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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 3/ 박선우

튤립 3 -피날레 박선우 음표로 표현한다면 아다지오다 꽃들의 감성이 건반 위에서 싱싱하게 피어오른다 색색의 건반을 누르는 건 어머니와 아버지의 눈동자 오늘의 주제곡은 화해다 일렬종대로 호명당하고 싶은 표정들 뭔 꽃이라요? 물어도 대답 없는 아버지는 깊은 도를 눌렀을 거다 참말로 오지게 이쁘요 화색이 도는 어머니는 솔을 눌렀을 거다 베토벤의 운명은 몰라도 운명 따라 모질게 팔순 근처까지 왔으니 고마웠을까 아버지가 어머니 손을 잡는다 누군가는 결말이라고 하겠지만 이건 절정이다 때마침 노을이 깔린다 손을 빼지 않는 어머니나 남사스러운 꽃들 그 부끄러움이 황홀 속으로 침몰한다 -전문(p. 228) --------------------- * 『미네르바』 2023-겨울(92)호 에서 * 박선우/ 2008년 『리토피..

매화/ 손혁건

매화 손혁건 바람은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앞을 보지 못해 아무 데나 부딪혀 멍이 들면 싹이 트고 피가 나면 꽃이 피는 바람에 눈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산을 비켜 내달리다 들판에 떨어진 햇살 꼬리 붙들어 휘적휘적 강으로 가는 흔들리며 흔들리며 바람 사이에서 길을 찾는 너는 어떤 마음으로 나에게 오는가 -전문(p. 223) --------------------- * 『미네르바』 2023-겨울(92)호 에서 * 손혁건/ 2005년 『문학세상』으로 등단, 시집 『흔들리는 꽃 속에 바람은 없었다』『동그라미를 꿈꾸며』등

디바인 매트릭스 1*/ 윤영애

디바인 매트릭스 1* - 어쨌거나, 윤영애 시도 때도 없던 거기에 돌연, 한 알이 터졌다 오래된 돌담 아래 핀 붉은 맨드라미 꽃무리 아래 수탉의 시도 때도 없는 붉은 울음 터질 때 바람에 실린 맨드라미 씨알의 한 소식을··· 나는 들었나? -전문(p. 213) * 만물을 하나로 이어주는 다리, 우주를 담고 있는 그릇. 세상이 시작되는 곳 --------------------- * 『미네르바』 2023-겨울(92)호 에서 * 윤영애/ 2005년 『문예연구』로 등단

나무 흡연실/ 강대선

나무 흡연실 강대선 사내는 편집증을 앓고 있다 니코틴 냄새를, 산등성이에서 스케치한 바람을, 대머리 언덕에서 맞이하는 햇살을, 옷깃을 파고드는 도둑 같은 싸늘함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내는 머지않아 뒷맛으로 흩어질 것이다 나는 사내의 니코틴 냄새를 안개에 놓아주고 대머리 언덕에 있는 연초 도매상을 찾아 돈을 지불한 뒤 바람을 등지고 앉는다 옷깃을 파고드는 사내의 별빛을, 황야를 한 줌의 싸늘로 흐르는 눈물을 붙잡고 사내처럼 허공을 바라본다 사내가 한여름 밤의 꿈처럼 흩어진다 -전문(p. 218) --------------------- * 『미네르바』 2023-겨울(92)호 에서 * 강대선/ 2016년 『시와사람』로 등단,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 &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시..

나팔꽃/ 이성필

나팔꽃 이성필 가만히 보라. 나만 힘든 게 아니다. 노을에 마을이 물드는데, 담벼락 오르는 꽃. 가만히 들어라. 나만 우는 게 아니다. 밤이면 주점에 불 켜지듯, 꽃망울 열리는 꽃. 가만히 읽어라. 나만 사는 게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 집 나서면, 이슬 머금고 피어있는 꽃. -전문(p. 206) --------------------- * 『미네르바』 2023-겨울(92)호 에서 * 이성필/ 2018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한밤의 넌픽션』

꽃의 이마/ 박현주

꽃의 이마 박현주 논마다 물이 그렁그렁하다 손짓하던 어린 날의 아버지처럼 심어진 모들이 수신호를 보낸다 시간의 얼룩에 기댄 창밖으로 제천역 표지판을 지날 때 강 위의 철길을 따라 움직이는 그림자 건널 강폭이 넓어 힘센 기차도 출렁이는 소리 요한하다 철로 위는 그때에도 노란 꽃들이 피었으리라 갈 바 없는 마음을 물 댄 논에 이식한 아버지는 색을 다하면 계절이 바뀌는 꽃의 방법을 눈여겨보았겠지 한철 계절을 다녀간 꽃의 이마에서는 달아오른 쇠냄새가 난다 화단의 금계국은 매일 다른 거울로 피었다가 진다 깨진 조각을 들어 얼굴을 비춰본다 금계국 한 더미 후두둑 다 진 후다 -전문(p. 200) --------------------- * 『미네르바』 2023-겨울(92)호 에서 * 박현주/ 2010년 『시평』으로 등단

파랑의 역사/ 문영하

파랑의 역사 문영하 파도에 휩쓸렸었다 죽음의 손을 잠시 잡았던 나는 거짓 같은 내 몸을 붙들고 살고 있다 헛것처럼 스쳐 간 죽음이 나에게 알려준 파랑의 깊이 가물거리는 나를 부르는 소리 있었다 아버지 품에서 눈을 떴을 때 물속의 하늘로 새떼들이 먹먹히 날고 있었다 잠에서 깨면 아직도 파랑의 물속이었다 파랑이라고 쓰면 젖은 손이 내 이마를 쓸어 주었다 나는 파랑에서 얼마나 걸어 나왔나 스스로 깊어져 물이 되고 하늘이 되는 저 고요한 파랑을 읽고 쓰는 일은 나를 기록하는 일 한 번 죽은 내가 그 속에 살고 있다 -전문(p. 194) --------------------- * 『미네르바』 2023-겨울(92)호 에서 * 문영하/ 2015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청동거울』『오래된 거울 속으로 들어가고 ..

황정산_숨은 '거시기' 찾기(발췌)/ 꿈틀꿈틀한 문장 : 윤희경

꿈틀꿈틀한 문장 윤희경 우리 선생님은 지렁이를 사랑합니다. 길게 길게 숨을 아껴가며, 몸통도 끊지 말고, 느릿느릿해도 좋으니 살아있는 지렁이를 쓰라고 합니다.비 오는 날 텃밭에서 지렁이를 자주 봅니다. 아주 실한 놈도 있지만,이제 막 운동장으로 나온 빠릿빠릿한 놈도 있습니다. 호미질을 하다가, 지상으로 떠오르는 지렁이는 충분히 반갑습니다. 뭇국에서 쫄깃한 소고기가 올라올 때 짓던 표정 알지요? 상상 속에 디룡이가 지룡이로, 드디어 체절동물 지렁이로 불리는 암수한몸, 모니터 속 우리도 자웅동체 맞습니다. 불멸의 흙속으로 머리를 들이박고 고꾸라지고 뒤채이며, 낳고 또 낳아 더더욱 실한 지렁이 계보를 이어 가야지요. 바닥을 캐다 보면 언젠가 살아있는 것을 발견한다 했으니까요. 우리 선생님은 지렁이를 오늘도 사..

김성조_시간을 건너는 일상적 삶의 풍경(발췌)/ 우득 씨의 열한 시 반 : 고두현

우득 씨의 열한 시 반 고두현 또 늦는다는 택배 문자 저녁 아홉 시까지는 종료해야 하는데 밤 열한 시 반까지 갖다 드리겠다고 양해 바란다고 또 주억거리며 고개 숙이는 문자 앞에서 한풀 더 죽는 우득 씨 손가락 빈틈으로 박스 안간힘 내리고 올리며 짐수레 옮기는 우득 씨의 퇴근 시간은 늘 열한 시 반, 그제사 집으로 배달되는 마지막 택배는 그 몸뚱아리 그래도 출근은 빨라 남보다 한 시간 먼저 일 시작하는데 언제쯤 아홉 시에 끝낼 수 있을까 문자도 깔끔하게 마감할 수 있을까 아킬레스건 한 줄 끊어진 뒤로 뒤꿈치 절룩이는 걸 숨기며 걷는 우리 동네 우득 씨. -전문- ▶시간을 건너는 일상적 삶의 풍경(발췌) _김성조/ 시인 · 문학평론가 위 시편 「우득 씨의 열한 시 반」은 오늘을 살아가는 소시민적 생활양상을 ..

음압병동 1/ 이채민

음압병동 1 이채민 새야 너는 날면서 꿈을 꾸고 나는 걸으면서 꿈을 꾸지 그러나 우린 횡단보도 아이처럼 위험해 햇빛 뒤꿈치도 볼 수 없는데 하늘 귀퉁이가 머리 위로 뚝뚝 떨어지고 내 뼈와 너의 날개는 지독한 제프티*에 모두 녹아내리지 해 지는 쪽으로 몸이 자꾸 기울어져 밤 지나고 새벽이 오면 이름 없는 무엇이 되어 뒤바뀐 영혼과 마주칠까 두려워 그리고 누군가 내게 새 옷을 입히고 꼭꼭 묶어 버리면 어쩌지 사람들이 꽃을 들고 찾아오면 어쩌지 그에게 그 사람에게 그그그그 그 그그그그 그 그그 그들에게 하지 못한 말이 수북한데 어쩌지 어떻게 하지 새야, 잠들지 마 이곳은 위험해 -전문(p. 29-30) -------------- * 여여시 3집 『꽃이라는 이름을 벗고』에서/ 2023. 11. 11. 펴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