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이민 가방을 싸는 일/ 정영효

검지 정숙자 2024. 2. 12. 01:33

 

    이민 가방을 싸는 일

 

     정영효

 

 

  몇 개가 필요한지 몰라 세 개만 샀습니다

  하나에는 옷을 담고 하나에는 잡화를 담고

  하나에는 아직

 

  혼자 떠나는데도 분리를 잘해야 하고

  분리를 잘할수록 정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짐을 줄이며

  짐을 늘리며

  가방 안에 맞는 구조를 만들어 보다가

 

  그 나라에는 비가 자주 온다고 해서

  나는 우의를 챙겨 넣습니다

 

  우의는 분명히 옷이지만

  잡화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어느 쪽에 자리하든지 적당하다면

  이름으로 구분하지 않아도 괜찮을 듯한데

  이곳에서는 내가 계속 설명되고 있습니다

  아는 사람들이 나를 제일 모릅니다

 

  먼 거리를 함께할 가방은

  가로와 세로가 튼튼해 보입니다

  아직 출발하지 않았지만 도착한 기분으로

 

  나는 생활을 이어 갈 구성을 찾습니다

  짐을 푸는 순간 거주는 시작되니까

  이곳과의 차이를 확인해 보면서

  꼼꼼하게 우의를 입는 방법을 생각하면서

 

  몇 개가 필요한지 몰라 세 개를 샀습니다만

  아직 하나는 비어 있습니다

     -전문(p. 168-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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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파란』 2023-겨울(31)호 <poem> 에서  

  * 정영효/ 200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계속 열리는 믿음』『날씨가 되기 전까지 안개는 자유로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