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사람정거장/ 진혜진

사람정거장 진혜진 새벽 종소리로 물든 몸의 정거장에서 한 사람의 여름이 사라지고 있다 한 올만 툭 잡아당겨도 스스로 흩어져 버리는 환幻일지라도 더 이상 비뚤어지는 계절이 없을 때까지 서로의 목적지가 될 때까지 모든 결말을 끌어안았지만 푸르스름한 빛 속으로 사라지고 한 사람이 두고 간 시간이 그림자로 남아 지나가는 모든 발자국을 견딘다 어깨 너머의 꿈은 당신 밖으로 나오지 않은 연민이거나 멈추지 않고 지나간 연인의 이름이거나 의문이 많은 내일의 그림자 누구의 혀가 새벽의 체온을 더듬었을까 싱싱한 죄목들이 토해진 거리마다 팔딱거리는 그늘들 쓸만한 게 없어 함부로 던지는 눈빛을 밟고도 몰리는 무관심 사라지기 전 무엇을 하였는지 버려진 이름이 몇 개였는지 지켜봄이 사라질 때까지 당신을 통과해야 하는 것을 누구도..

어느 전미래의 문서▼/ 이룬

어느 전미래의 문서▼ 이룬 목소리가 들립니다. 멀고 먼 훗날 그러니까 약 수억 광년 뒤 은하계의 지각 변동이 있고, 주피터의 어느 위성에서 한 생명체가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가스와 얼음으로 뒤덮인 캄캄한 행성이 돌고 돌면서 구름에 휩싸인 핏덩이가 첫 호흡을 토할 예정이라는 가설, 새로운 태양계가 형성될 즈음 결코 눈이 내리지 않으리라는 예측은 맞지 않았습니나. 폭설로 거대한 주피터의 위성 칼리스토가 빙하의 왕국이 되고, 서로를 찾는 메아리마저 얼어붙어 서로는 미아가 되었습니다. 미래 인류는 우주 성간에서 떨어진 운석을 나침반으로 삼고, 스노모빌 타고 얼음동굴 따라 지리 탐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빙하의 눈꽃이 어떻게 탄생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충분히 뜨거웠지만 빙하가 온도를 낮추었고, 성..

문병 다니는 일/ 민왕기

문병 다니는 일▼ 민왕기 요즘 뭐 하며 지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저 문병 다닌다고 한다 병이 온 첫날엔 참이슬 서른 잔으로 안부를 물었고 일주일 되던 날엔 맥주 두 병으로 문안을 했다 달포가 지났을 땐 맥주 서너 병으로 인사를 다녀오고 무슨 병인지 모를 만큼 시일이 지났을 땐 술 석 잔 붓고 말았지만 오랜 병을 구하려는 일도 줄어 가끔 맥주 한 병 사다가 입술에 닿는 거품들을 후루룩 소리내어 들이켜 보기도 한다 사람 만나러 가는 길이 이제 다 지인들 문병 가는 일이다 아파 보이는 사람이나 아파 보이지 않는 사람들 모두 소주나 막걸리 같은 것을 놓고 앉아서 제 속에 술 털어 넣는일 그저 산책하러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밥 한 번 먹자는 말도 모르는 병을 서로 조용히 묻자는 이야기다 -전문(p. ..

목 좋은 곳에 집을 얻어서/ 민왕기

목 좋은 곳에 집을 얻어서 민왕기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내 창문 아래로 우는 사람들이 온다 분노로도 안 되고 자책으로도 안 될 때 그렇다고 죽지도 못할 때 소리치기 좋은 자리를 골라 많은 말을 하고 간다 나는 다 듣는다 본디 내 말이었던 혀가 꼬인 말들을 매번 다른 사람이 오는 데 매번 비숫한 말을 하고 처음엔 화내다가 나중엔 모두 울고 간다 애인은 슬픈 일이라고 하지만 저 말들에 나를 섞어 떠나보내는 거 목 좋은 곳에 집을 얻어 일주일에 한 번은 속으로 같이 소리치곤 한다 생계와 관계와 사랑이 저를 치고 갔을 때 술 취한 마음은 또 얼마나 용기 있는 것이었나 품위를 말하는 사람이 싫고 위선이 보이는 사람이 싫고 오직 저런 난동 위에서 뼈다귀만 남은 마음만이 가여운 구원을 얻는다 울기 편한 귀퉁이에 ..

국수(掬水)/ 이은화

국수掬水 이은화 달을 품고 걸어본 적이 있다 달의 면은 늘 붉은 이유로 생각은 자주 충혈 되었다 사는 동안 안전한 직장과 꽃밭과 아늑한 방을 가져본 적 없는 세월 속 사소한 기쁨마저도 불안한 안개로 내려앉았다 우리라고 믿던 이들은 여러 얼굴을 가진 이유로 웃음과 돈 뒤로 숨곤 했다 늦은 깨달음을 다독이면 달의 면이 쉽게 붉어졌다 함께 걸었으나 혼자 남은 안개 숲 명치 끝 멍울을 풀기 위해 절창을 피우던 계절을 품은 적이 있다 움켜쥐려던 물들은 빠져나가고 몸 안에는 뭉클한 달들만 떠 있어 가끔 회전문에 갇혀 사라질 때가 있다 -전문(p. 104-105) ------------------ * 『시사사』 2023-여름(114)호 에서 * 이은화/ 2010년 『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

보호자/ 이기리

보호자 이기리 어느 봄날 정신이 칼날에 박혀 흐물거리고 있을 때 지하철 문이 열리자 객실 한가운데 서 있던 나를 전동 휠체어가 뒤에서 전속력으로 박아 두 무릎이 완전히 접히며 쓰러졌다 외투에는 먼지가 잔뜩 묻었고 쓰고 있던 안경도 절반쯤 벗겨져 한쪽은 흐릿하고 한쪽은 분명했다 극도로 불쾌해진 나는 뒤돌아보며 그에게 무슨 짓이냐고 말을 쏘아붙였으나 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침묵으로 이 상황을 무마하려는 듯한 태도가 더욱 괘씸해서 당장 사과하라고 말을 이어나갈수록 그는 더 깊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고 이내 입꼬리를 내리며 고개를 숙였고 휠체어 손잡이를 잡은 두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짓는 불쌍한 표정과 내가 높인 언성을 번갈아 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보아 나를 무슨 흡사 약..

영일(寧日)/ 홍경나

영일寧日 홍경나 사수자리 오그라진 등을 더 옹송그리고 삐주룩이 몇 올 터럭만 남은 눈썹 참 난처한 사수자리 예순여덟 당신을 떠올립니다 레토로트카레 일 인분을 데워 저녁을 차렸는데 당신이 가만하게 건너편 의자를 당겨 앉습니다 담장 아래 색을 엎지르는 샐비어 쇠한 그림자 같은 당신을 마주합니다 버릇대로 머그잔에 생수를 따라 건네며 "그러엄 나는 잘 지내지" 하고 대답하고 맙니다 기척 찌르레기 한 마리 무심히 날아왔다가 날아가는 아침마다 한참을 앉았다 날아가는 빈 가지가 2022년 12월 24년 떼어 낸 벽걸이 달력이 있던 흰 자리 같습니다 꼭 떠난 당신 자리 같다고 혼잣말을 합니다 속수무책 "세상에나 잘 지내고 있는 거지", 기어이 묻고 맙니다 냄비 밥이 마침맞게 뜸이 들고 은행나무가 말 붙여 올 듯 우두둑..

소양강/ 함명춘

소양강 함명춘 강이 흐른다, 바다로가 아니라 누군가의 가슴에 안기기 위하여 안겨서 깊이 박힌 못을 뽑아주고 지워지지 않는 못 자국을 씻겨주기 위하여 강줄기는 그 기나긴 여정의 발자국이다 한 번이라도 가슴에 금 간 적 있었던 사람들이 염소 무리처럼 강가에 모여든다 두 귀를 지나 가슴속까지 범람하는 강물을 안고, 어떤 이는 침묵 속에 자신을 놓아두거나 강둑을 따라 정처 없이 걸으며 진정으로 아파 본 자는 안다 구름을 헤집고 나온 사소한 한 줄기 빛도 시들은 꽃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발바닥에 잡힌 물집을 터뜨리며 이 순간만큼은 누군가에게 한 줄기 빛인 강이 흐른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그 누군가의 가슴에 안기지 못한 강물만이 바다로 흘러간다 -전문(p. 72-73) ------------------..

냉담/ 길상호

냉담 길상호 달이 얼어붙어 금이 간 뒤로 어떤 연락도 닿지 않았습니다 겨울이 더 두꺼워져 어제의 내게도 성에가 피고 한 방울 한 방울 깊어지는 웅덩이 볼륨을 줄여 밤새 쓸쓸한 음악을 틀어 놓았습니다 귀신과 키스를 나누고 나서 하루 정도 더 버틸 용기를 얻었습니다 창문도 커튼도 모두 입을 닫은 이 방의 고요를 사랑합니다 멀리멀리 퍼져가는 웅덩이 기습 한파가 닥칠 예정이니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놓으랍니다 혀 위에 굴리던 딱딱한 노래는 다 녹아 사라지기 직전입니다 똑똑독 또독, 끝도 없이 이어지는 노크 더 차가운 바람이 불어올까 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전문(p. 374-375) / 반년간 『상상인』(2023. 01) -------------------------- * 『아토포스』 2023-여름(2)호 < 20..

이별의 미학/ 강순

이별의 미학 강순 아무것에나 이별 인사를 하는 습관이 생겼다 빠진 머리카락이나 잘못 쓴 편지지와 헤어질 때 안녕, 안녕, 이라고 말하며 쓸모없이 쓸쓸한 등을 아무 때나 내보인다 사라지거나 남겨지는 것들은 절벽 같은 침묵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차가운 밤이 모래처럼 차곡차곡 쌓여간다 연락 없는 무심한 이들에게 안녕, 안녕, 혼자 중얼거리며 안녕을 접어서 어둠에 던지는 일은 어제의 낭만을 남몰래 해촉하는 일 이해할 수 없는 어둠을 받아들여 생채기 있는 이별에도 익숙해질 때 망각의 망토를 허공에 날리며 검은 구름을 뜯어 맛보는 웃는 마녀로 변신해야지 미문美文만 골라잡는 긴 손톱을 들어 버린 안녕을 주워 입맞춤하며 안녕, 안녕, 쾌활한 노래를 반복해야지 흙먼지 이는 계절이 오기 전에 이별 폭풍을 막을 수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