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크* 2
이광소
누군가 나를 끌고 가
트렁크 속으로 밀어 넣었다
팔도 다리도 움직일 수 없는 공간
트렁크 속에 갇혀 있어요
고함질러도 아무도 듣는 이 없다
악몽 속에서 발버둥 치며
트렁크를 물어뜯으려 해도
입은 재갈 물려 있고
앞뒤로 움직일 수 없는 비좁은 공간에서
더 이상 일어서려는 마음은 찌그러지고
탈출할 기력은 고무풍선처럼 바람 빠지고
세상 속같이 팽개쳐진 트렁크 속
트렁크 속같이 꽉 막힌 세상
무엇이 서로 다른가라는 의문에 눌려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순간
불빛이 비친다
트렁크 밖 한 줄기 빛은
내 몸의 오장을 현상하듯 훑어가고
트렁크 밖은 달리는 트럭 소리
이젠 정말 죽는구나, 염병처럼 떨리는데
트렁크가 속도를 내 굴러가기 시작한다
트링박물관에서 박제된 새의 깃털들을 훔친 에드윈 리스트는 정체가 드러날 때까지 왕립음악원에서 플루트를 연주했다는데*
선의를 가장하기 위해 거짓말에 속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면서 겨우 목숨을 연행해오던 내 삶은
쫓기듯 이미 거덜 나버린 상태
시방 트렁크 속에 있는 나는 위험 덩어리인가, 악의 덩어리인가,
웅크린 채 지나온 시절을 반성하려는 찰나
트르러-엉!
갑자기 트렁크가 멈춰 선 것이다
검색대 앞에서
-전문(p. 98-99)
* 커크 윌리스 존슨의 논픽션 「깃털도둑」에서 차용, 박선영 옮김, 흐름출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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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인』 2023-7월(6)호 <시-움> 에서
* 이광소/ 1965년 문공부 신인예술상 시 부문 & 2017년『미당문학』으로 평론 부문 등단, 시집『약속의 땅, 서울』『모래시계』『개와 늑대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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