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조창규
해주 이 씨 외갓집은 명문가였습죠
이조 중기부터 청운효자동에서 살았습죠
경복궁의 우백호였던 인왕산은 호랑이 소굴이었는데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겠다던 호걸들이
자주 민가에까지 내려와서
늦가을 서촌의 집들은 처마에 주렁주렁 곶감을 달아 놓았습죠
인왕산을 담은 한 폭의 진경산수화, 서촌
외가는 화원 집이었는데
오대조 외조부를 정조 대왕이 특히 총애했다고 합니다요
중인층 어머니 가문에 그야말로 해가 서쪽에서 뜬 일이었습죠
덕분에 나는 가끔씩 인왕산에 올라 서촌을 내려다보면
왠지 저 멀리 파란 기와집이 친근하게 다가오고
북쪽부터 빨갛게 물드는 단풍에 대해
큰 불평불만이 없게 되었습죠
봄이면 제비다방에 놀러 오는 제비들이
리모델링한 이상의 집을 들렀다 다시 남쪽 지방으로 내려갔고
눈 그친 어느 동짓달
현조 외할아버지도 흰 나귀 타고
서방 정토 무릉도원으로 훌훌 떠나가셨습죠*
조상 덕에 명문가가 된 외가와 변변찮은 친가를
동시에 물려받느라 나는 혼란스럽습니다요
나와는 거리가 먼 효자동
음복도 하기 전에 나는 제사 때 쓰려고 아껴둔 곶감을 꺼내 먹고
온갖 부귀영화 누리는 저 청와대 집주인을 몹시 부러워하다가
개똥밭을 구르면 더러운 똥만 묻어서
그나마 저승이 이승보다 나을 거란 기대에
양가 조상님을 함께 모셨습죠
민어, 조기는 동쪽
외할머니가 좋아하신 곶감은 서쪽에 올리고
한시 같은 축문을 읊다 보면
열매 많은 나무 새들 잘 날 없다고
동서지간에 한바탕 얼굴 붉히는 일도 이젠 그러려니 합니다요
근대 서양화풍인 빌라들 속에서
성은을 입은 한옥집은 족보책을 펼쳐 뒤집어놓은 듯한 지붕을 얹었고
이마가 시원한 인왕산 바위들도 국보급입니다요
신선들 모여 시 짓던 송석원과
윤동주가 별 헤던 하숙집과
사돈의 팔촌쯤 되는 박노수미술관이 있는 마을
서촌을 사랑한 나는 고모들보다 이모들이 더 좋고
모계사회였다면 분명 내 팔자도 폈을 텐데
친가보다 외가가 잘살아서
곶감 빼먹듯이 야금야금 기울어져 간 외갓집
실은, 인왕산 능선을 기어 올라가는 성곽이 외할머니댁 복구렁이였다고 합니다요
-전문(p. 91-93)
* 이인문, 「산촌설계도」, 종이에 담채, 31.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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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인』 2023-7월(6)호 <시-움> 에서
* 조창규/ 201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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