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젊은 시인이 늙을 때까지 쓴 시/ 김누누

검지 정숙자 2024. 2. 13. 02:20

 

    젊은 시인이 늙을 때까지 쓴 시

 

     김누누

 

 

  젊은 시인이 가장 먼저 스킨 케어 제품의 유통기한을 확인했다. 유통기한 지난 스킨 케어 제품 사용은 오히려 피부에 독이 될 수 있다는 글을 어딘가에서 읽은 기억이 있어서다. 유통기한은 따로 표기되어 있거나 패키지에 적혀 있었다. 패키지는 옛적에 버린지라 젊은 시인은 몇몇 제품의 유통기한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유통기한이 지났다 하더라도 이 정도로 사람이 늙을 수 있는 건가? 그게 말이 되는 일인가? 하고 젊은 시인은 생각했다.

  젊은 시인이 그다음에 확인한 것은 핸드폰이었다. 시를 쓰는 동안 설정해 두었던 방해 금지 모드를 해제했다. 부재중 연락이 몇 건 와 있었다. 그중 두 개는 대출 문자였으며 나머지는 친분이 있는 시인들과 만든 단체 채팅방에서 시인들이 나눈 대화였다. 젊은 시인은 날짜를 확인했다. 6월 8일. 젊은 시인이 시를 쓰려고 자리에 앉은 날짜가 6월 7일이었다.

  젊은 시인은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가 비었다는 사실을 까먹은 탓이다. 젊은 시인은 냉장고 문을 닫았다. 젊은 시인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의자도 그대로였다. 노트북 배터리 역시 그때 그대로였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일까. 젊은 시인은 골똘히 생각했다. 거울을 다시 봐도 늙어 버린 모습은 그대로였으며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젊은 시인은 노트북을 열어 늙어 버리기 전에 쓴 시를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다시 읽어 본 시는 치기 어린 생각과 미숙한 문장으로 가득했다. 어떻게 이런 시를 쓰고 만족하며 저장을 했던 거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젊은 시인은 급격한 피로감에 휩싸였다. 젊은 시인은 몸을 일으켜 침대로 향했다. 낯설도록 폭신한 침대. 젊은 시인의 몸이 빨려 들어가듯 푹 꺼졌다. 젊은 시인은 그대로 잠이 들었나 보다.

  젊은 시인이 다시 눈떴다. 창밖은 해가 중천에 떠 있고 젊은 시인의 손은 여전히 주름진 그대로다. 젊은 시인은 물을 한 잔 마셨다. 자다 일어나서 물을 마시는 건 젊은 시인이 오랜 시간 유지하고 있는 습관 중 하나이다. 그러고 젊은 시인은 멍하니 핸드폰을 만졌다. 할 얘기가 없다는 얘기를 굳이 SNS에 올렸다. 그러나 핸드폰 글씨가 너무 작아 눈이 아픈 탓에 젊은 시인은 금방 핸드폰을 집어넣어야 했다.

  젊은 시인은 동료 시인들끼리 근처 커피숍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옷을 챙겨 입어 밖으로 나갔다. 젊은 시인은 스스로의 옷차림이 뭔가 주책맞다는 생각을 했다.

  젊은 시인은 동료들과 만나 커피도 마시고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맥주도 한 잔 마셨다. 그러고 난 뒤에도 젊은 시인은 여전히 그대로 늙어 있었다. 그러나 그날 만난 동료 시인 중 누구도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젊은 시인을 못 알아보거나 하지도 않았다.

  젊은 시인은 무릎이 아파 연신 무릎을 주물렀다. 무릎 다음은 어깨. 젊은 시인은 별수없이 누울 수밖에 없었다. 푹 꺼지면서

  젊은 시인은 생각했다.

     -전문-    

 

  시론/ 주주총회> 한 문장: 시를 쓸 때 나는 인물을 만들어 낸다. 상묵이나 도희, 한수 등은 내 시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시 속 세계에 존재하는 장치들을 맞닥뜨린다. 나 대신 시를 진행시키는 자들이다. 시가 돌아가게끔 하는 역할이다.

  그렇다고 시 속 인물들이 알아서 모든 것을 다 하도록 뒷짐지고 쳐다만 봐도 되는 건 아니다. 계속해서 시에 관여해야 한다. 시에 관여하는 방법은 시를 쓰는 거다. 시 쓰기는 창조가 아니라 관여다. 우주 세계 같은 건 아니지만, 이건 사실 잘 모르겠다. 애매한 지점에 있는 것 같다. 내가 마치 상묵, 도희, 한수가 이끄는 시를 가만히 지켜만 볼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모두 제쳐 두고 시를 이리저리 휘저을 수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시를 가만히 놔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 위치에 있다. (시 p. 48-50 / 론 52-53)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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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파란』 2023-겨울(31)호 <issue 비등단/ 기발표작/ 시론> 에서  

  * 김누누/ 2020년 시집 『착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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