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파트의 글 237

최종고_세계문학 속의『한국전쟁』中/ 마거리트 히긴스

06 마거리트 히긴스 - Marguerite Higgins, 1920-1966, 46세 『자유를 위한 희생 War in Korea』(1951)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 기자로 한국전쟁 발발 이틀 후에 한국전선으로 건너와 직접 현장취재를 하고, 이듬해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1951)이란 책을 내어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 책은 소설은 아니지만 소설 이상의 현장감이 넘치는 명작이다. 앙투아네트 메이(Antoinette May)가 그녀에 대해 쓴 전기 『전쟁의 목격자(Witness to War』(1983)도 2019년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다. 마거리트 히긴스는 1920년 9월 2일 홍콩에서 출생했다. 그녀의 아버지 로렌스 ..

권성훈_민족의 가락에 불교를 싣다(발췌)/ 대구여사 <혈죽가>

대구여사 「혈죽가」 -⟪대한매일신보⟫ 1906. 7. 21. 협실에 솟은 대는 충정공 혈적이라 우로를 불식하고 방 중에 푸른 뜻은 지금의 위국충심을 진각셰계 하고자 충정의 굳은 절개 피를 맺어 대가 되어 누상의 홀로 솟아 만민을 경동키는 인생의 비여 잡쵸키로 독야청청 하리라 충정공 곧은 절개 포은 선생 우회로다 적교에 솟은 대도 선죽이라 유전커든 하물며 방 중에 난 대야 일러 무삼 하리오 -전문- ▶ 민족의 가락에 불교를 싣다_현대시조의 태동기와 개척기(발췌) _ 권성훈/ 문학평론가, 경기대 국문과 교수 1. 현대시조의 출발과 시대정신// 최초의 현대시조는 1906년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대구여사大丘女史의 「혈죽가血竹歌」다.1) 「혈죽가」는 개화기 이후 최초의 활자 언어로 거듭난 근대 이행기의 산물이..

이철경 평론집『심해를 유영하는 시어』中/ 버찌의 저녁 : 고영민

버찌의 저녁 고영민 그때 허공을 들어 올렸던 흰 꽃들은 얼마나 찬란했던가 꺼지기 전 잠깐 더 밝은 빛을 내고 사라지는 촛불처럼 이제 흰 꽃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그 자리에 검은 버찌가 달려 있을 뿐이다 가장 환한 것은 가장 어두운 것의 속셈, 버찌는 몸속에 검은 피를 담고 둥근 창문을 걸어잠근 채 잎새 사이에 숨어 있다 어떤 이는 이 나무 아래에서 미루었던 사랑을 고백하고 어떤 이는 날리는 꽃잎을 어깨로 받으며 폐지를 묶은 손수레와 함께 나무 아래를 천천히 걸었을 터, 누구도 이젠 저 열매의 전생이 눈부신 흰 꽃이었음을 짐작하지 못한다 지났기에 모든 전생은 다 아름다운 건가 하지만 한때 사랑의 이유였던 것이 어느 순간 이별의 이유가 되고 마는 것처럼 찬란을 뒤로한 채 꽃은 다시 어둠에서 시작해야 ..

정복선 평론집『호모 노마드의 시적 모험』中/ 귓속말 : 허문영

귓속말 허문영 가죽으로 남은 짐승이 울고 있다 얼마나 매를 맞았는지 온몸에 핏발이 섰다 한쪽 살점은 헤지고 다른 쪽 살결은 찢어졌다 말과 소와 염소와 노루와 개 같은 짐승들과 함께 함께 울던 오동나무 가락도 끊어졌다 되바라진 소리를 다스리던 북채도 사라졌고 약을 올리듯 변죽을 울려주던 고수鼓手도 보이지 않는다 흥을 돋궈주던 신들린 소리는 떠나갔다 누군가의 손바닥도 떠나버린 북 소리를 내지 못하고 바람결에 울기만 한다 쓰레기통 옆에 나뒹구는 두 개의 북 오랫동안 장단을 맞추었을 사랑하던 사이인 것 같아 나도 모르게 트렁크에 싣고 말았지만 때가 되면 버려진 듯 그렇게 사라지는 것도 옳은 것이라고 매일 같이 나의 한 복판腹板을 두드리는 그분이 귓속말을 했다. -전문- ▶ 허문영 · 귓속말(발췌)_ 정복선/ 시..

정복선 평론집『호모 노마드의 시적 모험』中/ 경안리에서 : 강민

경안리에서 강민 "이놈의 전쟁 언제나 끝나지. 빨리 끝나야 고향엘 갈 텐데." 때와 땀에 절어 새까만 감발을 풀며 그는 말했다 부풀어 터진 그의 발바닥이 찢어진 이 강산의 슬픔을 말해 주고 있었다 지치고 더럽게 얼룩진 그의 몸에선 어쩌면 그의 두고 온 고향 같은 냄새가 났다 1950년 8월의 경안리 주막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우리는 같은 또래끼리의 하염없는 얘기를 나누었다 적의敵意는 없었다 같은 말을 쓸 수 있다는 행복감마저 있었다 고급중학교에 다니다 강제로 끌려나와 여기까지 왔다는 그, 그에게 나는 또 철없이 말했었다 "북이 쳐내려오니 남으로 달아나는 길"이라고 적의는 없었다 우리는 서로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굶주리고 지친 사람들은 모두 잠이 들고, 우리만 하염없는 얘기로 밤을 밝혔다 그리고 새벽에 그..

황봉구_『부대끼는 멍청이의 에세이』中/ 짐승과 인간 : 황봉구

짐승과 인간(부분) 황봉구 인간은 다른 생명체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 그것은 어설픈 자만이다. 먼 옛날 고생대 시절에 바다에서 태어난 조그만 미물이 뭍으로 기어 나와 여러가지 다양한 류와 종으로 진화했다. 그것의 시작은 삼엽충일 수도 있고,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유기체에 불과한 단세포일 수도 있다. 인간은 짐승들과 동일한 근원에서 나왔다. 영장류는 수천만 년 전에 나타났으며, 인류는 대략 오백만 년 전에 영장류 과科로부터 속(屬Homo)과 종(種Sapiens)으로 가지를 쳤다.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발견된 '루시'는 인류의 조상이다. 루시는 사람(Homo) 속屬에 속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Austraopithecus Afarensis)라 불린다. 이로부터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

황봉구_『부대끼는 멍청이의 에세이』中/ 사람과 인간 : 황봉구

사람과 인간 황봉구 사람이 사람임이 죄일 때가 있다 사람임이 괜스레 미안하다 이 세상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만 인간도 있다 사람은 인간이지만 인간은 사람이 아니다 '개 같은 인간' 쓰레기 같은 인간' 인간은 본디 짐승이지만 짐승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개새끼가 아니다 인간은 쓰레기도 아니다 인간은 사람이어야 한다 사람은 인간이어야 한다 사람은 짐승이 아니고 인간인데도 '이 인간아' 인간은 사람을 짐승인 양 쳐다본다 그때이다 인간임이 그리고 사람임이 마냥 죄스럽기만 하다 -전문, 시집 『생선가게를 주제로 한 두 개의 변주』(동학사. 2001) ▣ 짐승과 인간> 한 문장: 갑작스레 짐승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나는 사람이니까 짐승이 아니다. 그런데도 짐승 생각이 자꾸 난다. 내가 짐승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

김윤정_비평집『21세기 한국시의 표정』에서/ 정의공주연산군 : 신원철

정의공주연산군 김윤정 방학동 산길 해 잘 드는 언덕 세종임금의 둘째 딸이 잠들어 있고 길 건너 아래쪽 그늘진 곳에 연산군이 누워 있다 해동성군의 총명하던 딸과 해동패륜 혼군이 지척에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왕궁은 금빛 가시울타리 구석구석에서 차가운 눈길을 받았던 연산과 푸짐한 아버지의 사랑에 싸여 만인이 따뜻한 눈길을 받았던 공주, 죽어서도 따뜻한 언덕을 차지한 할머니 공주와 죽어서도 응달에 손가락질받는 폐군, 오늘도 인자한 할머니가 버릇없는 손자를 달래는 소리 불뚝 툭툭! 오냐 오냐 그래! 무덤 위 잔디로 돋아나고 있다. -전문- ▶일상성의 초월을 통한 웃음의 시적 공간(발췌)_ 김윤정/ 문학평론가 '해동성군의 총명한 딸'이므로 '만인의 따뜻한 눈길을 받았던 공주'와 '행동패륜의 혼군'으로 '죽..

김윤정_비평집『21세기 한국시의 표정』에서/ 책과 공 : 박형준

책과 공 박형준 밤에 강변에 나오면 만나는 사람 세 시를 새벽이라고 해야 되나 한밤중이라고 해야 하나 사람들이 산책을 나오기에는 어중간한 시간 오늘도 여전히 사내는 가로등 밑에 서서 책을 읽는다 나는 가방에 글러브와 야구공을 챙겨 넣고 강변으로 나와 가로등 밑 책 읽는 사내를 지나 고가도로 아래 교각에 가서 공을 던진다 고가도로 위로 차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속도가 나지 않는 공을 교각의 벽을 향해 던진다 밤 세 시에 가로등 불빛 아래서 사내가 읽는 책에는 아직 이 세상에 나오지 않은 완벽한 문장이 있을 것 같다 승수보다 패수가 많은 사회인야구 패전처리 투수도 밤 세 시에 교각의 벽을 마주하고 있으면 어떤 타자도 칠 수 없는 이 세상 단 하나의 공을 던질 수 있을 것 같다 -전문- ▶물화된 ..

이숭원_비평집 『탐미의 윤리』에서/ 슬픈 등뼈 : 김윤배

슬픈 등뼈 김윤배 가이드는 사파리를 안내하며 읊조리듯 말한다 아프리카 남부 오지로 들어가면 불륜을 저지른 남녀를 말에 매달아 달리게 하는 형벌이 있습니다 추장이 지휘하고 부족 모두가 이 극형 장면을 보게 됩니다 모든 정염이 잿빛으로 변한다는 걸 알았다하더라도 달빛을 꺾었을 남녀입니다 정오가 되면 남녀를 묶어 말에 매답니다 궁사는 말 엉덩이에 화살을 쏩니다 말이 놀라 뛰기 시작합니다 말은 밤이 되어서야 마을로 돌아옵니다 돌아온 말의 로프에는 남녀의 등뼈가 매달려 있습니다 밀림은 검게 빛나고 별들 광활한 어둠 속으로 숨습니다 달빛은 등뼈를 희미하게 비춥니다 등뼈에는 안타까운 비명, 푸르게 빛납니다. 무거운 적막 흐릅니다 훼절되는 관절의 어느 지점에서 서로의 눈빛을 잃고, 목소리를 잃었는지 -전문- ▶ 역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