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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도 멍이 든다/ 정여운

문에도 멍이 든다 정여운 누가 저 방문에 목숨 한 숟가락 꽂았을까 추위는 검은 두루마기 같은 구름 두르고 찾아왔다 안방이 단단히 잠겨 있다 나비장석에 걸려 있는 놋쇠 빼다가 왜 목숨 하나가 갇혀 있는지를 네 발로 기어다닐 때 암죽을 먹여주고 두 발로 걸어다닐 때도 도시락 챙겨주고 두레상 펼쳐놓고 함께 밥을 먹던 그 숟가락을 생각한다 곰팡이 푸르게 슬은 모진 쇠붙이 하나 겉과 속을 나누는 문 앞에서 늙은 숟가락이 늙은 사람을 붙들고 있다 명치 끝 방에 피멍이 드는 밤이다 삭은 문이 흔들리며 몸서리치고 있다 휠체어 바퀴 테두리가 반짝인다 뼈만 남은 반달 숟가락에 얼굴이 비친다 평생을 한 몸처럼 입속에서 살아온 쇠붙이 아버지의 목숨 한술 뜨고 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첫머리부터 범상하지가 않다. "누가..

맏형이니까/ 연제진

맏형이니까 연제진 머리의 옆구리 달동네에 귀가 산다 이목구비耳目口鼻로 구성된 얼굴 서열은 귀가 맏형이지만 사실은 뒷방신세다 눈엔 쌍꺼풀수술 눈썹문신에 매일 눈화장하고 코는 중앙에 모시고 성형으로 오뚝하니 치켜세우며 입술엔 하루에도 몇 번씩 립스틱 단장을 한다 귀에도 귀고리나 피어스를 매달아 놓긴 하지만 얼굴 무대 뒤쪽에서 고작 흔들거리는 백댄서 노릇이다 구멍 뚫어 귀고리 매달고 떼고를 반복하니 고역이다 얼굴엔 구석구석 화장을 하지만 귀화장은 없다 게다가 귀에는 안경과 선글라스를 걸어두고 요즘은 온종일 마스크까지 걸치니 영락없는 짐꾼이다 귓속에서 스마트폰 블루투스 이어폰이 점멸하는 것을 보니 귀가 몸살이 난 모양이다 귀가 없었다면 이 많은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귀는 아우들 즐기는 무대에서 씬스틸러*가 될 ..

편지 외 1편/ 정리움

편지 외 1편 정리움 지상의 아내여 이곳은 사시사철 지지 않는 꽃이 핍니다 아무것도 흔들지 않는 바람이 붑니다 구름 위에서 눈처럼 날리는 밥을 먹습니다 지난여름 함께 갔던 나이아가라 폭포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동호의 초등학교 입학식에도 다녀왔습니다 유진이의 늦은 하굣길을 같이 걸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어디든 갈 수 있고 아무 데도 갈 수 없습니다 많은 것이 있고 많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당신이 없습니다 나의 아내여 이제는 아프지 않습니다 편안합니다 조금은 잊어도 좋습니다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는 바람이 불면 눈이 밥처럼 펄펄펄 날리면 그때 잠시 꺼내 보아도 좋겠습니다 나는 잘 있습니다 -전문(p. 30-31) --------------- 김상달 씨 어머니 이름은 김상달이었다 원래 이름은 김상연이다 면..

고양이의 붉은 눈빛이 어둠을 뚫고/ 정리움

고양이의 붉은 눈빛이 어둠을 뚫고 정리움 말이 쌓인다 한 말과 하고 싶은 말과 하지 못한 말이 쌓인다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나를 잃고 떠돈다 떠도는 말은 스스로 소멸하고 싶다 관계를 잃는다는 것은 시간이 저편으로 넘어가는 일 담장 위 고양이의 붉은 눈빛이 어둠을 뚫고 이쪽을 보고 있다 나는 잠시 발을 뗄 수 없고 얼어붙은 말들이 해동되지 않는다 약속은 어느 시간에 다른 얼굴이 된다 말을 잃어버린 사이에는 없는 시간만 남는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인의 시에서는 시적 자아와 타자가 서정적 동일화에 이르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동일화의 대상은 이별이나 죽음으로 인한 부재의 상황에 있거나 불화, 불통의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다. 위 시 또한 예외가 아니다. 시적 자아와 '당신'은 소통의 매개라 ..

서산대사_해탈시

서산대사 해탈시 生也一片浮雲起/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死也一片浮雲滅/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다 浮雲自體本無實/ 흘러가는 구름은 원래 실체가 없으니 生死去來亦如然/ 생사의 오고 감도 역시 그와 같도다 ▣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위 작품은 서산대사 휴정의 해탈시解脫詩라 한다. 그러나 정작 밝혀진 원전이 없어 세인들은 그렇게 알고 인용할 뿐이다. 민중에게 삶과 죽음을 설명하기는 뜬구름 같은 허상을 찾는 일 같아서 불가적 선문답이 오히려 가장 적절한 답일 수도 있다. 세상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길게 남겼지만 그중 이 구절이 가장 회자되는 이유는 철학적 사유로 생사의 문제를 초월하게 하는 여유를 주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치 상황이나 빈부의 문제 등 어렵게 얽혀 있는 상황을 어떻..

고전시가 2024.01.24

세한도/ 유정남

세한도 유정남 파도에 실려 온 만 리 밖의 문장을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서 읽는다 눈길 행간에 휘몰아치는 바람 계절을 놓아 송백은 뼈마저 푸른가 핏빛 가시 살갗에 어지러운데 동그라미 창이 문자향으로 열린다 구름 밖으로 두루마리 펼치는 세한 붓털은 자유로워 그리움에 먹을 갈아 집 한 채 지었다 소나무 뿌리 길어 가지는 굽어지는데 여백에 핀 서로 잊지 말자는 붉은 낙관 겨워하는 이가 우선* 한 사람뿐일까 -전문(p. 64) * 우선藕船: 이상적의 호 ------------------ * 『가온문학』 2023-봄(35)호 에서 * 유정남/ 2018년 ⟪한국NGO신문⟫ 신춘문예 당선, 2019년 『시문학』으로 등단, 공저『악마의 빛깔』외

메모리얼 가든 외 1편/ 백연숙

메모리얼 가든 외 1편 백연숙 아파트 화단을 지날 때였다 스무 살 남짓 되었을까 쪼그리고 앉아 핸드폰을 이리저리 갖다 대며 맥문동을 찍느라 여념 없다 아니, 벌써 그 나이에 꽃이 예쁘다는 걸 알다니! 저 나이 때 나는 기차 사고로 입원 중이었고 오랫동안 재활치료를 받았지 죽은 피를 한 사발씩 뽑고 나서 창문을 내다봤을 때 병원 화단에 피어 있던 꽃 그때는 저 꽃이 맥문동인 줄 몰랐다 기차가 달릴 때마다 꽃은 궤도를 이탈한 별똥별처럼 빛났다 타는 듯한 폭염이든 폭우든 아무렴, 잘 자라는 맥문동이 맥문동인 걸 이제 잘 알지만 정작 저 보랏빛이 어디서 오는지 몰랐는데 꽃은 멍에서 오고 멍은 뿌리로부터 온다 꽃은 잘 보이지만 그 뿌리는 보이지 않는다 멍의 뿌리를 찾아 여기까지 왔다 꽃이 예쁘다는 걸 나는 마흔이..

돌무지/ 백연숙

돌무지 백연숙 돌이 울어요 비가 오면 떠내려갈까 봐 맨 밑에 깔린 채 입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단말마의 비명을 위해 돌들이 개구리처럼 떼거리로 울어요 여덟 명의 아이들에게 먹을 것이 없다는 걸 감추기 위해 케냐 엄마는 냄비에 돌을 넣고 끓였지요 휘휘 저으며 맛도 봤을 거예요 쌀이나 금이 되느라 돌들은 잠 못 이루고 냄비가 끓는 동안 아이들은 헛배가 불렀을 거라고 돌들은 잠시 울음을 그쳐요 눈이 오면 강아지 꼬리가 생기고 차곡차곡 쌓인 비명들 입냄새처럼 빠져나와 아아 입을 벌려 눈을 받아먹으며 오오, 배부르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으지요 울음을 그친 돌들은 반달눈을 하고 깊은 잠이 들어요 얼굴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들 모래알처럼 밤새 반짝이지요 -전문- * 여덟 명의 아이들에게 먹을 것이 없다는 걸 감추기 위..

곡선적 사고의 미학/ 강기옥

곡선적 사고의 미학 강기옥 미술에서 공간은 절대적 요소다. 선線으로, 점點으로, 때로는 면面으로 이루어낸 공간은 곧 미술 그 자체다. 고대 동굴벽화는 의도적으로 그린 선들이 다양한 면을 이루어 뜻하는 바의 형상을 이룬다. 그래서 단순히 그은 선을 미술이라 할 수 없다. 시대가 흐르면서 공간적 요소의 건축이 나타나고 색채를 곁들인 회화가 나타나 시대별로 특징지을 수 있는 형태로 발전해왔다. 심지어 다다이즘의 전위예술과 설치미술까지 나타나 현대인의 시각을 유혹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예술인지 구분하기 어렵고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읽어내기 어렵다. 세칭 '그들만의 리그'라는 사회적 비판이 모든 예술에 해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요즈음의 예술인들은 민중과 호흡을 같이하려고 노력하여 상당한 호응을 ..

권두언 2024.01.23

눌변/ 이서화

눌변 이서화 오래 쓰지 않았는데 말투는 여전히 삐걱거린다 꼭 맞은 대답들은 어디에 있나 늦가을 묻는 날씨와 재치 있는 나뭇잎들의 대답 마중 나가거나 지나친 일들을 불러들여 설명할 테이블이나 의자를 마련해야지 하면서 여전히 엉거주춤 서 있다 호박잎은 여름내 질문만 퍼붓다 군데군데 크고 잘 익은 대답을 들킨다 질문엔 다 때가 있고 그때를 지난 곳곳엔 호박 같은 대답들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눌변은 늘 애호박을 놓치고 만다 그런 눌변은 앞보다는 옆을 선호한다 옆을 묻고 옆을 대답한다 식물들은 눌변이 없다 대답 없인 처음부터 대답 없는 질문은 피워내지 않는다 말이 다르고 대답 종류가 다른 건 동물들뿐이다 -전문(p. 133-134) -------------- * 여여시 3집 『꽃이라는 이름을 벗고』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