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사르가소/ 김혜천

사르가소 김혜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풍 지대 안전하고 평온한 해양 사막 부풀어 올라 순환을 멈춘 죽음의 바다 후회라는 감정의 늪이거나 무지와 자만 두 괴물이 잠자는 처소 되었다 금 긋는 순간부터 사막화되어 가는 확보된 영토 배설된 쓰레기들이 뭉쳐 다니는 바다 갇히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아 서서히 죽어가는 줄 모른 채 부유물처럼 떠다닌다 박차고 일어나 좌초된 감정을 예인하는 돛을 올리고 파도가 갈기 세워 달려드는 바다 펄펄 뛰는 것들과 마주칠 기회 많은 바다 곳곳에 암초가 등을 세우고 먹이가 먹이를 삼키는 사나운 바다로 나가야 한다 상어는 숨이 멎을 때까지 아가미를 닫지 않는다 이산화탄소를 버리고 촉수를 세워 새로운 바다로 유영할 뿐 -전문(p.150-151) ----------------------..

대체 불가/ 정채원

대체 불가 정채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사자가 20만이 넘는다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20만 가족이 누구는 아들을 잃었고 누구는 아버지를 잃었고 누구는 남편을 잃었고 누구는 연인을 잃었다는 것이다 대체 불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 사람을 잃은 것이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어느 쪽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의 인기 회복을 위해? 협상이 하루 늦어질 때마다 오늘은 또 몇백 명이 전사할까? 저녁 뉴스에 자막으로 흘러갈 뿐인 그 숫자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도 만질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싸늘한 어깨를 안아보지도 못한 채 뜬 눈을 감겨주지도 못한 채 세상 모든 곳에서 영영 지워야 하는 웃으면 덧니가 보이던 무용수 아들아 세 살배기 딸을 안고 놓지 못하던 아빠야 자원입대 5일 전..

달빛국회/ 김순진

달빛국회 김순진 사당역을 지나다 문득 생각한다 나는 달을 숭배하는 당수가 만든 지극히 사적인 당의 당원이다 우리 당 당수는 달집을 태우거나 횃불을 들고 머리를 조아리지도 않으면서 맹목적 달의 숭배를 이념으로 삼는다 나는 슈퍼문 블루문 레드문 따위의 슬로건을 믿지 않으며 다만 무드에 표를 의존하는 아마추어 당수를 신봉한다 일체의 당비와 의무 없이 달을 연모하는 것만으로도 지속될 수 있는 당원의 자격 달이 반쪽이 되거나 파산지경에 이를지라도 결코 청문회를 열거나 해산되지 않는 달빛국회 나는 1인 독재 이데올로기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즐기며 구름의 아주 나쁜 정책이나 백주의 달빛 누출 경위에 관해 궐기한다 달빛국회는 늘 만월이 최선의 뉴딜이라 우기지만 국민들은 오랜 세월 우려먹은 빛바랜 정책에 피로감을 느낀다 ..

1인분의 세계/ 박재우

1인분의 세계 박재우 나는 직립의 몸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걸을 수 있는 발이 없었다 스스로 걸을 수 없는 나는 버려지고 던져졌다 이 천형은 버림받은 어미에게서 왔다 어미도 그의 어미에게서 버려진 우리의 기나긴 고아의 시간들, 그리하여 밤은 오직 짐승의 이빨처럼 어둠의 뼈를 물고 생의 하중을 버티는 것이다 몸의 절반이 이미 무덤 속에 있으니 살아있는 것인가, 죽어있는 것인가 왜 삶은 이토록 비현실적인가 바람이 불어와도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피할 수 없는 몸은 감옥이었다 나는 일생을 걸고 나를 탈옥해야 했다 창살 밖으로 수많은 팔을 뻗어 햇살의 부스러기를 긁어모으며 탄화를 꿈꿨다 팔을 뻗은 자리가 옹이가 되는 줄도 모르고 함부로 바람의 멱살을 흔들었다 번번이 실패했고 팔이 부러지는 아픔의 층계를 밟고 오르면 ..

뭉개진 지문 속으로/ 박몽구

뭉개진 지문 속으로 박몽구 1년 반 동안 직무대리로 지내다가 연구소 대표 임기를 새로 시작하게 되어 등기에 쓸 인감을 떼러 동사무소에 들렀다 여직원이 인감증명 떼는 목적을 묻더니 지문인식기에 엄지손가락을 대란다 그러더니 지문이 스캔되지 않는다며 젖은 티슈로 손에 물기를 묻혀 보란다 그래도 안 되니 다시 검지를 대게 하고 그것도 실패하여 이번에는 다른 손 엄지 검지를 내밀었지만 지문 인식은 끝내 무산되었다 적지 않은 시간 일을 하고 시를 쓰고 서류를 만지며 주름살을 늘려왔는데 나를 증명해준 지문이 통째로 사라지다니··· 발령장은 늘 험지로만 나를 몰면서 혹시나 증발할지 모른다며 출근 타코메타를 찍게 하고 매일 한 일을 일지에 낱낱이 적어야 했다 그렇게 나를 증명하라더니 정작 필요한 순간에 나를 증명해줄 수..

트렁크* 2/ 이광소

트렁크* 2 이광소 누군가 나를 끌고 가 트렁크 속으로 밀어 넣었다 팔도 다리도 움직일 수 없는 공간 트렁크 속에 갇혀 있어요 고함질러도 아무도 듣는 이 없다 악몽 속에서 발버둥 치며 트렁크를 물어뜯으려 해도 입은 재갈 물려 있고 앞뒤로 움직일 수 없는 비좁은 공간에서 더 이상 일어서려는 마음은 찌그러지고 탈출할 기력은 고무풍선처럼 바람 빠지고 세상 속같이 팽개쳐진 트렁크 속 트렁크 속같이 꽉 막힌 세상 무엇이 서로 다른가라는 의문에 눌려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순간 불빛이 비친다 트렁크 밖 한 줄기 빛은 내 몸의 오장을 현상하듯 훑어가고 트렁크 밖은 달리는 트럭 소리 이젠 정말 죽는구나, 염병처럼 떨리는데 트렁크가 속도를 내 굴러가기 시작한다 트링박물관에서 박제된 새의 깃털들을 훔친 에드윈 리스트는 정체..

서촌/ 조창규

서촌 조창규 해주 이 씨 외갓집은 명문가였습죠 이조 중기부터 청운효자동에서 살았습죠 경복궁의 우백호였던 인왕산은 호랑이 소굴이었는데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겠다던 호걸들이 자주 민가에까지 내려와서 늦가을 서촌의 집들은 처마에 주렁주렁 곶감을 달아 놓았습죠 인왕산을 담은 한 폭의 진경산수화, 서촌 외가는 화원 집이었는데 오대조 외조부를 정조 대왕이 특히 총애했다고 합니다요 중인층 어머니 가문에 그야말로 해가 서쪽에서 뜬 일이었습죠 덕분에 나는 가끔씩 인왕산에 올라 서촌을 내려다보면 왠지 저 멀리 파란 기와집이 친근하게 다가오고 북쪽부터 빨갛게 물드는 단풍에 대해 큰 불평불만이 없게 되었습죠 봄이면 제비다방에 놀러 오는 제비들이 리모델링한 이상의 집을 들렀다 다시 남쪽 지방으로 내려갔고 눈 그친 어느 동짓달..

흘수선/ 강인한

흘수선 강인한 더듬거리네. 넘실거리는 물결 지그시 눌러보는 체중. 킬킬 간지럼 타는 당신의 바다 위에 몰살이, 물살의 혀가 송곳처럼 꼿꼿해지다 끝없이 오르는 금빛 수평선 뒤집어 버릴 듯 위로 아래로 배의 몸통을 어루며 어루만지며 물살은 더듬거리네, 가장 비밀스런 언어로 더듬거리네. 멀로 먼 데서 시작된 희미한 선율이 한꺼번에 찾아온다. 마침내 당신의 바다를 끌어올린다. 솟구쳐 폭발하고, 산화하는 금빛 소용돌이. -전문(p. 90) ------------------ * 『상상인』 2023-7월(6)호 에서 * 강인한/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입술』『강변북로』『튤립이 보내온 것들』『두 개의 인상』, 비평집『백록시화』 등

이성혁_ 앓는 몸이 피워낸 시편들(발췌)/ 스프링 벅 : 최정아

스프링 벅 최정아 노트를 펼치자 칼라하리 사막이 보인다 스프링 벅의 발굽으로 내 노트엔 많은 것이 지나갔다 계절을 삭제해버리자 물이 지나간 흔적이 보인다 불길을 따라가면 강이 나온다고 적혀 있다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노는 아슬아슬한 스프링 벅은 위험하다 펼쳤다 접히는 갈피마다 스프링이 튕겨 오른다 스프링을 달고 있는 뿔들 어떤 형태로 묘사해야 할지 전전긍긍하다 달을 놓친 날 무릎들로만 걸어가는 가족을 본다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말을 하고 말 없는 무릎들이 낡은 버스를 타고 질주의 좌석에 앉아 있다 이럴 때 광합성을 하는 식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엎질러진 기억을 줄줄이 엮어 끌고 오는 구름의 뒤통수를 아버지라 불러보려다 앞만 보고 달리는 스프링 벅을 생각한다 바위산을 오르내리며 푸른 풀밭을 찾아 ..

권온_당당하게 움직이는···(발췌)/ 어느 가게 유리에 찍힌 이마 자국: 이병률

어느 가게 유리에 찍힌 이마 자국 이병률 어느 가게 유리에 찍힌 이마 자국 바깥 유리면이었다 누구를 들여다보려 했을까 혹은 무엇을 말하려다 무심결에 이마가 닿은 걸까 안쪽 세상으로 밀어놓지 못한 자국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도 닦인 적이 없다 거리가 어두워지면 안으로 엷은 불빛이 새어나오는데 그때마다 이마 자국은 한 번 더 선명해진다 이마에 유리자국이 찍힌 것이 아니라 유리에 이마자국이 찍힌 것뿐인데 그래도 된다면 자국은 그 유리면이 박살이 나서 쓸모없게 될 때까지 영원히 그대로 있을 것 같았다 이마 자국 안쪽 반대편에는 영혼의 모든 일들이 스스로를 휘젓고 있을지 몰랐다 아주 깊은 밤 가끔 차량의 걸걸한 불빛들이 이마 자국을 비추기를 마친 시각 그 이마에 내 이마를 대보았다 이마를 마주대야만 체온 안쪽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