 든 내 혼을 방생하는 집이다 혹시 그리운 사람 올까 가끔 귀 열어 놓는다, 허나 허리 벤 바람소리 또 스산하니 문 닫고 귀로 웃는 집이다. -전문- ▶ 불가적 사색과 현란한 상상력(발췌) _김미연/ 시인 · 문학평론가 임영조(任永祚, 1943~2003, 60세) 시인은 1943년 10월 19일 충남 보령시 주산면 황율리에서 태..

그 언덕의 밤/ 박성현

그 언덕의 밤 박성현 그 언덕은 밤이었고 식어버린 달이 떠 있었다 아직 밤이 아닌 남자의 입술에는 붉은 기와 무늬의 저녁놀이 흘러내렸다 그 언덕의 밤에는 벽과 나무와 구름이 없어서 남자는 허리를 세운 채 낮고 무거운 서쪽에 기댔다 그 언덕의 밤에서 올빼미가 울었다 올빼미는 날개를 단단히 잠그고 회색 머리를 빙글빙글 돌렸다 그 언덕의 밤으로 소년들이 걸어왔다 모두 챙이 넓은 모자를 썼고 맨 끝에서 느릿느릿 올라오는 소년은 지팡이를 잡고 있었다 소년들의 얼굴에 묻은 낮의 기묘한 어둠, 남자가 기댄 서쪽을 한 소년이 주머니칼로 잘라냈다 그 언덕의 밤은 남자가 사라진 곳 소년들이 이미 남자의 사지를 둘러메고 들판으로 향했다 -전문(p. 75-76) --------------------- * 『미네르바』 2023..

손/ 장인수

손 장인수 손을 잡고 걷는 사람을 보았다 뒷모습이 쓸쓸했다 손끝부터 이별하누나 파르르 놓는구나 이별하기 위해서 말없이 손을 잡고 걷는 사람도 있구나! 어머니 임종 때 마지막까지 손을 꼭 잡았던 여자 남자와 그렇게 송별하누나 -전문(p. 68) --------------------- * 『미네르바』 2023-겨울(92)호 에서 * 장인수/ 200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유리창』『온순한 뿔』『적멸에 앉다』『천방지축 똥꼬발랄』

낙타는 아는 듯했다/ 김일태

낙타는 아는 듯했다 김일태 사막을 이해하려면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원치 않는데 속아 산 물건처럼 외롭지 않으려고 뒤처지지 않으려고 더불어 달려온 시간 되돌려주고 다시 나의 시간으로 무르고 깊은 생각이 났다. 체로 거른 듯한 모랫길을 걸으며 아내가 '이런 사막도 아주 오래전에는 바다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가는 이 길도 예전에는 꽃길이었을 수 있다고 위안하며 모래산 표면이 물결 모양을 짓고 있는 것은 파도를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태어나 사막을 벗어나 보지 않아 세상이 온통 사막인 줄로만 알고 모래로 쌓은 길과 집에 길들어 있다가 땅을 향해 자꾸 휘어져 가는 나이에 들어서야 가짜 해와 종이 달과 네온싸인을 별인 양 헤아리며 낙타처럼 걸어..

한 겹/ 김영

한 겹 김영 한 겹은 따뜻한 날씨 날씨 위에 홑겹 승복을 두른 라오스 승려들에겐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도 한 벌 옷이고 발바닥에 닿는 흙의 촉감도 한 켤레 신발이다 일찍이 치장治粧을 버린 스승을 두었으니 흩날리는 바람 또 부질없다 몇 줄로 삭아 내린 경건이 온몸을 지탱하는 뼈다 길게 줄 맞춰 탁발 중인 한 겹들 두툼한 아침 안개가 상승기류를 타면 한 덩어리의 밥이 바구니 안에 쌓이는 탁발 밥을 구하는 가난한 줄이 꾀죄죄하다 남루도 허기도 자비도 모두 한 겹이어서 따뜻한 곳의 꽃들은 다 한 겹의 꽃잎들로 핀다 사원으로 돌아가는 승려들의 발뒤꿈치에 박힌 한 겹의 고행이 유독 단단하다 그 무심함에 일생을 두었다 -전문(p. 61-62) --------------------- * 『미네르바』 2023-겨울(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