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김미연_노령사회 노령시학의 대두와 그 진정성(발췌)/ 파주기행 2 - 출판단지 : 강희근

파주기행 2 출판단지 강희근 지혜의 숲에서 바람이 분다 숲에서 쏟아져 나온 책들이 왼발 오른발 달려간다 책 속에서 나온 활자들은 활자끼리 지치지 않고 달려간다 책 속에서 나온 모국어는 모국어 소리 다듬으며 달려간다 잘 보면 문화의 편대로 달려가고 역사의 편대로 달려가며 개방의 소리를 낸다 출판의 집은 출판의 집끼리 신간의 집은 신간의 집끼리 새로운 목소리 내며 제 음색 굴리며 골목을 만들고 달려간다 달려가다 힘에 부치는 것들은 지름길 다리를 건너가는데 어떤 것들은 다산교에서 다산의 등에 업혀 달려간다 어떤 것들은 소월교에서 전통의 등에 업혀 달려간다 힘이 더 부치는 것들은 안중근 의사 응칠교를 골라 지혜와 맹의 주머니 탈탈 털며 달려간다 입 안에 돋는 가시, 살살 밀어내며 녹여내며 달려간다 -전문- ▶노..

나는 바람이었노라/ 신호현

나는 바람이었노라 해상왕 장보고 신호현 나는 동방에 부는 바람 작은 나라 땅끝마을에서 일어 세계 태풍으로 솟구쳐 올랐으니 높새바람 몰아 광해光海를 달렸노라 팽팽한 활시위 떠나 백안白眼의 늪 어둠 뚫었노라 빛나는 별 굳은 어깨에 달고 광활한 땅 구름 거느리며 달렸노라 가는 곳이 길 되었노라 너른 바다 울벽 없이 달렸노라 도둑 같은 매 떼 어지러이 날아 어린 닭 몰아채는 날개 꺾었노라 천이백 계곡 거슬러 올라 태산泰山의 높은 기상 휘돌아 꿈꾸는 이의 가슴으로 휘몰아쳤노니 나는 해상왕 장보고張保皐니라 -전문- ◈ 신라인 장보고는 중국 산동지방에 가서 당나라 무령군 소장이 되고, 신라 흥덕왕으로부터 청해진 대사로 임명받아 남해안에 들끓었던 해적을 소탕하고 해외 무역을 선도하여 일본은 물론 아라비아까지 무역의 폭..

저만큼/ 안수환

저만큼 안수환 물비늘을 일으키는 것은 물살이 아니라 햇빛이다 지금껏 날 매만지는 당신의 눈빛, 웬일로 바람이 이는고 오늘 하루 고달픈 보폭을 건너서 저만큼 떠나가는 것들 빈틈 없는 축복들 -전문(p. 59) --------------------------- * 『월간문학』 2023-10월(656)호 에서 * 안수환/ 1976년『문학과 지성』으로 등단, 시집『냉이꽃 집합』 외, 시론집『주역시학』외

물수제비/ 최호빈

물수제비 최호빈 답이 없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진 사람처럼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첫 번째 돌이 꿈 저편으로 건너간다 나는 나의 낮과 밤에 갇혀 있다 희망을 떠올린다는 것이 무겁게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낮에 밤이 깃드는 것처럼 밤에 낮이 깃드는 것처럼 두 번째 돌이 꿈 저편으로 건너간다 흙이 자라는 화분이 늘어 가면서 나만의 정원이 가꾸어지고 있다 나의 정원에 들어서지 못한 숲은 내 발밑에 깔려 있다 발자국은 내가 숲과 나눈 조용한 대화 세 번째 돌이 꿈 저편으로 건너간다 소리 없이 반짝이기만 하는 꿈결 내가 듣지 못하는 소리를 우렁차게 내며 반짝이는 꿈결 꿈 저편에서 돌 하나가 건너온다 너의 꿈에 머물러도 될까라고 묻는 돌 하나 내 꿈에 누가 또 있는 걸까 꿈 저편에서 돌 하나가 건너왔다 너의 꿈에 머..

고봉준_인류세 시학/ 세포들 : 나희덕

세포들 나희덕 린 마굴리스는 말했지 진화의 가지런한 가지는 없다고 가지런한 가지는 생명의 궤적이 아니라고 한 번도 질서 정연한 적 없는 생명, 생명의 덩굴은 어디로 뻗어 갈지 알 수 없어 그야말로 소용돌이 칼 세이건은 말했지 우리는 아주 오래전 별 부스러기들로 이루어졌다고 빅뱅에서 만들어진 수소와 헬륨, 그 원소들로부터 왔다고 우리 몸에는 인간 세포 수보다 박테리아 수가 좀 더 많다지 물론 우리와 평생 함께하는 세포는 없어 길어야 칠 년이면 사라지니까 그래도 세포가 깨끗이 재생된다면 인간은 190년 정도를 살 수 있다고 하던데 근육과 혈관 속의 세포들은 매일 조금씩 사라지거나 생겨나는 중 대체 무엇을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방금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간 사람, 그를 돌아보는 동안에도 세포 몇 개가 사라졌겠..

사물의 수도원/ 김학중

사물의 수도원 김학중 절벽에 세운 수도원이 있었다 산들과 산들이 이웃하고 있으나 세계의 끝 어딘가 있을 법한 산맥과 산맥을 단절시킨 거대한 암벽에 망루처럼 놓인 수도원 수도원의 이름을 바깥 마을의 사람들은 몰랐기에 가끔씩 아무도 모르게 세상에서 버려진 사물들을 조용히 걷어 가는 수도사들과 마주쳤던 사람들이 사물의 수도원이라 불렀다 어떤 이도 수도원이 언제 어떻게 그곳에 세워졌는지, 수도사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했다 가끔 절벽 아래로 세례의 노래만 들려왔다 수도사들은 버려진 사물들을 축복하며 언어로 세례를 주었다 그 예식 속에서 사물은 물질의 은총을 회복하고 사물에 깊이 깃든 빛깔을 회복하였다 그곳에선 사물만이 아니라 수도사들도 사물의 빛깔이 회복시킨 언어들로 세례받았다 기쁨의 기도는 조용히 절벽 아..

넘어가는 시간/ 서동균

넘어가는 시간 서동균 책장에 시집이 천 권 정도 있다 시인들의 사유가 각자의 길을 내고 있다 연필로 원고지에 썼거나 노트북 자판으로 쓴 그들의 익숙한 흔적이다 층층이 고정되었다가 다시 이동하고 교차하다 부딪혀 멈추기도 한다 7단을 높이고 앵커를 깊게 박고 7단을 더 높인다 매트리스 형태로 호환하는 시간이 넘어간다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위에서 아래로 편광이 비치는 일요일 오후, 햇살이 만든 경로를 따라 일상을 담은 일러스트에 누군가의 재채기 같은 m&m 초콜릿이 구른다 굴절된 지점에서 단단한 이야기로 자란 서사가 새로운 책으로 꽂힌다 -전문(p. 158) ------------------------------ * 『계간 파란』 2023-여름(29)호 에서 * 서동균/ 2011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뉴로..

잎이 가시가 되는 동안/ 전형철

잎이 가시가 되는 동안 전형철 꿈속에 선생을 만났다 담배를 물었다 반가운 나는 선생이 실체인가 다가갔지만 뒷걸음치며 같은 곳을 맴돌았다 몽자와 몽유의 밤을 굴리며 잎이 가시가 되는 동안 잘라 보지 않고는 물이 얼마나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나무선인장처럼 후려갈기는 비바람에 쉽게 멍들고 자주 물렀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쩌면 내가 피하고 피하다 남은 마지막 세상 최선과 집착 사이 한 끗의 줄타기 나는 옆구리에 생긴 푸른 옹이에 주먹을 꼭 쥐어 붙인다 내가 아는 신화의 장자는 모두 죽거나 제구실을 못했는데 담벼락에 피어 있는 불의 미소를, 장미의 주먹을 바라본다 시간의 명세를 감춘 주머니 수없이 구겨진 마른 지화紙花 속에 나는 염한다 미처 준비되지 않은 수난 그것을 태우려는 모든 심지에 불을 붙여 물을 담..

건축된 숲/ 이기현

건축된 숲 이기현 병든 신과 함께 지내던 방에서 우리는 늘 외로웠지 이곳을 변방이라고 부르는 이방인들이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라며 심장을 두고 떠나면 우리는 번갈아 가며 서로의 심장을 새것으로 갈아 끼워주곤 했다 그러면 장은 조금씩 넓어져 구릉지가 되었고 묘목을 심으러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숲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시간이 지나자 동물들이 태어나고 마을이 지어지고 제단이 만들어지고 우리를 보았다는 예언자가 떠돌아다닌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나는 우리가 갈아 끼운 몇 백 무더기의 심장을 묻은 무덤 앞에서 쓸쓸해 보이는 너는 바라봤지 네가 갈아 끼워 준 심장이 여전히 뛰고 있는데도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게 저절로 죽어 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느꼈지 그래서 신과 함께 지내던 방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더는 신..

어스름 창가에 기대어 문득/ 이경우

어스름 창가에 기대어 문득 이경우 어느 날 아침 텃밭에서 만난 벌레 한 마리 가늘고 기다란 생의 두 자침으로 세상을 두드리며 제 식구들 근심 구하러 집을 나선, 온전히 맨발이었던 그 벌레 뻗으면 손 닿을 곳에서 하루 벌어 하루 버티며 혼돈의 이 시대를 견디는 또 다른 내 이웃이라는 생각에 나는 저녁이면 창을 열어 늦었을지 모를 그의 귀갓길을 밝혀 주고는 하였는데 온 세상 한가득 연둣빛 찬란한 이 봄날 저녁 그림자 길어진 내가 자연의 철학자도 아닌 내가 새삼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는 말을 실감하여 일상의 끈 위에서 뛰어내려 카미노 데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고 싶어진다 영원한 줄만 알고 함부로 낭비해 버린 내 삶의 번 아웃에 빠져버린 내가 눈물로 떠났다가 웃으며 돌아온다는 그곳을 향해. -전문(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