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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동인 제8집 뒷글/ 황상순 · 정영숙

『시터』 동인 제8집 뒷글 황상순 · 정영숙 명당明堂, 좋은 자리. '터'라는 말 참 좋다. 정겹다. '터'라 하면 사전적으로는 궁궐터, 절터, 우물터 등 건물이나 구조물이 들어서야 하는 맞춤한 자리(땅) 또는 어떤 일을 이루는 밑바탕이나 그 근간을 일컫는 말인데 써놓고 봐도 소리를 내어 읽어봐도 참 정감이 가는 든든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시터' 시의 밑바탕, 시의 고향, 시의 근간, 시가 편안히 머무는 곳, 시가 있을, 있어야 할 맞춤하고 좋은 자리(땅)! -부분(p. 150) / 『시터』 5집_ 황상순 시인의 中 정영숙, 최금녀, 최도선, 한이나, 황상순, 노혜봉, 신명옥, 신원철, 윤경재, 이명, 이미산 등. 열한 명의 긴 숨비소리를 세상 밖으로 내놓는다. 12년째 시의 터를 야무지게 다지고 ..

권두언 2024.02.08

유령/ 이미산

유령 이미산 저 술렁이는 햇빛은 우리의 어깨 적시던 그날의 빗줄기 빛의 삼투압은 눈동자가 눈동자로 전하는 이야기 어쩌다 동시에 시작되는 투신 서로에게 음각되는 비명 그리고 각자의 길로 흘러가는 빗물처럼 훗날은 아직 몰라서 준비한 인사도 전하지 못해 젖은 어깨로 여백의 완성에 골몰했으니 혼자 즐기는 놀이 밤새 뒤척이는 한 줌의 미망 그런 날이 있었다고 어디쯤서 기다리는 우리의 언덕이 있어 회화나무 그늘에 서 있는 버릇이 생겼다고 저 쏟아지는 빗줄기는 내게 전하는 그의 목소리 저기요 부르면 홀연 사라지는 빛 빛 빛 -전문(p. 138-139) ----------------------- * 시터 동인 제8집 『시 터』 2023. 11. 30. 펴냄 * 이미산/ 2006년『현대시』로 등단, 시집『궁금했던 모든 ..

기사문 엽서/ 이명

기사문 엽서 이명 더 이상 도시에서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시멘트 벽에는 틈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틈으로 물결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지붕은 우주로 통해 있었습니다 금이 간 창문이 던스턴 바실리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황홀했습니다만 방바닥은 백사장이 되고 밤마다 파도를 덮고 자는 습관이 버릇처럼 생겨났습니다 병이 깊어 기침마저도 밖으로 솟구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도시에서 당신을 만난 것은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다음에 오실 때는 배를 타고 오십시오 생각만큼이나 수심도 깊어 북명의 바다처럼 검을 것입니다 험한 길을 헤치며 오다보면 당신도 곧, 나보다 더 깊은 바다가 될까 염려됩니다만 오기 전에 문자 한 통 넣어 주십시오 이곳도 사람 사는 데라는 것을 소상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전문(p. 130-131) ------..

거울의 이데아 외 1편/ 남길순

거울의 이데아 외 1편 남길순 거울은 무수한 귀를 달고 있다 나는 거울 곁에 비스듬히 서 있고 거울은 배고픈 사람처럼 바라보다가 기다란 네모 속으로 사라진다 매일 아침 옷을 입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거울은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고 혼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을 때 비로소 거울이 된다 밤의 유리창에 비치는 과묵한 정물 거울 속에는 얼마나 많은 겹이 들어가 있을까 이사 전날 전신 거울이 무수한 날의 밤을 포개 보인다 버리고 온 세간 옆에 서 있는 거울 모서리를 돌며 마지막으로 마주칠 때 거울은 오후 두 시의 강한 햇빛을 받아내며 놀란 말처럼 날뛰고 있다 -전문(p. 98-99) ------------------------------------------- 그 새는 하늘로 날아갔다 양해열 시인을 추모하며..

한밤의 트램펄린/ 남길순

한밤의 트램펄린 남길순 튀어 오르는 자의 기쁨을 알 것 같다 뛰어내리는 자의 고뇌를 알 것도 같다 트램펄린을 뛰는 사람들 트램펄린을 뛰는 사람들 종아리를 걷은 맨발들이 보이고 총총 사라진 뒤 달빛이 해파리처럼 공중을 떠돈다 아무도 없는 공터에 트램펄린이 놓여 있고 속이 환히 비치는 슈퍼문이 떠 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몸 삶의 흐름이 끊기고 성장이 정지된 세계에서 삶의 체감은 살아 있음보다는 죽어 있음에, 얻음보다는 잃음에, 자기실현보다는 자기박탈에 더 가까워진다. 남길순은 현대사회의 인간을 "아무도 없는 공터"에서 홀로 "트램펄린을 뛰는 사람들"에 비유한다.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는 사람들. 높이 "튀어 오르는 자의 기쁨"과 바닥으로 "뛰어내리는 자의 고뇌를/ 알 것도 같"(「한밤의 트램펄린」..

넉넉/ 윤경재

넉넉 윤경재 넉넉, 입안에서 '넉넉'하고 입천장소리 내보니 혀끝이 하늘을 두드리는 것 같아 머리에서 발끝까지 울림이 생긴다 아무 일 없어도 왠지 푸근하다 내 곁에 당신만 보였을 때 난 참 넉넉했는데 당신과 나 사이에 이것저것 채워 넣으니 도리어 빈곤하다 소금물을 들이켠 듯 목이 마르다 넉넉 소리만큼 참 쉬운 길이었는데 시선을 맞추며 나란히 걸으면 됐는데 짧은 가을 같은 소리, 넉넉 말을 잊은 뒤에 눈물처럼 그렁그렁 핑 돌아 알아챈다 -전문(p. 108) ----------------------- * 시터 동인 제8집 『시 터』 2023. 11. 30. 펴냄 * 윤경재/ 2007년『만다라 문학』으로 & 2008년『문예사조』로 등단

첫과 끝/ 이현호

첫과 끝 이현호 안녕, 내 어리고 오랜 사람 부서지지 않는 마음속에 사는 한 마리 소라게여 오늘 나는 기억의 장례를 치른다 반질반질하게 손때 묻은 기억을 버리고 늙고 낡은 혼자가 되어 뒤돌아선다 기억 속에 큰 집 한 채를 짓고 머물며 자라지 못해 늘 어리기만 하고 뽑아도 뽑아도 새로 돋는 새치처럼 되살아나서 언제나 가장 오래되었던 어리고 오랜 사람아, 안녕 백사장에 맨발로 서 있는 아이가 몰려오는 파도에 까르르 웃으며 뒷걸음질 치듯이 추억할 수 없었으니 성큼 바다에 뛰어들어 파도를 타는 사람같이 출렁일 수 없었으니 집게발같이 네 손을 꽉 잡고 가고 싶었던 미래 나는 오늘 자루를 잃어버린 미래의 망치로 화석처럼 단단해진 과거를 내리친다 안녕, 안녕히 그날 이후로 나는 네게 꼭 맞는 안식을 입고 그때까지 나..

이병국_빛의 질서보다 얼룩의 어둠 속으로(발췌)/ 비(緋) : 전형철

비緋 도플러 효과 전형철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면 매번 새로운 장면이 펼쳐진다 햇귀가 사각의 유리를 투과해 저서식물처럼 어룽거린다 그늘에 웅크리고 있던 공기는 숨은 해의 이동을 따라 경계를 천천히 박음질한다 기후의 표정을 읽는 것은 어제까지만 유효했다 빛은 발산하기 전 우주의 긴 터널을 통과하며 실선의 배후가 된다 그럴 때는 있던 것을 덜어내고 벽화로 가득 채운 무덤 양식을 떠올린다 초점이 흐려질 때까지 배후는 등이 떠밀린다 빛의 서문을 채색한다 우주 망원경에게 빨려든 성운들에게 가채를 하는 것은 가채를 얹는 불안과 같은 이치인지도 모른다 있는 색보다 더 많은 없는 색들로 가득 찬 우주에서 온 빛을 누군가는 해석해줘야 한다 우리가 볼 수 있거나 이름 부를 수 있게 돋아나는 싹은 이미 가을에 떨어질 곳을 점..

구둔역에서/ 신원철

구둔역에서 신원철 강릉에서 서울로 이어지던 옛길 관동대로 위 중앙선 철로에 연결되었다 버림받은 역 동강 난 레일은 완전히 끊어졌지만 한때의 영광 낡은 지붕에 오롯이 이고 역사건물 그대로 남아 화사한 사월 햇살마저 밖에 두고 안이 좋아서 서성거린다 러시아대륙 아득히 눈 내리는 철도의 홀로 역사나 개척기 미국 서부의 황량하고 외로운 철길이 잠깐 생각나지만 사용 중이면 저렇게 푸를 수 있겠나? 일부러 내가 여기를 오겠나? 열차 대신 사람들 동강 난 철길을 좋이 걸어다니고 들러 커피도 마시네 바람이 만들어낸 한적하고 썰렁한 아름다움 속 -전문(p. 108) ----------------------- * 시터 동인 제8집 『시 터』 2023. 11. 30. 펴냄 * 신원철/ 2003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

도토리진법/ 신명옥

도토리진법 신명옥 흘리는 순간 발은 공원 숲으로 들어가고 눈은 바닥을 더듬는다 숲에 깔리는 진형, 굽신거리며 하나씩 부수어야 벗어난다 갈색으로 빛나는 결정체, 높은 곳에서 떨어진 구슬, 암호가 적힌 쪽지 이 포진은 간격이 일정치 않다, 정해진 노선이 없다, 몰입해야 보인다 경단으로 탑을 쌓는 동안 환해지는 눈빛, 올라가는 입꼬리, 넉넉해진 호흡으로 동그라미와 노는 아이, 탄성으로 차오르는 풍선, 회복되는 별자리 나무가 보고 있을까, 제 분신들과 무아경에 든 다람쥐 -전문(P. 93) ----------------------- * 시터 동인 제8집 『시 터』 2023. 11. 30. 펴냄 * 신명옥/ 2006년『현대시』로 등단, 시집『해저 스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