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추상화 또는 세밀화 외 1편/ 염민숙

추상화 또는 세밀화 외 1편 염민숙 너와 답 없는 끝말잇기를 한다 식탁 의자로 탁자를 내리쳤다 유리 탁자가 왕창 깨졌다 내가 말을 잇는다 겹으로 된 유리는 더욱 결속하며 금이 간다 네가 말을 받는다 금과 금이 겹치고 결속하며 세밀화로 바뀐다 세밀화에 세밀화를 겹치면 집이 말할 수 없이 깜깜해졌다 한가운데 물이라도 담길 것처럼 집이 텅 비었다 너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네가 퇴장했다 내가 퇴장했다 그림자들이 결별했다 -전문(p. 78-79) ------------- 공룡알 보성에서 대구까지 공룡알 24개 34만 원 화물 앱에 뜬 공룡알은 실으러 갔다 고속도로 지나면서 침공 외계인 기지같이 들판에 쌓아둔 게 무언가 했었다 집에서 소 한 마리를 기를 때만 해도 노동의 종말이 무언지 몰랐다 벼를 베면 아이들까지..

물의 채색법/ 정화

물의 채색법 정화 하얗게 마른 심장에서 물소리가 들려 발목을 걷고 기다려요 한 번도 흘린 적 없는 가지런한 손가락으로 빛을 모으고 프리즘처럼 심장을 통과한 색으로 달아나기 전에 칠해주세요 타이밍이 중요해요 메마른 심장이 부담이라면 이해될 때까지 기다릴게요 밤을 지낸 물방울을 떨어뜨려 주세요 너무 늦지 않았나요 백 겹으로 출렁이는 붉보라를 칠해주세요 아주 빨강도 좋겠어요 물속에서 꺼내온 꽃의 얼굴이 나타나요 깊은 그림자를 업고 점점 뚜렷해져요 미지의 색이 도착하는 소리가 들리면 맨발로 젖은 흙을 밟아요 봄의 끝에서 겨울의 끝까지 천천히 그려요 한 번 지나간 길은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누운 색을 일으켜 세워 물이 흐르는 길을 따라 함께 섞이겠어요 허락된 빛이 넘치고 무지개 소용돌이가 터지기 시작했어요 -전문..

자전거와 나팔꽃/ 유금옥

자전거와 나팔꽃 유금옥 오랫동안 타고 다니던 자전거가 고장 났다. 나는 세 자전거를 샀고 그 자전거는 담벼락 옆에 세워 두었다. 어느 날 보니···, 쓸 만한 뒷바퀴는 떼어내 누군가에게 주고 종달새같이 지저귀던 은빛 종도 크레파스를 담던 바구니도 뗴어네 누군가 필요한 자전거에게 주고 이제 그 자전거는 앙상한 갈비뼈만 남았다. 나는 그 자전거가 사후 장기기증을 약속하고 돌아가신 친척 집 할아버지 같다고 생각했다. 햇볕 따스한 오늘 아침에 보니 녹슨 갈비뼈 사이에 빨간 나팔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꽃밭이 선물한 새로운 심장이었다. -전문(p. 137) ------------------- * 계간 『P. S』 2023년-가을(3)호 에서 * 유금옥/ 2004년 『현대시학』으로 시 부문 & 2011년 ⟪조선..

그루터기/ 이서연

그루터기 이서연 눈물을 파종하던 어머니 닮은 듯도 깊은숨 휘어지던 아버지 닮은 듯도 세월을 베어낸 자리 비움마저 굵직하다 -전문(p. 131) ------------------- * 계간 『P. S』 2023년-가을(3)호 에서 * 이서연/ 1991년 『문학공간』(박재삼추천)으로 시 부문 & 2019 『문학과의식』으로 평론 부문 등단, 시조집『내 안의 그』외 다수, 수필집『그리움으로 가는 편지』외 다수

요즘 복/ 황옥경

요즘 복 황옥경 길을 건너다 발끝이 걸려 넘어졌다 무릎을 다쳐 급한 대로 약국에 가서 파스를 샀다 몇 번 들러 안면이 있는 여자 약사가 뜬금없이 자녀들은 다 결혼했냐고 물었다. 아이 둘 다 제 짝 찾아갔다고 하니, "아유 복 받으신 분이네요." 했다 갑작스런 말에 당황해 웃었더니 다시 확신에 찬 목소리로 "요즘은 그게 복"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복福 하고는 평생 인연이 없는 내가 졸지에 최신형 복을 받은 여자가 되어 버렸다. 출근 시간이라 지하철 안이 젊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다들 어디로 문자를 보내거나 영상을 들여다보고 있다. 아침부터 지쳐 보이는 얼굴에서 삼포시대三抛時代*와 '요즘 복'이 오버랩된다. 부모들은 자식들에게는 말도 못 꺼내고 그저 자기들끼리 쉬쉬하며 신종新種 복福에 대해서 조용히 전파하고 ..

예쁜 꿈/ 홍정임

예쁜 꿈 홍정임 나는 죽어 누구의 먹이이고 싶지만 누군가가 맛있게 먹고 새끼를 배고 사랑도 하고 살았으면 하지만 새근 새근 자고 꼬물꼬물 기었으면 하지만 이 못 돼 먹은 세상에서 그런 사랑스러운 일은 꿈 꿔 봤자 헛일 그래서 할 수 없이 내 주검을 불에 넣으면 불 속에서 내 살들은 돼지고깃점이 익듯이 금방 꺼매지고 오그라들겠지 물기 많은덴 피싯거리고 푸싯거리겠지 기름기 많은덴 지글지글 끓겠지 그렇게 타들어 가다가 창자도 푹푹 터지고 염통밥통 하는 것들도 빵빵 터지겠지 손가락발가락은 서로 닿았던 적이 없는 것처럼 깔끔하게 따로 떨어지고 나를 잡아먹으려고 가뒀던 눈구멍도 입구멍도 드러나겠지 그러면 안녕 나 인간 밖으로 간다 -전문(p. 52-53) 표4> 전문: 굳이 시집을 낼 필요가 있겠냐는 말에 그럴 가..

아무나 하는 모임/ 한연희

아무나 하는 모임 한연희 아무도 없지만 독서 모임을 하러 갑니다 아무도 없어서 책 한 권을 쉽게 선택했고요 오래도록 반복해서 읽어나가길 수차례 지식이 쌓이고 쌓이는 것 그러나 결국 아무도 없다는 것 책과 친구하기는 쓸데없다는 것 알아요 그 책의 제목은 외로움쯤 되겠지요 책장에 꽂아둔 어떤 책의 등에는 극지방이라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제인이 선사해 준 책이었지만요 어린 제인이 커튼 뒤에서 영국 조류사를 읽었을 때 말이죠 사실 나 또한 거실 커튼 아래 앉아 두꺼운 역사책 하나를 읽었습니다 분노의 역사는 인간이 살아온 만큼 참 대단하더군요 알아요 분노에 찬 내 얼굴을 말입니다 극지방 편이 필요했을 때 말이죠 나는 배신자 배신자 이렇게 되뇌고 있었고요 어제 그 친구나 그제의 저 친구나 백날 떠들어대도 ..

가뭄/ 심우기

가뭄 심우기 오래도록 저수지의 물은 저수지를 떠나본 적이 없다 둑이 터져 물고기가 저수지를 버려도 물은 한 번도 저수지를 버리지 않았다 이제는 한 번쯤은 저수지 물도 어디론가 가고 싶다 그 어디가 어딘지 모르면서 목적지를 정하여 두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인연 닿는 대로 저수지 들렀던 철새를 따라갈까 잠자리와 벌과 나비처럼 날아갈까 목 축이러 오던 노루와 멧돼지 찾아가 뛰어볼까 저수지에 빠져 헤엄치던 별들과 구름 태양이 떠나가던 그 길로 가고 싶다 저수지 물이 물고기와 어린 치어들을 남겨두고 끝내 집을 떠났다 바닥이 드러났다 -전문(p. 74) ------------- * 계간 『P. S』 2023년-가을(3)호 에서 * 심우기/ 2011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검은 꽃을 보는 열세 가지 방법』『밀사』..

영월에서/ 손택수

영월에서 손택수 영월문화회관 독자와의 만남 시간이었다 휴대폰 액정에 부고 문자가 떴다 한국시인협회 쪽이다 작가회의의 부고까지 더하면 한 주에 두세 번씩은 죽음을 마주하는 셈인데, 그때 나온 질문이 시인으로 살면서 좋은 게 뭐냐는 것이었지 습관적으로 문자를 지우다가 뭔가 뜨끔해왔다 뒤풀이 자리에선 죽으려고 벼랑 끝에 올랐다 동강 비경 앞에 펜션을 차렸다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는데 펜션에 자살하러 왔다 살아 돌아간 이들이 몇이라고 했나 문학이 뭐냐 시가 뭐냐 밤새 술잔에 출렁출렁 유배를 온 어린 왕의 슬픔을 멸한 나라보다 더 오래 살고있는 땅 부끄러움으로 깨어난 아침이었다 신용불량자로 산 적이 있는 누군가는 가장 힘들었던 시간 부러 장례식장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전문(p. 70) ------------- *..

불구의 질문/ 배재경

불구의 질문 배재경 간혹 엉뚱한 질문이 나를 당혹시킨다 그러고 보면 바보스런 질문에 질문을 성실히 키우지 못해 내 인생이 많이 쏟아져 갔다는 생각 하지만 그녀는 왜 나를 곤혹스럽게 하는가? 결혼을 앞둔 조카에게 이혼은 언제 할 거냐 고, 묻는다거나 막 썸을 타는 딸에게 오늘 데려온 놈은 100일을 채울 거냐 고, 따져본다면 허공에서 분사되는 태양처럼 내 얼굴은 열압탄으로 붉게 타오를 거야 자기 어디가? 나? 바보, 너에게 가고 있잖아! 우리 집 대문은 사라진 지 오래다 달이 아무리 화장을 하여도 빛이 나지 않는 거리에서 우두커니, 자기 누구야? -전문(p. 66) ------------- * 계간 『P. S』 2023년-가을(3)호 에서 * 배재경/ 경북 경주 출생, 1994년『문학지평』으로 &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