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겨울바다/ 이채민

겨울바다      이채민    한 생을 시작하는 파도가  차디찬 주검의 시를 업고 온다   한때는  지상의 아름다운 언어의 깃발로 나부끼던  유일한 노래  유일한 혁명  유일한 사랑  은하의 빛나는 꼬리를 잡고 날아오르던  그것들이  막다른 골목에서도 풀썩 뛰어오르던  그것들이  어느 봄날  들것에 실려 나가는 눈먼 바울을 외면하던  비루한 그것들이  한 뼘 가슴에도 발붙이지 못한  궁핍한 그것들이  차디찬 주검으로 실려온다  아침햇살 속에서 검게 떠오른다  검게 변한 내 염통에서 박수를 치는  그것들이  찐득한 어둠과 섞여서 징그러운 박수를 치는  그것들이  숨어서 나팔을 불고 있던 나에게  서로의 죽은 몸을 철썩철썩 때리며 달려든다   유일한 불행이 밀려온다     -전문(p. 128-129)    ..

중국정원*/ 장석주

중국정원* 장석주 어린 시절엔 잉그리드 버그만을 사랑했지. 더 먼 곳에 사는 여자도 사랑했지. 단추 없는 상의를 걸친 채 사춘기 소년이 불던 휘파람 소리. 청년이 되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를 거야. 소년들은 가보지 못한 곳을 동경하고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민어들이 먼바다에서 돌아오는 계절, 옛날 소년들 이마에는 푸른 뿔이 돋겠지. 우리가 야생 박쥐라면 먼 곳으로 날아갔겠지. 중국 정원엔 연못이 있고 여름엔 수련 꽃이 피겠지. 소년들은 성큼 자라서 그곳에 도착하지도 못한 채 벌써 어른이 되겠지. -전문(p. 94-95) * 시드니에는 명나라의 정원 양식을 본 딴 '중국정원'이 있다.중국 광둥성과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즈가 자매결연을 맺은 걸 계기로 조성된 것이다. 중국 이민자들이 차이나타..

후래자삼배(後來者三杯)/ 박민혁

후래자삼배後來者三杯 박민혁 어떤 불길함은 간혹 징후만으로 그친다 생이 예상보다 길어지자 일찍이 신이 내 삶 곳곳에 뿌려놓은 복선을 그만 까맣게 잊고 말았다는 듯 열차가 사람들을 싣고 강을 건넌다 음악이 뭉텅뭉텅 잘려 나가고 있다 창밖으로 배열을 조정하며 새떼가 날아간다 아득히 먼 곳에서 돌아본다면 나는 어떤 역사의 허구 인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지독한 현실에서는 행복한 꿈이 이득인가 현실보다 불행한 꿈이 이득인가 두 가지 감정이 늘 이인삼각 경기하듯 발걸음을 맞추고 있다 어떤 날은 사나흘 연거푸 살아버린 느낌이다 엉뚱한 생각을 했는데 문득 오류가 없다 그러나 애초에 이월된 삶이란 걸 모를 리가 깊고 어두운 터널이 펼쳐진다 음악이 손조롭게 흐르기 시작한다 -전문(p. 92-93) --------------..

민왕기_먹구름 속 산책자여, 이제 곧 비가···(발췌)/ 냉담 : 길상호

냉담 길상호 달이 얼어붙어 금이 간 뒤로 어떤 연락도 닿지 않았습니다 거울이 더 두꺼워져 어제의 내게도 성에가 피고 한 방울 한 방울 깊어지는 웅덩이 볼륨을 줄여 밤새 쓸쓸한 음악을 틀어 놓았습니다 귀신과 키스를 나누고 나서 하루 정도 더 버틸 용기를 얻었습니다 창문도 커튼도 모두 입을 닫은 이 방의 고요를 사랑합니다 멀리멀리 퍼져가는 웅덩이 기습 한파가 닥칠 예정이니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놓으랍니다 혀 위에 굴리던 딱딱한 노래는 다 녹아 사라지기 직전입니다 똑똑똑 또독, 끝도 없이 이어지는 노크 더 차가운 바람이 불어올까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전문- ▶먹구름 속 산책자여, 이제 곧 비가 내릴 겁니다/ 길상호 작품론(발췌) _민왕기/ 시인 시인은 「냉담」에서 말했다. "달이 얼어붙어 금이 간 뒤로/ 어떤..

데바나이프/ 박재우

中 데바나이프 박재우(경남 김해 출생) 활어노점 사내가 데바나이프로 막 퍼붓기 시작한 소나기를 끊어내고 있다 우산을 들고 줄 서있던 노인 몇 빗발의 발길질에 발길 돌리고 바다의 내장을 훑으며 붉은 비의 발목이 도마 아래로 툭툭툭툭 흘러내린다 비의 지느러미와 비의 아가미에서 설악의 벼랑을 숨긴 안개와 속초 연안에 쏠리는 비린내를 잘라내면 비는 비로소 그 특유의 역동성을 잃고 파닥임을 멈춘다 그때까지 사내는 통나무도마처럼 말이 없다 아니, 사내는 칼등처럼 우직한 어깨로 이미 안다 사내에겐 오직 죽음에 닳아 없어질 칼의 운명과 칼날을 받아내며 끝내는 버려질 도마의 운명이 있을 뿐이다 눈과 코와 입에 오래 칼이 지나가 나이가 다 지워진 도마의 내성과 매일 벼리지 않으면 녹에 먹히고 마는 칼의 생리가 부딪혀 마지..

죽을 만큼/ 이돈형

中 죽을 만큼 이돈형 사랑을 해야겠어 태어나서 아직 죽어보지 못했으니 죽을 만큼 사랑을 해야겠어 생각난다 손목을 그을 때 반짝이던 유리조각이, 반짝여 손에 힘이 더 들어가는데 그때 왜 하필 죽을 만큼이 되돌아왔는지 누가 그 손을 덥석 잡았다면 오랫동안 죽을 만큼 살아가겠지 그날 이후 집 없는 마음이 죽을까 조각만 보면 집어던졌어 집이 조각조각 부서져도 마음만 들여다보았어 죽었을까 나무나무나무를 말하는 내가 나무 안에 들어선 적 있나 공기공기공기를 말하는 내가 공기 밖에 나가본 적 있나 사랑을 해야겠어 어디서 오는 사랑이 아니라 자꾸 어딘가로 가는 사랑 말이야 훗날이 입을 막고 모로 눕는다 해도 모른 척하고 약산에 진달래꽃 필 때까지* 사랑을 해야겠어 죽을 만큼이란 게 알고 보면 순식간에 시들해지거든 - ..

신상조_최근 시의 낯선 풍경들(발췌)/ 물질이론 : 변희수

물질이론 변희수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책상 위의 돌을 쓰다듬어 주었다 정신에 고무된 자가 되어 물질을 돌보기 시작했다 손길을 가지게 된다면 죽어서도 죽지 않는 물질이 될 것 같았다 나는 드디어 물질을 이해했구나 나는 이제 성질을 잘 아는 사람이 되었구나 어느 먼 강가의 돌멩이 속에서 들려올 것 같은 목소리로 아침마다 내가 물었다 그런데 있잖아, 너와 내가 끝까지 남은 성분이라면 우리는 앞으로 뭐가 되지? 돌 앞에선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는데 돌보는 자가 되기로 한 약속이 떠올라 서로의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었다 손을 너무 타서 반질거리는 두 개의 물질이 거기 놓여 있었다 -전문(p. 47-48) ▶최근 시의 낯선 풍경들(발췌) _신상조/ 문학평론가 경계 밖의 시/ 표피적 피상성의 디스피아적 사물과..

2층 관객 라운지▼/ 김소연

2층 관객 라운지▼ 김소연 오늘은 화분의 귀퉁이가 깨졌다는 걸 발견했는데 깨진 조각은 찾지 못했다 돌돌 말린 잎을 화들짝 펴고 있는 잎사귀들 하얗게 하얗게 퍼져나가는 입김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이 생각을 오만 번쯤 했더니 내가 만약이 되어간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가 내가 생각이 되어버린다 문을 열어 먼지처럼 부유하는 생각들을 손바닥에 얹어 벌레를 내보내듯 날려 보냈다 어둠 속에 손을 넣어 악수를 청한다 과학자의 '모릅니다'는 설명이 가능할 이론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노인의 식탁 옆 약통 같은 것 기계의 뒷면으로 기어들어가 헝클어진 선정리를 시작하는 것 질문에 대해 답을 하지 마 질문에 대해 답을 해보려 노력하다가 다른 진심을 전달해 줘 그럴듯함과 그러함과 그럴 수는 없음 모..

김광기_시적 구성의 미장센 효과(발췌)/ 연못 위에 쓰다 : 안도현

연못 위에 쓰다 안도현 당신을 병상에 버리고 당신은 유리창 너머로 저를 버리고 저는 밤마다 아무도 읽지 않을 이야기를 썼죠 마당 가에 연못을 들였고요 당신이 꽃의 모가지를 따서 한 홉쯤 말려서 소포로 보내주신다면 꽃잎을 물 위에 뿌려놓고 꽃잎이 물속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바라보려 했죠 당신은 오래 죽은 척 가만히 누워 있었죠 발톱을 깎아 달라는 청을 둘어주지 못했어요 연못 가에 앉아 제 발등을 바라보는 동안 풀이 시들고 바람이 사나워지고 골짜기 안쪽에서 눈이 몰려왔어요 당신의 장롱과 당신의 옷을 분리하고 당신의 부엌에서 당신의 수저를 떼어 내고 면사무소에 가서 이름을 지웠어요 저는 이제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어요 문법을 잊고 마음껏 미끄러질 수 있게 되었어요 쨍한 코끝으로 연못 위에 문장을 쓸 수 있..

발와술/ 안은숙

발와술 안은숙 허리를 구부린 사람은 굽혀진 안쪽에 궁리가 있다 약자의 굴욕은 힘이 세다 왜 활은 당겼다 놓았을 뿐인데 날아갈까 그렇다면 새들은 다 시위하는 것일까 구부리고 자는 사람의 품엔 외로운 꿈이 있다 동종의 그림자가 있다 측은과 욕망이 함께 있다 내뱉는 말에 자신의 원심력이 있다는 것 반쪽만 숨는 방식으로 현혹하는 발와술撥窩術 허리를 구부리고 마음을 달래주는 밝은 애인들의 친밀한 궁리들로 누군가는 귀가 먹고 속수무책이 된다 -전문(p. 86-87) ----------------------------- * 『문학과 사람』 2023-가을(11)호 에서 * 안은숙/ 서울 출생, 2015년『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지나간 월요일쯤의 날씨입니다』외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