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노랑매미 꽃여자 외 산문 1편/ 박미산

검지 정숙자 2024. 1. 22. 02:28

 

  노랑매미 꽃여자 산문 1편

       무명의 시인에게

 

   박미산

 

 

봄여름가을겨울이 한 호흡인 듯 시간 여행 중이던 그녀

만행을 삼 년씩 여덟 번 하고도 양손에 쥔 건 꼬깃꼬깃한 

문장 몇 줄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 흔한 날갯짓 한 번도 하지 못한,

견고한 자세를 유지하고 그늘 읽기에 빠져버린 여인, 눈부

신 사월의 햇살에 산그늘을 놓친다

 

햇빛에 사냥당한 노란 몸 푸른 잎에서 붉은 피가 흐른다

삼일계곡에 흐르는 여인이 빗장뼈가 하얗게 드러난다, 꽃

이 진다

 

꽃 진 자리에 수지침을 꽂으며 팔순 노모의 안부보다 형이

상학을 돌보는 여자

어머니의 뿌리를 산그늘에 끌어 놓고 언제 배반할 줄 모르

는 시 몇 편을 몸속에 넣는다

 

화악산이 크게 한숨을 쉰다 잠들었던 구름이 비를 부른다

음지에서 펄럭이던 낡은 글발이 쏟아진다

    -전문(p.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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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PRIT>

 

    시간의 물결이 보이는 곳에서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슬픈 열대』에서 "소리나 향기가 고유한 색깔을 갖고 있고, 감정이 무게를 지니고 있듯이 공간은 공간만의 고유한 가치를 소유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레비스트로스는 브리질 원주민의 세계인 열대를 알기 위해서 원주민들이 즐겨 먹는 애벌레인 코루까지 먹는다. 그는 벌레를 낮춰보는 문명를 벗어버리고 결국 열대와 관계 맺기를 한다. 그는 자신이 코루를 먹은 이 사건을 '세례'라고 한다. 세례란 그가 갖고 있는 상식과 태도를 내려놓고 온몸으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는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문명을 버리고 열대를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나는 어쩌다 보니 시골살이를 하게 됐다. 레비스트로스가 열대에 입문해서 세례를 받은 것처럼 나도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삼일리에 입문해서 세례를 받아들였다. 기껏해야 일주일에 한 번밖에 가지 못하지만, 시골에 올 때마다 도심에서의 삶을 내려놓고 자연의 세례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곳에서는 땅의 소리가 도심의 소리와 다름을, 그리고 시시각각 향기가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매번 다른 풍경을 마음속에 들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세상과 사람의 속도를 생각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우주 전체가 내 몸으로 들어온다. 밤하늘의 달과 별에 손을 뻗으면 내 손을 타고 달과 별이 지상에 내려앉는다. 또 개구리 울음소리, 새가 우는 소리, 밤새 고라니가 우는 소리, 나무가 쉬쉬하며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다.

  시간의 저린 느낌과 세계에 몸을 여는 이 공간에서는 내 몸이 나무처럼 자라고 들꽃처럼 피어난다.

  도심과는 다르게 이 공간은 영혼과 생명의 숨결이 충만하다가도 사라져 텅 비기도 한다. 즉, 허정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연을 바라보며 정신의 정화를 이루어 자아의 경계가 사라지는 허정에 이르면 절대자유를 얻을 수 있다. 나는 이 공간에서 이곳의 소리, 이곳의 향기, 이곳의 감정, 이곳의 고유한 가치와 관계 맺기조차도 버리고 허정의 상태로 가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천지 만물이 생성하고 변화하는 총체적 순환 과정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면 편안할 수 있다는 장자의 말씀에 절대 공감하는 나는 자연이라는 도를 통해 죽음을 초월하는 이 공간에서 진정한 절대 자유의 세계를 꿈꾸어 본다. (p. 1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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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여시 3집 『꽃이라는 이름을 벗고』에서/ 2023. 11. 11. <채문사> 펴냄

  * 박미산/ 경기 인천 출생,  2006년『유심』으로 & 2008년⟪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루낭의 지도』『태양의 혀』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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