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차성환_유령의 시간, 청시(淸詩)의 시간(발췌)/ 한 점 하늘 : 이은수

검지 정숙자 2024. 1. 20. 02:24

 

    한 점 하늘

 

     이은수

 

 

  점을 찍기 시작합니다

  고달픈 그 시간 속으로 발을 내디뎠습니다

  드러난 모래알의 굴곡과 감춰진 영역이 끝없이 펼쳐진 사막

  선인장의 몸처럼 물은 안에서 길어 올려야 강이 뜨고 별이 뜹니다

 

  정지된 점은 선으로 움직여

  둥글게 큰 곡선을 만들어 나가고

  그 틈 사이로 生이 지나갑니다

 

  많은 생각을 떼어놓고 우주와 교신을 시도합니다

  서로를 비추며 끊임없이 흘러가는 나선 세계에

  붓을 들었다 내려놓는 일

 

  운석의 부스러기가 빛으로 떨어지고

  빛이 때론 남빛으로 칭얼거리고

  실오라기 같은 숨과 숨 사이는

  하얀빛으로 파닥거립니다

 

  내 안에 들어온 청시淸詩는 딱딱한지 말랑한지

  애매한 눈물 같기도, 한숨 같기도 합니다

 

  단, 한 점이 물같이 번져

  부끄러운 진실에 풀어놓았습니다

      -전문-

 

  ▶ 유령의 시간, 청시淸詩의 시간(발췌) _차성환/ 시인 · 문학평론가

  시 「한 점 하늘」에서 '나'는 하늘에 하나의 "점"을 찍는다. 그 "점"은 일상에서는 도달할 수 없는, "사막"이 펼쳐진 공간으로 무한히 확장한다. "모래알의 굴곡"과 "선인장", "강"과 "별"이 담겨 있는 그 "점"은 현재 발을 딛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낯선 세계이다. 마치 모든 것이 그 하나의 "점"으로 무한히 수렴해 들어가는 듯, "점은 선으로 움직여/ 둥글게 큰 곡선을 만들어" "나선"의 모양으로 움직인다. 그 장관은 "점"으로 회전해 들어가는 이 시간은 "우주와 교신을 시도"하는 시간이고 "운석의 부스러기가 빛으로 떨어지"는 순간이다. 바로 '시'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마치 형태가 없는 "빛"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불가해한 존재. "때론 남빛"이 되었다가 "하얀빛으로 파닥거"리는 그 "빛"은 좀처럼 잡을 수 없는 '시'의 다른 이름일 터이다. 순간에 명멸하는 그 "빛"을 일별一瞥하는 순간이 '시'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이다. 그러나 '시'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것은 형체를 알 수 없게 사라진다. "내 안에 들어온 청시淸詩는 딱딱한지 말랑한지/ 애매한 눈물 같기도, 한숨 같기도 합니다". '나'는 맑고 청아한 시를 순간 낚아채지만 그것은 마치 영감靈感과 같이 드러내 보일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나'에게 남는 것은 붙잡을 수 없다는 "부끄러운 진실"만이 있는 것이다. (p. 시 256-257/ 론 26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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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네르바』 2023-겨울(92)호 <신진 조명/ 신작시/ 작품론> 에서

  * 이은수/ 2021년 『미네르바』로 시 부문 등단, 시집『링크를 걸다』, 동시집 『코끼리를 타고 바다를 건너면』  

  * 차성환/ 2015년 『시작』으로 등단, 시집 『오늘은 오른손을 잃었다』, 연구서『멜랑콜리와 애도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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