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링 벅
최정아
노트를 펼치자 칼라하리 사막이 보인다
스프링 벅의 발굽으로 내 노트엔 많은 것이 지나갔다
계절을 삭제해버리자 물이 지나간 흔적이 보인다
불길을 따라가면 강이 나온다고 적혀 있다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노는
아슬아슬한 스프링 벅은 위험하다
펼쳤다 접히는 갈피마다 스프링이 튕겨 오른다
스프링을 달고 있는 뿔들
어떤 형태로 묘사해야 할지 전전긍긍하다 달을 놓친 날
무릎들로만 걸어가는 가족을 본다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말을 하고
말 없는 무릎들이 낡은 버스를 타고 질주의 좌석에 앉아 있다
이럴 때 광합성을 하는 식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엎질러진 기억을 줄줄이 엮어 끌고 오는
구름의 뒤통수를 아버지라 불러보려다
앞만 보고 달리는 스프링 벅을 생각한다
바위산을 오르내리며 푸른 풀밭을 찾아 떠돌다
스프링 노트를 찢다 보면
뿔만 남아 있는 산양들이 된다
골목을 오르내리며 푸른 풀밭을 찾아 떠도는
산양들이 지나간 곳마다 스프링 노트가 찢어졌다
구름의 귓속말에도 현혹된 적 있다고 적혀 있다
피가 지구를 한 바퀴쯤 돌아서 오는 걸 알 수 없다
그때 후드득 노트가 찢어졌고
산양들이 바위산으로 올라가고
집집마다 석양이 켜진다
-전문-
▶ 당당하게 움직이는 행동의 시인/ 이병률이라는 이름의 브랜드(발췌) _권온/ 문학평론가
발표 시 「스프링 벅」의 유추는 현란할 정도이다. 스프링 노트의 스프링과 '지갑영양'이라고도 불리는 '스프링 벅(spring buck)'이 겹친다. 스프링 벅은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는 영양(bok)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스프링 노트의 스프링과 스프링 벅이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그 둘 사이의 존재 양상은 큰 차이를 가지는바, 시인은 이 시에서 스프링 벅의 뿔을 스프링으로 표현하면서 과감하게 이 둘을 겹쳐 놓는 것이다. 이와 함꼐 스프링 노트의 힌 면은 스프링 벅이 뛰어다니는 '칼라하리 사막'으로 유추된다. 스프링 노트의 흰 면 위에 써진 글씨는 스프링 벅이 뛰어다닌 흔적인 발굽 자국이다. 그러니 글쓰기는 스프링 벅의 여정으로 유추된다. 그 여정을 통해 "내 노트엔 많은 것이 지나갔다"는 것. 시인은 노트를 펴고 그 노트에 기록되어 있는 글들을 읽는다. "불길을 따라가면 강이 나온다"는 문장과 같은 글들을.
그런데 스프링에 종이가 결려 찢어질 위험이 있듯이, 앞만 보고 달리면서 높은 곳에 올라가기 좋아하는 스프링 벅은 추락할 위험에 종종 처한다. 즉 높은 곳까지 달려 나간 글이 그만 아래로 추락하여 더 이상 쓰기 힘들어지는 위험 말이다. 여기서도 스프링 벅 글 의 추락과 "푸른 풀밭을 찾아 떠돌다/ 스프링 노트를 찢"는 행위는 유추 관계로 묶인다. 글쓰기는 "푸른 풀밭을 찾아 떠"도는 일, 그것은 "구름의 뒤통수를 아버지라 불러보려다/ 앞만 보고 달리는" 일이었다.
*
하지만 이제 스프링 벅(글쓰기)은 가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뿔만 남은 산양들"이 되고, 이 산양들 역시 바위산으로 올라가 추락(찢기)하게 될 것이다. "산양들이 지나간 곳마다 스프링 노트가 찢어졌다"는 진술은 이러한 사태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이 옳은 것인지는 자신이 없다. 이 「스프링 벅」은 감춰야 할 비밀 가족사와 관련된 이 있다는 듯이 이해하기 모호하게 써진 면이 많다. (p. 시 55-56/ 론82-83 ·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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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인』 2023-7월(6)호 <특집조명/ 신작시/ 작품론> 에서
* 최정아/ 200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바람은 색깔을 운반한다』『혼잣말』 외,
* 이성혁/ 1967년 서울 출생, 문학평론가, 2003년 ⟪대한매일신문(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 등단, 저서『불꽃과 트임』『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서정시와 실재』『미래의 시를 향하여』『모더니티에 대항하는 역린』『사랑은 왜 가능한가』『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시, 사건, 역사』『이상 시문학의 미적 근대성과 한국 근대문학의 자장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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