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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돌이기만 한 돌 외 1편/ 이정란

온종일 돌이기만 한 돌 외 1편 이정란 부리에 쪼이는 대로 무늬는 돌 깊숙이 침투한다 돌은 무늬에 관여하지도 돌보지도 않는다 돌은 온종일 돌이기만 한 돌과 그렇지 않은 돌로 나뉜다 무늬는 돌의 일부로서 때로는 돌을 대표하기도 한다 온종일 돌이기만 한 돌이 슬프면 그렇지 않은 돌도 슬프다 슬픔은 무늬에 안겨 춤춘다 돌 안으로 빗물이나 균열 같은 외부 세계가 들어올 때 변화된 무늬가 돌 깊은 속에 알을 낳을 때 그렇지 않은 돌은 온종일 돌이기만 한 돌에서 분리된다 커다란 소리의 포자를 물고 새가 날아오른다 새는 돌의 파편을 빗겨 난다 여러 세계의 파편인 나는 깨짐으로써 돌을 복제하는 원석 온종일 돌이기만 한 돌은 고요히 있는 나를 거듭 깨뜨리며 어디선가 새를 가져와 품는다 -전문(p. 68-69) -----..

나는 있다/ 이정란

나는 있다 이정란 땅 어딜 밟아도 벨이 울렸어 어딜 파도 까만 씨앗이었어 새싹은 지축을 흔든 후 혼돈에 빠졌지 말발굽이 지나가고 떨어져 나간 목에 뒤엉킨 천둥 벼락의 뿌리가 돋아났어 새끼 고양이의 이빨 같은 백설이 무한으로 꽉 찬 세상의 난청을 녹여주었지 영원을 사는 신의 이야기가 까무룩 낮잠이란 걸 알게 된 건 미지의 불 한 덩이 덕분이었어 한 점 내 안에서 출발한 우주가 폭발하고 먼지 하나와 맞물려 공중의 틈 사이로 빠져나가 은하가 되기도 어둠 한 알갱이의 고립이 되기도 했지 하늘은 마음을 펼칠 때마다 열렸다 닫혔다 미래의 옆구리에서 떨어진 내 몸은 신의 언어 시간의 톱니바퀴에 부서져 내릴수록 신은 미지에 가닿고 비어 있음으로 시작되는 중심 나는 지금 수십억 년 동안 나를 빠져나가는 중 무심히 지나가..

내 시에 대한 백서(부분)_어떻게 쓰는가/ 오세영

내 시에 대한 백서(부분) 오세영 3. 어떻게 쓰는가 세간의 작용이 발생하는 것은 모두 아집我執에서 생긴다. 자아에의 집착을 제거하면 세간의 작용은 일어나지 않는다. [『화엄경』 제22장「십지품十地品」] 『성경』도 마찬가지이지만, 『경전』에는 여러 좋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중에서도 『화엄경』에 있는 경구를 마음에 새기고 삽니다. 시창작의 본질을 설파해주는 촌철의 비의秘意가 적시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내게 있어서는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출한 것을 시라 믿습니다. 대부분이 그렇게 씁니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의 주체이지요. 주체가 진실하지 못하다면 '생각' 역시 진실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도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하..

바다, 저 건너에서 누가 온다 외 1편/ 손현숙

바다, 저 건너에서 누가 온다 외 1편 손현숙 수평선 너머로 별이 진다 달은 그믐으로 가고 나는 점성술사처럼 사라지는 포말의 미래를 예견한다 말없이도 한 사흘 넘어 닷새까지도 견뎌야 하던 때, 바닷새 울음소리 들렸다 울음으로 물결이 출렁인다 소리도 가슴으로 듣는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노을이 물드는 곳에서 새들이 온다 세상이 기울어지면 나도 함께 기울어져서 중심을 옮기는 방법, 바다는 출렁이면서 제 몸의 각을 잡았다 그믐에도 눈을 감으면 눈 속에 환한 달이 뜨기도 했다 밀물 때가 되면 바다는 천천히 몸을 연다 눈을 감고 먼 곳을 보면 들리는 소리, 물의 깊이로 가면서 오는 사람이 있다 -전문(p. 57) -------------------------- 멀어도 걷는 사람 당신의 왼손은 나의 오른손이다 우리는..

다시, 아비정전/ 손현숙

다시, 아비정전 손현숙 다리 없는 새의 이야기를 안다 일평생 허공을 밀면서 날아다니는 이의 이야기는 허구다 잠을 잘 때도 바람의 등을 타야 한다는데, 거짓말처럼 죽어서야 겨우 땅 위에 몸을 내릴 수 있다는데, 그는 죽어서 말을 한다 모자를 써라, 양말을 신어라, 잠이 오지 않으면 그냥 눈이라도 감고 있어라, 나는 없는 그를 쓰고 신고 팔짱까지 끼면서 거리를 쏘다니곤 한다 이것도 물론 허구다 꿈속에서 이별을 하고 화들짝 놀라서 베갯잇을 흠뻑 적셨던 기억, 더 이상 사람을 만들지 않는 몸이 만삭으로 산통을 겪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편지 속의 내용처럼 혼자서 입술을 모았다 떼는, -전문- 시인의 산문> 한 문장: 다리가 없는 새의 이야기를 안다. 새는 살아있는 동안은 하늘을 계속 날아야 하는데, 잠을 ..

하병우_(···), 휴머니즘과 아동문학, 그의 시세계/ 자장노래 : 윤석중

자장노래 윤석중(1911~2003, 92세) 아가야 착한 아기 잠 잘 자거라 초저녁 달을 보고 멍멍 짖다가 심심해 바둑이도 잠이 들었다 아가야 착한 아기 잠 잘 자거라 아무리 불어 봐도 소리가 안 나 성이나 나팔꽃도 잠이 들었다 아가야 착한 아기 잠 잘 자거라 모여서 소곤소곤 채송화들도 이입들도 꼭 다물고 잠이 들었다 아가야 착한 아기 잠 잘 자거라 집 없는 잠자리도 풀잎에 앉아 눈물이 글썽글썽 잠이 들었다 -전문(p. 332) ▶ (···), 휴머니즘과 아동문학, 그의 시세계/ 아동문학 (발췌) _하병우/ 시인 · 문학평론가 아동문학이 시작된 것은 방정환에서부터였다고 한다. 즉 신문체로 써진 동화가 소파의 동화운동을 비롯해서 그가 쓴 동화가 그림이나 안데르센의 동화를 번역으로 된 것이라고 해도 창작동화..

동시 2024.01.27

사랑의 이중주/ 장재화

사랑의 이중주 장재화 2020년 12월의 중국 풍경, 하루라도 빨리 이혼하려는 부부들이 관청 앞에서 진을 치고 있다. 현재는 합의이혼이건 소송이혼이건 간에 어렵지 않게 이혼할 수 있지만 21년 1월부터는 법이 바뀌기 때문이란다. 바뀐 법에 의하면 이혼신고 후, 30일 동안 숙려기간을 가져야 한다. 그동안 한 사람이라도 마음이 바뀌어 이혼 의사를 철회하면 이혼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러니 법 개정 이전에 이혼하려는 부부들은 안달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중국인들, 참 쉽게 결혼하고 쉽게 이혼한다. 2019년 통계에 의하면, 950만 쌍이 결혼했고 415만 쌍이 이혼했다. 두 쌍 중에 한 쌍 꼴로 파경을 맞았다고 하니 그들은 이혼 연습 삼아 결혼하는 것 같다. 그들도 결혼식장에서 엄숙하게 서약했을 것이다. ..

에세이 한 편 2024.01.27

하늘이 아리다/ 김정현

하늘이 아리다 김정현 금 간 삶을 꿰매려 등골 하나둘 세다가 이내 힘없이 풀어졌다 고향인 양 뿌리 깊게 내리기를 신께 빌고 빌었건만 기름진 땅에 뿌리 내리지 못한 나는 언제나 도시를 겉돌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공 행진 중인 서울의 아파트 지층이 흔들리며 움직이기 시작한 하늘에 금이 갔다 사대문 밖으로는 나가 살지 말아라 아들에게 보내는 여유당 정약용의 편지 어쩌면 좋을까 사대문 밖에서도 올려다보기 어려운 저 집채를 -전문(p. 122) ------------------ * 『가온문학』 2023-봄(35)호 에서 * 김정현/ 2014년 계간『지구문학』으로 등단, 시집『내가 사랑한 사기꾼』외 4권, 동시집『눈 크게 뜨고 내 말 들어볼래』, 그림동화『키가 쑥쑥 마음도 쑥쑥』, 산문집『수수한 흔적』

줄다리기 외 1편/ 문근영

줄다리기 외 1편 문근영 모든 경기는 앞으로 나가야 이기는데 뒤로 물러서야 이긴다 으라차차! 벌렁 나자빠지고도 통쾌하게 이긴다 -전문(p. 98) --------------- 태풍의 눈 몰래 버린 빨대, 비닐봉지, 캔, 페트병, 스티로폼······ 태풍 쓸고 간 바닷가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다 속속들이 찾아낸 태풍의 눈 참 밝다 -전문(p. 99) ------------------ * 『가온문학』 2023-봄(35)호 에서 * 문근영/ 201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동시 부문 당선, 시집『안개 해부학』『그대 강가에 설 때』, 동시집『연못 유치원』『앗! 이럴 수가』『깔깔깔 말놀이 동시』(공저)

카테고리 없음 2024.01.26

가슴벽 외 1편/ 정여운

가슴벽 외 1편 정여운 새로 이사 온 옆집의 소음이 잦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벽 타고 넘어오는 악음樂音 살 만큼 살았는데 아프면 죽으면 되지 사내의 큰소리가 자꾸만 꽂힌다 벽이 흐느낀다 저마다 한 번씩 못을 박듯 불똥 튀는 콘크리트못이면서 서서히 꼼짝달싹 못 하게 죄는 나사못이면서 삐딱한 채로 기어이 박혀오는 대못이면서 누군가 대못을 치고 있다 못이 누군가를 치받고 있다 전생에 어미 가슴은 벽이었나보다 -전문(p. 45) --------------------------- 사 살려 주 주세요 아 아버지 그 소 손에 든 소주병 유 유리 재 재떨이 더 던지지 마세요 아, 피 피 피 사 사람 살려 주 주세요 바 밖에 누 누구 없어요? 아 아주머니 옆집에 후 훈이 인데요 저 벼 병원에 좀 데려다 주 주세요 머 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