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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과 편지와 재즈 : 유경지

펜과 편지와 재즈 유경지 편지를 쓰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독한 소주를 마셨다. 너는 또 어디서 무얼 사랑하고 있으려나. 너는 또 어디서 어떤 것들을 천천히 풀어나가고 있으려나. 다시 자리에 앉아 펜을 고쳐 쥐고 펜촉에 잉크를 묻혔다. 상처 입은 것들을 구원하시나요. 길 잃은 고양이들을 품에 안고 계시나요. 홍차가 쓰길래 변기에 부어 물을 내렸다. 새벽에는 먼지가 죽어 시체를 남기는데 그것들은 모두 변기 속으로 말려 들어간다. 나는 나체가 되어 다시금 책상에 앉았다. 펜촉의 잉크가 말라버려 또다시 잉크를 묻혔다. 어떤 신화를 엿듣고 기록하고 계시나요. 음식물 쓰레기나 나오지 않게 여전히 저녁 반찬을 두 가지만 올리나요 찬바람이 불길래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침대로 파고 들어갔다. 옆집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겨울 눈밭을 걸으며/ 이진서

겨울 눈밭을 걸으며 이진서 나는 언제나 연소된 마음들을 상상한다 눈이 가득 내리는 겨울, 창문에 신문지를 붙일 때 팔팔 끓는 찻주전자를 옮기다가 손을 데었을 때 너와 눈을 밟으며 한 이야기는 미드나이트 클래식 겨울이 끝나갈 때쯤이면 내 마음 속에 늘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사라진 것들을 기억하는 게 제일 어렵다 잊혀진 감정들을 재조립할 때는 꼭 네 몫의 마음을 남겨두고 싶었다 그러니까 마음 속 눈을 퍼낼 때에는 언제나 과분한 사랑을 상상할 것 어디를 가더라도 언제나 네 곁이다 지겹고도 익숙한 마음들 차가운 공기를 얼굴로 맞으면 신발 위로 눈 결정들이 쌓인다 사각사각하고 간질간질한 사랑의 현현 -전문(p. 176-177) ---------------- * 『시마詩魔』 2023-여름(16)호 에서 * 이진서/..

사람들의 나무 생활/ 신현서

사람들의 나무 생활 신현서 책장이 가지고 있는 책들도 나무 사람들이 집을 꾸미는 가구도 나무 사람들이 자주 쓰는 종이도 결국엔 나무 사람들은 나무 생활을 즐긴다 하지만 나무는 가족을 잃은 것 같아 눈물을 뚝뚝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 때문에 나무를 펑펑 쓴다 -전문(p. 150) ---------------- * 『시마詩魔』 2023-여름(16)호 에서 * 신현서/ 인천 가현초등학교 5학년

동시 2024.02.10

이준관_동심의 아름다움, ···(발췌)/ 한 마리 나비가 날 때 : 오규원

한 마리 나비가 날 때 오규원(1941-2007, 66세) 한 마리 나비가 날 때 팔랑팔랑 혹은 나붓나붓 꿈꾸며 나비가 날 때 한 마리 나비가 내는 꿈꾸는 소리 그 작은 소리 없어질까 지나가던 바람이 얼른 가슴에 안고 간다 그리고 그 소리 기다리는 꽃이 보일 때까지 조심조심 안고 다니며 키운다 들어 보라 나비와 만난 바람의 소리를 그 바람 속에는 언제나 꽃에게 전해 줄 팔랑팔랑 혹은 나붓나붓 날며 꿈꾸는 나비의 소리 -전문- ▶동심의 아름다움, 오규원의 동시(발췌) _이준관(시인, 아동문학가) 내가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시로 등단하고 본격적으로 동시 창작을 하던 무렵 오규원의 동시를 만났다. 시각적 회화적 이미지 중심의 독특한 동시는 나에게 특별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는 동시를 쓴다는 사실..

누구의 시선일까/ 조우희

누구의 시선일까 조우희 어두워도 느껴지는 어색한 시선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눈 그러나 어딘가에도 없는 눈 사람의 자취가 없는 이곳 뒤에는 숨겨진 내가 있지 누구도 모르게 스며드는 그것 희미하게 들리는 건 비명인 것 같기도 도돌이표 노래인 것 같기도 한 그것 달팽이관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숨을 멎다가 쉬다가 어쩌면 내가 아닌 것이 숨을 쉬는 것인지도 모를 이상하고 기이한 현상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내 옆에 서 있는 사람이 있다 형체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빠르게 다가오는 누군가의 발소리 이리저리 유연하게 움직이는 것이 뼈 없는 풍선사람 같다 누구일까? 의문이 의문을 낳지만 생각은 이미 엉킨 상태 봄을 반기듯 꼬인 매듭을 풀 듯 생각을 하니 하나씩 풀어내..

눈물/ 박시연

눈물 박시연 벽난로에서 장작불 타는 소리가 들린다 오묘한 분위기와 비스듬한 그림자 엄숙한 숨소리에 입김을 내뱉는다 물에 비치는 내 모습 가위로 오린 듯한 이목구비 습관처럼 네 생각이 난다 생각을 비틀어 버린다 고통이 부서진다 심장 박동이 멈추고 이명이 들린 날 일기장 곳곳에 네 이야기가 적혀있고 은하의 눈물을 닦아준다 은하에는 신비한 심리가 생겨난다는 걸 그리고 나는 무너지지 않을 그리움이 와르르 쏟아지는 걸 본다 -전문(p. 166-167) ---------------- * 『시마詩魔』 2023-여름(16)호 에서 * 박시연/ 통영중학교 1학년

금시아_물 안팎의 시공간을 부유하는 안개 讀畵(발췌)/ 춘천역 : 신동호

춘천역      신동호    노을이 비껴 앉아 있었다 거기에선  무료한 사람들의 세월이  떠나지도 도착하지도 않은 채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뭔가  내 청춘의 십 년은 내내  안개로부터 벗어나려는 발버둥이 아니었던가  문득 옛 친구의 낯익은 얼굴을 만나고 돌아서면  비로소 기억 저편에 놓이던 추억  내내 앞만 보며 달리던 동안에도  묵묵히 세월과 더불어 낡아지던 풍경들  그 오랜 것들은 아름답던가 추억은  아련하다 새벽거리를 쓸던 이웃들의 얼굴도  나는, 머리를 쓰다듬던 그들의 손길로 자라지 않았던가  이내 마음속에서  혁명이란 이름으로 인해 소홀히 해서 안 되었을 것들  떠오른다 거기에선  홀로 돌아오는 어머니, 아들을 남겨두고  감옥 담장을 자꾸 되돌아보며 가슴 저미던 어머니  안개 속에 눈물 감추..

달팽이/ 이우디

달팽이 이우디 손끝마다 흐린 표정이 푸른 문고리를 흔든다 한 번도 열린 적 없지만 그곳은 내가 사라지는 지점 오색 종이로 오리고 붙인 오늘의 부담이 첫눈처럼 소복하다가 물결 한 몸으로 소곤대다가 안과 밖 경계에서 화려한 모드로 전환, 사라지는 중이다 손끝마다 적의를 품은 고요가 두꺼워진다 환호 한번 질러본 적 없지만 그곳은 열정의 데시벨이 제로가 되는 지점 태연히 남겨진 나 우스꽝스러운 안도에 드라마틱한 이마가 희게 웃는 나 이해 못 한 날 내내 앓다가 시늉만 하는 지문을 지나가는 중이다 채취된 나의 속도는 인 템포in tempo 붉은 갈채가 들려! -전문(p. 86-87) * 달팽이: 앙리 마티스 ---------------- * 『시마詩魔』 2023-여름(16)호 에서 * 이우디/ 2014년『시조시학..

한 아이의 꿈/ 김상미

한 아이의 꿈 김상미 한 아이가 죽은 쇠박새를 묻고 있었다 지나가던 나도 흙 한 줌 쥐어 덮어주었다 천국에도 분명 새가 있을 거예요 물론이지, 내일이면 저 쇠박새도 천국을 훨훨 날아다닐 거야 아이는 고개를 끄덕 뜨덕이며 쇠박새야, 이젠 천국으로 훨훨 날아가거라 그러곤 소맷부리로 눈물을 닦았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주고는 걱정 마, 쇠박새는 꼭 천국으로 날아갈 거야 고마워요, 아이가 눈물 고인 미소로 꾸벅 인사를 했다 우리 쇠박새가 좋아하는 풀씨를 무덤 앞에 놓아줄까? 그래요, 그럼 쇠박새도 더 잘 날아갈 것 같아요 아이와 나는 근처 풀밭에서 씨 여문 풀꽃을 뜯어 쇠박새 무덤 앞에 놓아주었다 쇠박새는 들고양이에게 물려 죽었지만 천사 같은 아이를 만나 지상에 따뜻한 무덤 한 칸을 얻었다 그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