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그사이 지나간 것/ 김지율

그사이 지나간 것 김지율 이게 다 살구씨 때문이야 살구를 먹고 살구씨를 심으면 하나의 살구에서 죽고 하나의 살구에서 다시 태어나고 임대문의 현수막이 오후 내내 펄럭인다 어제의얼굴과오늘의얼굴과내일의얼굴들은모두살구를가졌을까 살구를 통째로 냄비에 넣고 졸인다 아니야 실은 아름다운 문장을 기다리는 중이야 동전파스를 붙인 늑골을 으스스 부수고 나온 아무런 확신도 불가능도 없는 오후 그래 이건 사이즈가 너무 크다 그러니까 살구는 리얼리티가 부족하다는 말 냄비에는 냄비보다 더 큰 살구가 언제나 있고 누군가 있던 자리에 살구씨를 묻고 달팽이를 묻고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누군가가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다 -전문(p. 61-62) ------------- * 계간 『P. S』 2023년-가을(3)호 에서 * 김지율/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0/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0 정숙자 꽃나무도 저 태양도 눈감으면 없습니다···만, 당신은 내내 한자리 서 계십니다. 그 여일ᄒᆞᆷ에 우주는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바람결에 파묻은 대지의 피-울음은 어디서 사라지는 이슬일까요? 어찌ᄒᆞ여 살아서. 살아서. 다시 오는 이슬일까요? (1990. 9. 17.) 밟히며 꺾이며 일어서며 그래도 휘어질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문(p. 105) 끝 행(필자 註) "그래서 더 힘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발표 "그래서 더 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퇴고 ------------- * 계간 『P. S』 2023년-가을(3)호 에서 * 정숙자/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공검 & 굴원』『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뿌리 깊은 달』등, 산문집..

노인 3/ 이화은

노인 3 늙어가는 일은 지독한 희극이다 이화은 아군과 적군이 모두 한 몸 안에 산다 원래는 한솥밥을 먹던 한 식구였으나 언제부턴가 좌우로 갈라섰다 내 낭만과 우울과 주량과 일급 기밀문서인 묵은 일기장까지 꿰뚫고 있는 적은 아군보다 훨씬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 요소마다 지뢰를 매설하거나 폭탄을 심어 놓고 결정적인 한 방을 노린다 그에 비해 아군의 숫자는 나날이 줄어들고 병사들은 하루가 다르게 늙어간다 유기농 야채와 비싼 영양제와 신선한 공기와 헛둘 헛둘 군대의 근육을 키우는 데 온 힘을 쏟지만 결국은 패배할 것이다 시간은 적의 편이다 무병장수라는 사자성어 뒤에 숨어 백년고지를 쟁취하는 이도 드물게 있지만 오십보백보다 백년고지는 곧바로 그의 묫자리가 될 것이다 역사가 증인이다 아군과 적군을 좌우에 앉히고..

방문/ 김정수

방문 김정수 저쪽에서 다 울고 왔는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지 땅속의 겨울도 퍼담았는지 파르르 날개를 털어 빤히 숨을 막고 앉아 있었지 노을의 살결에 어둠살 말려들고 발톱으로 방충망 꽉 움켜쥐고 너무 빤하다는 듯 가볍게 날카롭게 부신 눈을 날개로 털어내고 다음도 없이 어느결에 자취를 감추었지 온몸으로 울음 가두어도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전생의 후회도 전달하지 못하는 어둠에 잠긴 바람 불러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의심을 낳아 기르지 남김없이 배 속을 비워 여름밤이 몽땅 쏟아지듯 사납게 울어대는 -전문(p. 36-37) ------------- * 계간 『P. S』 2023년-가을(3)호 에서 * 김정수/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사과의 잠』『홀연, 선잠』『하늘로 가는..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9/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9 정숙자 등갓 하나 추녀에 걸렸습니다. 그 안쪽에 불꽃 ᄒᆞᆫ 송이 켜 주세요. 대문간 나무가 하늘 닿게 자랐는데···, 하늘이여 자칫 늦을 수 있습니다. 끊일 듯 이어지는 벌레 소리가 어둠을 아파합니다. (1990. 9. 10.) 산과 강, 바다와 들, 뭇 짐승과 곤충들 이미 온전한 음색인데, 인간만이 왜 아직도 불충분일까? ‘사람’이라는 제목 앞에선 ᄒᆞ느님도 그리 어려우신가? -전문(p. 104) ------------- * 계간 『P. S』 2023년-가을(3)호 에서 * 정숙자/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공검 & 굴원』『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뿌리 깊은 달』, 산문집『밝은음자리표』『행복음자리표』

포스트잇 사용처/ 김예태

포스트잇 사용처 김예태 네게로 가는 길목을 그린 지도, 그 중심에서 아직 먼 변두리에 너와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문패를 단다 읽고 난 책갈피에서 여전히 눈을 못 뜨는 언어들, 자박자박 물 젖은 발로 건너고 싶은 곳에 징검다리를 놓는다 박제된 나비의 더듬이를 천천히 흔들어 깨우고 싶을 때 죽은 듯이 누워 있던 마른 꽃잎이 부서진 날개로 날아오를 때 옹이 같은 생을 벗겨 통곡으로 얼룩을 닦아내고 싶을 때 해묵은 수첩에서 막 눈을 뜨기 시작하는 꽃잎들의 완만한 걸음을 위해 福字 문양의 금줄을 친다 종아리를 치던 어머니의 언어들이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 떠나간 친구가 남긴 겨울나무의 꽃눈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포장지를 뜯자 손끝에 묻어나는 아픔이 미적미적 뒷걸음질을 칠 때 아프게 기록한 문장들이 여전히 정전停電된..

이슬 세상/ 유재영

이슬 세상 유재영/ 시조시인 이슬들이 모여서 쪽방촌을 이루었다 아침을 물고 온 새 물똥처럼 새하얀 물방울 은빛 사리가 가지런히 눈부신 곳 오늘의 초대 손님 실잠자리, 구름 한 점 터줏대감 소금쟁이, 청개구리, 까마중 조금은 옹색하지만 불평 없이 동거하는 주인도 세를 사는 하늘이 맑은 동네 온 몸을 톡! 던져서 풀잎 발등 적시는 작아서 더 좋은 것, 저 깨끗한 전신공양 -전문(p. 33) --------------------- * 『월간문학』 2023-8월(654)호 中 * 유재영/ 1948년 충남 천안 출생, 1973년 시-박목월 & 시조-이태극 추천으로 문단에 나옴, 시집『한 방울의 피』『지상의 중심이 되어』『고욤꽃 떨어지는 소리』『와온의 저녁』, 한국 대표 명시선 100『변성기의 아침』『구름 농사』,..

허공에 빠진 적 있다/ 최양숙

허공에 빠진 적 있다 최양숙 돌아갈 모든 길이 눈앞에서 사라진다 바닷가 기슭에서 보았던 갈매기처럼 던져준 먹이만 기다릴 뿐 날고 싶지 않았다 오래된 물 냄새와 가지에 걸린 두레박 그늘과 그늘의 경계가 무너지고 머리 위 지상의 소리 바람은 돌려보낸다 출구를 찾지 못해 나는 점점 허물어진다 더 깊은 동굴이 되고 이끼기 되어간다 슬픔이 달아날까 봐 가끔은 벽을 친다 -전문(p. 175) --------------------- * 『상상인』 2023-1월(5)호 에서 * 최양숙/ 1999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시조집『활짝, 피었습니다』『새, 허공을 뚫다』

아껴 접는 밤/ 김나비

아껴 접는 밤 김나비 명치에 접어둔 말들이 불쑥 울대를 타고 올라오듯 접은 날들이 자꾸만 펴지는 밤이면 나는 색종이를 접어요 대문 접기*부터 시작해요 꾹꾹 눌러 접을 때마다 펼 수 없는 몸 가진 영혼을 생각해요 삐거덕 누군가 문을 열고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는 소리가 들려요 접은 것들은 모두 단단해요 펼쳤을 땐 깃털 같고 난로 같은 것들이 접고 나면 차갑게 뼈에 박히죠 빗물을 받아내다 접은 우산도 숨을 접은 당신의 몸도 마른 들깨 줄기 같은 손가락에 맥박 줄을 달고 검게 늘어진 밤 심박 그래프 파리하게 멈출 때 세상을 접고 돌이 된 숨 다르촉처럼 펄럭이는 오동나무 아래 접힌 숨을 심고 물을 줘요 언제부터 익혔을까요 숨 접는 법을 기억을 아껴 접다가 접히지 않는 시간은 어둠 속에 묻기로 해요 밤새 접은 파란..

잇달아, / 이도훈

잇달아, 이도훈 잇다른 골목들이 길가를 따라 매달려있다. 그 길이와 길이 사이에서 쉰 적이 있었을까 혹사당한 적이 많았을까 어떤 소리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들을 순 없었다. 시골집 뒷산에 뻐꾸기 소리가 그랬고 무덥던 여름 장맛비 소리가 그랬다. 세상의 존재들이 다 잇달아 움직이고 지구의 골목에는 달과 태양, 아침과 저녁들이 태엽처럼 매달려있다. 알고 보면 지구도 마냥 도는 것이 아니라 잇달아 돌고 돈다. 아직도 커지고 있어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잇달아 진행되는 틈틈이 우리는 쉬고 자고 일하고 죽고 태어난다 잇달아 가는 소리와 잇달아 오는 소리가 겹쳐질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잠깐 끊어진 듯한 위안으로 침묵했다. 서른 살이라면 서른 번의 틈을 지나왔다는 것이다. 오늘처럼 찬바람이 매섭게 불던 날이면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