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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화/ 배귀선

귀화 배귀선 기억에 묶인 저녁이 어슬렁거린다 반원이 만든 공간과 그 너머 마당을 끌고 사는 목줄은 얼마큼의 시간이 흘러야 벗을 수 있을까 앞발을 허공에 그어대며 당기는 지척 여기와 저기, 한 발짝도 목줄 없이는 내디딜 수 없는 짐승의 세월 기억을 길들이는 듯 허공을 짖는다 몸속 어딘가 웅크린 소식 없는 딸아이 같은 무거움이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늦은 밤이면 나는 습관처럼 가장 빠르게 귀화를 서두른다 오늘은 또 허공을 향해 얼마나 짖어야 하나 -전문(p. 54-55) ------------------------ * 『현대시』 2023-7월(403)호 에서 * 배귀선/ 2011년 ⟪전라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 & 2013년 『오늘의 문학』으로 등단

생을 사랑할 마지막 시간 ▼/ 오주리

생을 사랑할 마지막 시간▼ 오주리 내 생의 마지막 장章 세상과 작별 인사를 위해 남겨진 시간 비 오는 4월의 벚꽃길 사랑한다 말하면, 나도 봄빛 수채화의 풍경이 되면, 신은 죽음의 병 오던 걸음 멈추라 할까 생을 사랑하지 않은 죄로 죽음의 병 찾아와 당신의 섭리 깨쳤으니, 신이시여, 이젠 눈물 닦아주소서 나의 짧은 생, 태어나 내내 우울이라는 생명체의 연인이던 나의 흰손 끝에서 태어난 건 눈물의 시뿐 메마른 벚나무 가지, 꽃눈은 봄밤의 어둠에도 피어났건만, 나의 여체만은 스스로 목 조르듯 이 세상 아니라 죽음으로 피어나는 꽃 비바람에 벚꽃잎이 나비의 영혼처럼 유계幽界로 흩날린다 존재하자마자 사라지는 꽃잎들, 시들고 마를 새 없이 꽃의 운명이란 떨어지는 것이니, 봄비에 벚꽃의 순간은 영원도 하였다 목숨이란..

인증 샷/ 오정국

인증 샷 오정국 한 발짝도 생략하지 못했다 누가 내 눈을 가리고 데려온 건 아닌데, 문득 지금 여기다 멀리도 아니고 가깝지도 않게 딱 이만큼의 간격, 정면은 언제나 눈에 아프지만 숨을 데가 없다 누구든 제 발로 여기까지 왔다 어떤 얼굴은 꽃송이 같고, 그 곁은 종잇조각 같고, 뒤쪽은 페인트칠 벗겨진 문짝 같은데, 또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 건가 카메라 뒤편의 길이 우리가 깊어나갈 생이라면, 등 뒤의 배경은 살아온 내력이다 벚꽃 터널은 눈부셨고, 유적지 돌탑은 아름다웠다 오늘은 기념식 현수막이 펄럭거린다 이 순간만큼은 웃는 듯이 울고, 울면서 웃어야 한다 여태껏 발걸음 바깥을 살아보지 못했다 문득 고개를 쳐들면 날이 저물고, 긴장된 침묵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 사진 찍고 남겨진 얼굴, 공중에 희뿌옇게 떠 있..

골반뼈 피리*/ 최도선

골반뼈 피리* 최도선 여체女體를 제단 위에 올리고 눈물과 웃음을 섞어 제를 올린다 그 몸에서 골반뼈를 뽑는다 긴 머리 휘날리며 어린 말 등에 올라타고 지평선 저 아래까지 유성을 쫓아다녔지요 祭物로 태어난 줄은 몰랐어요 내 몸의 청아한 소리 바람이 원한대요 그 소리가 비를 불러온다네요 그렇다면 이 몸 가볍게 드리지요 아주 오래 저승에 잠들어 있더라도 내 본향 잊지 않으며 초원을 향해 아름다운 소리 뿜어 드릴게요 너에게서 나는 맑은 소리 골반에서 솟아 나온 대찬 소리, 액막이 소리 모래벌판을 향해 물결치듯 아득히 가는 저 소리 쇠이 씽 쇠잉 쐬잉 너의 흐느낌 시리게 푸르다 나는 초원에서 그 바람을 배웠다 -전문(p. 44-45) * 몽골 역사박물관 전시실에 있는 피리로 처녀를 신께 제물로 바치고 그 골반으로..

다누리호, 달 향한 긴 여정 출발 외 1편/ 박정자

다누리호, 달 향한 긴 여정 출발 외 1편 박정자 2022년 8월 5일, 오전 8시 8분 미국 플로리다 동쪽 끝 해안 케이프커네버럴 우주기지 40번 발사장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달 탐사선 다누리호가 무사히 발사되었다 발사 2분 34초에 팰컨9의 로켓 1단 분리 3분 8초에 본체를 감싸고 있던 페어링 분리 6번째 재사용된 팰컨9의 1단 로켓은 순조롭게 지구로 돌아와 회수됐다 40분 후 고도 약 70.3㎞ 지점에서 팰컨9와 탑재체를 실은 본체가 우주 공간에 도달 약 92분 후 호주 캔버라에 있는 미 항공우주국(NASA)의 심우주 안테나를 통해 한국항공우주연구원과 첫 교신 성공 윤석열 대통령도 페이스북을 통해 "올 연말 다누리호가 보내줄 달의 표정과 BTS의 를 고대한다"며 "다누리호는 신자원 강국 · 우주경제..

행복 일기 · 253 외 1편/ 박정자

행복 일기· 253 외 1편 내 삶의 참고서 박정자 내 삶의 참고서가 된 두 가지의 진짜 참고서가 있다 그 하나는 지방도시에 있는 실업계 여고에서 취업 준비는 밀쳐두고 서울 소재 문과대학을 가려고 진학 준비를 한답시고 와 참고서 한 권씩을 샀다 결국, 그 두 권 참고서 덕분에 서울의 야간대학(문과)을 갔으며 졸업하자마자, 중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퇴직 후엔 시를 지으며 살고 있다 그 둘째는 이런저런 을 최고의 참고서 삼아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살고 있다 어디까지나 교과서는 나 자신이라 여기면서 -전문(p. 87) ------------------------------------------------------ 한국 자살률, 여전히 OECD국 중 1위 통계청이 발표한(2022. 9. 27.) '2021년 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최금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정동 16번지 최금녀 부서진 건물 뼈대와 뼈대 사이 들어찬 무허가 판잣집, 수백 채 주인 없는 땅, 정동 16번지 이런 횡재 없다고 이런 낙원 없다고 평안도는 평안도 사투리로 함경도는 함경도 사투리로 천막 치고 깃발 꽂고 문패 달고 우물 파 물 먹고, 색종이에 껌 싸 돈 벌고, 양초 만들어 불 켜고, 멀리서 온 구제품 나누고 쌀 한 되씩 연탄 한 개씩 사고 떡 팔고 국수 팔고 일수 찍고 피 팔고 지게 졌던 구 러시아 영사관 하루건너 경찰 오고 하루 건너 불자동차 출동 서울 한복판이라고 치안이 불안하다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지 않는다고 쫓겨나지 않았다 쫓아내지 못했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경기여고 덕수궁 둘러친 명당 중의 명당 러시아가 주인이었던, 정동 16번지 ..

또 다른 생각 4 외 1편/ 이종천

또 다른 생각 4 외 1편 이종천 시계를 본다 05시 35분 25초 아직은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간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블라인드 틈으로 들어오는 이른 새벽이다 슬그머니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밖을 본다 된서리 내린 지 여러 날 온몸으로 추위를 버티는 코스모스 몇이 불빛에 몸을 녹이고 있다 지난겨울 사거리 대로변의 인간시장 페인트 깡통에다가 구멍을 숭숭 뚫어놓고 굴러다니는 판자 몇 조각 모아 모닥불 놓고 둘러 서 있는 무리들을 봤다 삶의 연장延長 무언無言의 기다림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오늘 문득 그들을 봤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자들과 음식을 구하지 않는다는 자들이나 다 같이 온몸으로 버티고 있다는 걸 -전문(p. 25) ----------- 수리소 부실한 몸을 해체했을 때 또는 시간의 흐름을 견디..

물의 무늬 2/ 이종천

물의 무늬 2 이종천 작은 곳에서 큰 곳으로 아래에서 위로 가야 한다고 믿었지 그러나 어느 지점에서 작아지고 아래로 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 투명한 것은 깊이를 알 수 있지만 속내를 알 수가 없어 내심 불안하지만 그래도 맑다는 건 좋지 않을까 수평이라는 건 중심의 무게야 어떻든 간에 고르게 펼쳐진 평등이라 믿지만 잠차 많은 곳으로 기울어지는 건 원칙이었고 믿고 싶지 않은 여운이었어 헤어진다는 건 떨어져 나간다는 것 의미 없는 슬픔인지 모르나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란 빈껍데기의 빈말이었을까 앞서가는 파도를 밀고 가는 파도처럼 밀어주는 바람을 뒤따라 밀어주는 -전문- 해설> 한 문장: 생의 아케이드를 거닐며 기민한 언어만이 순간순간을 능동적으로 감당(발터 벤야민,『일방통행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인은 ..

오딧빛 오디새/ 정영숙

오딧빛 오디새 정영숙 내가 알던 사람은 뻐꾸기 우는 숲속에서 풋잠에 들었을 텐데 누가 먼 하늘가 낮달 따라 여기까지 왔나 뻐꾹 뻐꾹 초르르 칙 초르르 칙 뻐꾸기와 물총새가 울던 산골마을 삼십 촉 전등 아래서 백석의 시를 읽으며 잠을 이루지 못했었지 높고 외롭고 쓸쓸한* 사람이 눈앞에 나타날 것 같아 솔바람 풀벌레소리 흰 고무신에 저녁이슬 내리는 소리에도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고 숨이 막혔지 해름하늘에 오딧물 밴 손톱을 담그면 낮달이 창백한데 하느님이 별의 운행을 수십 년 전 뒤로 돌려 지금 이 자리에 멈추게 했나 손목 언저리를 스치던 서늘한 공기의 감촉 어둠을 뚫고 반딧불이처럼 빛나던 오딧빛 눈동자 저무는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저 오딧빛 오디새 「왕십리彺十里」 시비에 못 박힌 채 그때의 아름답던 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