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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성악설/ 함진원

신 성악설 함진원 평생을 선하게 살려고 파도처럼 몸부림한 대가는 가족이 흩어지고 나서도 멈추지 않았다 힘들다는 것은 사치라는 것을 너무 빨리 알았던 지난날 선한 사람이 바보 되는 세상을 보면서 보증금 떼이고 아까운 젊은이들 바람처럼 사라져가도 누구 하나 관심도 없는 한동안 소식이 없어 자꾸 귀가 기울더니 아버지 죽음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몇 사람에게만 부고를 냈다고 덤덤한 목소리 휘청거렸다 빚쟁이만 안 와도 호상이라고 선한 뒤끝은 한줄기 회한으로 남아 신 성악설을 유산으로 남겨준, 사람이 재산이라고 말했던 선배에게 부고를 전할까 망설였다는 돈과는 거리가 먼 성선설을 잊으려 쓴 눈물을 털어 넣는 밤 아버지 잘 보내드리고 선하게 살면 좋은 날 온다고 돌아서는데 빚이 빛으로 만나지 못하고 살아생전 비만 맞..

익산역을 지나며/ 박상천

익산역을 지나며 박상천 지금의 익산역은 예전엔 이리역이었다. 전라도의 남서쪽 목포로 가는 호남선과 남동쪽 여수로 가는 전라선이 갈라지는 곳. 갈라진다기보다는 정확히는 이리역이 전라선의 시발점이었다. 열차가 많이 오가는 곳이다 보니 열차 교행을 위해 이리역 정차 시간은 꽤 길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기차가 멈추길 기다렸다가 역 구내에 있던 가락국수집으로 달려가 국수를 한 그릇씩 사 먹곤 했다. 그래서 그때 호남선, 전라선을 타던 사람들에겐 이리역 가락국수에 대한 추억이 있다. 1960년대, 고향 여수에서 어머니와 함께 서울에 갔던 적이 있다. 이리역에서 국수 한 그릇을 사서 막 먹으려던 순간, 그날은 웬일인지 역무원이 빨리 타라고 재촉을 했다. 하는 수 없이 그릇 채 국수를 들고 기차에 탈 수밖에 없었다. ..

희미한 웃음 이미지/ 최동호

희미한 웃음 이미지 최동호 어둠 속에서 백지 같은 얼굴 하나 희미하게 웃다가 사라진다. 그 희미한 이미지가 오래 머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 갑자기 죽거나 요절한 친구가 항상 떠나지 않고 어딘가에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가 불쑥 살아나와 백지처럼 웃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백지는 항상 희미하고 낯선 얼굴로 새로운 고백을 강요한다. 꼬집어 말해야 할 특별한 잘못 없어도 아무 이유도 없이 그들을 아직 잊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주고 나서야 그들은 안심한 듯 잘 지내고 살라고 알 수 없는 희미한 백지 같은 웃음을 거두고 사라져가야 불편한 마음도 지울 수 있다 -전문(p. 51) --------------------- * 『미네르바』 2023-겨울(92)호 에서 * 최동호/ 1976년 시..

빛 외 2편/ 허윤정

빛 외 2편 허윤정 슬픈 문 -전문(p. 16) ----------- 고요 시들지 않는 꽃 -전문(p. 27) ------------ 하루 긴 그림자 -전문(p. 55) ------------------ * 시집 『일백 편의 한줄시』에서/ 2023. 12. 20. 펴냄 * 허윤정/ 경남 산청 출생, 1977-1980년『현대문학』 이원섭 추천, 시집『빛이 고이는 잔盞』『별의 나라』『크낙새의 비밀』『자잘한 풀꽃 그 문전에』『無常의 江』『꽃의 어록語錄』, 동시집『꼬꼬댁 꼬꼬』, 시조집『겹매화 피어있는 집』, 시선집 금속 활자공판『거울과 향기』, 영어 번역 시집『Some Where in the Sky』등, 한국대표 서정시 100인선『풀잎 그 이름에 대하여』

안개 외 2편/ 허윤정

안개 외 2편 허윤정 벽을 여는 허공 -전문(p. 24) ----------- 여백 묶이지 않는다 -전문(p. 26) ---------- 적막 만선이다 -전문(p. 64) 해설> 한 문장: 「안개」는 벽을 가리는 장애물이다. 안개 속에선 모든 것이 낯설고 조심스럽다. 그 자체가 벽인 안개는 스스로 자취를 감추면서 벽을 연다. 그런 안개는 스스로 벽이면서 벽을 여는 허공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제목과 단 한 줄의 각주 같은 시문으로 존재와 세계의 상관성, 무와 유의 동일성과 호환성을 보여준다. 삶은 안개와 같다. 벽이면서 벽이 아닌, 자취를 감추면서 벽을 여는 보이지 않는 환영들, 「안개」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 앞에 존재하는 신의 세계를 엿보게 한다. 신비로운 안개의 선물이다. (p. XV-XVⅠ) 「..

『다층』지령 100호_편집 후기(부분)/ 변종태 · 전형철 · 편집실

『다층』지령 100호_편집 후기(부분) 변종태 / 전형철/ 편집실 ■ 100번의 계절을 피고 졌습니다. 100편의 시가 열렸습니다. 첫걸음을 디디던 날의 설렘을 기억하겠습니다. 문단 안팎에서 끊임없는 사랑과 관심, 질책의 말씀들이 오늘의 『다층』을 만들었음을 기억하겠습니다. (p. 197) // 변종태 ■ 바다 없는 산골 출신이 사방이 바다인 책편에 인연이 닿았다. 42호부터 함께한 『다층』이 100호를 맞았다. 그간 청년 시인은 중년이 되었고, 『다층』은 바다가 그런 것처럼 변화무쌍하며 켜가 두터워졌다. 아득한 길을 외로운 혼魂으로 걸어가는 수승殊勝한 시인들을 기억한다. 그 걸음 멈추지 않는 한 『다층』은 늘 창간호다. (p. 198)// 전형철 ■ 작품은 시인과 시조 시인들에게 그동안 『다층』에 실린..

권두언 2024.01.14

『다층』지령 100호 특집 시 100을 내며/ 편집진 일동

『다층』지령 100호 특집 시 100을 내며 편집진 일동 IMF 외환 위기가 극성을 부리던 1999년 을 목표로 『다층』을 창간한 지 25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 층씩 쌓아 올린 벽돌 100장을 내려놓습니다. 몇 층이 될지 애초 기약은 없었습니다. 그냥 한 층씩 올리다 보니 100층이 되어버렸습니다. 만감이 교차하는 이 책 한 권을 앞에 놓고 100번의 계절을 돌아봅니다. 수많은 사람이 다층의 울타리를 들락거렸습니다. 그 발자국을 일일이 열거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합니다만, 깊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다층』에 실린 작품 숫자는 1만 편이 넘습니다. 그중에 100편을 골라 지령 100호 특집호를 마련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100호를 꾸리고 여러분을 만날까 깊은 고..

권두언 2024.01.14

노엘/ 서형국

노엘 서형국 그해 겨울은 납작 엎드려 왔지만 사람들은 겨울을 밟고 연탄재를 뿌리며 오직 캐럴을 부르는데 열중했다 기쁘다 거룩하다 그래서 운다는 사람들이 살이 문드러지는 병을 거두며 키운 돼지를 마을 십자가에 바쳤고 언 땅에서 거둔 시금치가 눈의 축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린 아이는 밤이 소유한 모든 빛을 동원해 녹슨 지붕을 밝혀주길 기도했다 낮은 곳으로 가자 아이야 너도 누군가의 소원이었으니 세상 모든 소원은 이미 누군가 이루었단다 기도는 이런 것이지 기울어 흉물이 된 누각에 올라 자신이 만든 폐허를 내려다보며 당신의 염원을 내 발밑에 두게 해 달라고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저 거대한 세상에 몰딩을 씌워 두 편 쪽방에 액자로 걸 수 있게 해 달라고 아이야 지금도 남산공원에는 자신의 몇 번째 계단이 이 도..

머리카락 깃발/ 나희덕

머리카락 깃발      나희덕    깃발이 갈기갈기 찢어진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다   검은 머리카락을 모아 깃대에 묶고  그녀들은 외친다  더 이상 때리지 말라고 죽이지 말라고  여자라는 이유로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어야 할 목숨은 없다고   2022년 9월 13일 아샤 아미니는 윤리 경찰에 의해 구금되었다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구타로 삼 일 후에 사망한 그녀는 스물두 살   그녀들은 히잡을 불태우고  함께 걸어간다 머리카락 깃발을 들고   이것은 우리의 이름  이것은 우리의 얼굴  이것은 우리의 심장   머리카락은 얼마나 오래  히잡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던가   우리가 태어날 때  가장 먼저 자궁을 열고 나온 것이  머리카락이었던 것처럼  가장 슬플 때 바람에 나부끼는 것..

밤과 잠과 꿈의 'ㅁ'/ 한용국

밤과 잠과 꿈의 'ㅁ' 한용국 밤과 잠과 꿈은 모두 'ㅁ'을 받침으로 가지고 있다 'ㅁ'이라는 자음과 입 구(口)자가 닮은 것은 우연일까 들어가면 나올 수 있는 게 문이지만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것도 문이라고 불린다 밤의 문과 잠의 문과 꿈의 문을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들은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밤과 잠을 묶어 괄호를 칠 수도 있고 잠과 꿈을 묶어 괄호를 칠 수도 있다 두 괄호 사이에는 어딘가 모르는 세계가 있을 수도 있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한 단어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디로 향해야 할까 밤에서 잠으로 잠에서 꿈으로 건너다보면 잠든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ㅁ', 세상의 모든 어둠 'ㅁ', 세상의 모든 가뭄 'ㅁ', 세상의 모든 소름 중얼거리다 보니 마음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마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