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개진 지문 속으로
박몽구
1년 반 동안 직무대리로 지내다가
연구소 대표 임기를 새로 시작하게 되어
등기에 쓸 인감을 떼러 동사무소에 들렀다
여직원이 인감증명 떼는 목적을 묻더니
지문인식기에 엄지손가락을 대란다
그러더니 지문이 스캔되지 않는다며
젖은 티슈로 손에 물기를 묻혀 보란다
그래도 안 되니 다시 검지를 대게 하고
그것도 실패하여
이번에는 다른 손 엄지 검지를 내밀었지만
지문 인식은 끝내 무산되었다
적지 않은 시간 일을 하고
시를 쓰고 서류를 만지며 주름살을 늘려왔는데
나를 증명해준 지문이 통째로 사라지다니···
발령장은 늘 험지로만 나를 몰면서
혹시나 증발할지 모른다며
출근 타코메타를 찍게 하고
매일 한 일을 일지에 낱낱이 적어야 했다
그렇게 나를 증명하라더니
정작 필요한 순간에
나를 증명해줄 수단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문 인식을 포기한 동직원이
외간 남자가 아니란 걸 증명해야 한다는 듯
아내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묻고
꼭 집어 둘째 아이 생일을 묻는데
가물거리는 기억을 한참 만에 꺼내 답하고서야
겨우 인감증명 한 통을 뗄 수 있었다
늦은 오후 비껴드는 햇살
더 기울어지기 전에 일터로 돌아간다
실적을 쌓기 위한 도구가 되어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왔지만
내 좌표의 행방은 오리무중
너는 누구냐고 묻는
손가락을 몇 번이고 문질러 본다
-전문(p. 10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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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인』 2023-7월(6)호 <시-움> 에서
* 박몽구/ 1977년『대화』로 등단, 시집『칼국수 이어폰』『단단한 허공』『5월, 눌린 기억을 펴다』『라이더가 그은 직선』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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