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파트의 글 237

시적 지형과 의제의 다양한 분기(分岐)/ 유성호

시적 지형과 의제의 다양한 분기分岐 유성호/ 문학평론가 1. 문학사의 낯익은 재등장 흐름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끝없는 대화라고 정의한 이는 카(E. H. Carr)다. 이러한 비유적 명명에는 현재의 어떤 흐름이나 국면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데 지난 시간의 그것들이 유력한 참조항이 될 수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인간 역사에서 파천황의 신국면이 전개되는 일은 거의 없다. 다만 그것은 과거에 출현한 어떤 사건이나 현상이, 나선형이건 직선형이건 순환형이건, 일정하게 변형을 치른 채 다시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면 기시감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러한 재등장의 느낌은 그만큼 역사가 이미 있었던 것들이 일정하게 '반복 속의 차이'를 통해 생성되고 재현되는 현장임을 알려 준다. 때만 되..

김지율 연구서『문학의 헤테로토피아는 어떻게 기억되는가』/ 발췌 셋

『문학의 헤테로토피아는 어떻게 기억되는가』 / 발췌 셋 김지율 인간과 공간 그리고 문학(부분) 문학은 작품이 만들어지고 탄생되는 하나의 시발점으로 공간과 장소는 작품 속 주체의 의도나 상상과 같은 경험의 총체성이 드러나는 곳이다. 이러한 공간은 현실적인 공간에서 출발하지만 실제적인 장소와 구분되며 허구적 공간과도 다르다. 즉 체험의 실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주체의 경험에 따라 달라지는 인식의 공간으로 작가의 상상이나 시적 사유 그리고 독자의 경험적 공간이 서로 만나는 자리이다. 그런 지점에서 시작詩作을 비롯한 문학 창작은 사회적 경험을 통해 원초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주어진 공간을 '특별한 장소'로 맥락화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p. 23) 젠더 공간으로서의 여성의 몸(부분) 푸코는 몸을 하나의..

박이도_육필 서명본에 담은 시담『내가 받은 특별한 선물』/ 프란츠 카프카 : 오규원

프란츠 카프가 오규원(1941-2007, 66세) MENU 샤를 보들레르 800 칼 샌드버그 800 프란츠 카프카 800 이브 본느프와 1,000 에리카 종 1,000 가스통 바슐라르 1,200 이하브 핫산 1,200 제레미 리프킨 1,200 위르겐 하버마스 1,200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전문- ▣ 허무주의자 오규원의 시적詩的 패러디/ 30년 만에 뜯어본 연하장(발췌) _박이도/ 시인 이 시는 포스트모던한 실험 시이다. 산업사회로 치달리던 1970년대 이후의 세태를 패러디한 것이다. 독자에 따라서는 "이것도 시인가? 작위적으로 만든 메뉴판을 복사해 놓고 한 줄 낙서를 단 것에 불과한데···. "라고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다. 독자가 읽어온 서정시의..

박이도_육필 서명본에 담은 시담『내가 받은 특별한 선물』/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의 기도 김현승(1913-1975, 62세)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이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전문, (『문학예술』, 1956. 11) ▣ 차돌같이 단단하고 이슬같이 투명한 영혼의 숨결/ 모국어로 고독의 끝을 풀어낸 시인 김현승(발췌) _박이도/ 시인 20세기 최고의 서정시인이라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독일어를 쓰는 시인이다. 그와 비견할 수 있는 김현승은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동방의 위대한 서정시인이..

박찬일 학술서『정당화의 철학』'삶은 오로지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

박찬일 학술서_ 『정당화의 철학』 / 발췌 부분들 ② - 니체 『비극의 탄생』 * '삶은 오로지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 (p. 287) * 소크라테스의 죽음에서 『변명』, 『크리톤』, 『파이돈』에서, 특히 『변명』에서 비극적 죽음을 본 것은 벤야민이다. 비극적 죽음인 것은 '의무로서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국가 법, 즉 국가 신학에 의한 죽음을 포함한다. 시민 신학 국가 신학은 국가를 절대시하는 것으로서 형이상학과 무관하다. 구제와 관계하지 않기 때문에 형이상학이 없다. 이건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완전한 죽음'에서 그렇다고 완전히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를 위한 죽음은 무지막지한 인간 윤리학의 한 부분으로 고려될 수 있다. 기독교를 위한 죽음, 즉 순교의 유비로 볼 수 있..

박찬일 학술서『정당화의 철학』"인생의 정당화가 정당화 철학의 핵심 내용이다"

박찬일 학술서_ 『정당화의 철학』 / 발췌 부분들 ① - 니체 『비극의 탄생』 * 인생의 정당화가 정당화 철학의 핵심 내용이다. (p. 8) * 인생의 정당화가 정당화 철학의 핵심 내용이다. 니체의, 미적 자유로서의 정당화 예술은 '올림포스 신神들로 하여금 인간의 삶을 살게 하면서 인간의 삶을 정당화한다'는 격률에서 확인되듯, 정당화 예술에서 정당화의 철학으로 전진한다. 호메로스 서사시의 올림포스 신들이, 그리스 '전성기 비극'의 올림포스 신들이, 비극의 '아폴론 무대[ 비극적 신화]'의 주인공들이, 인간의 삶을 살면서 인간의 삶을 정당화시킨다. 오이디푸스의 고난이 인간의 삶을 정당화시키고,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이 인간의 삶을 정당화시키고, '아트레우스[아가멤논 오레스테스] 가문의 저주'가 인간의 삶을 정..

양수덕_단편집 『눈 숲으로의 초대』/ 눈사람 엄마(부분)

눈사람 엄마(부분) 양수덕/ 시인 할머니와 아이는 추운 산골에서 눈사람과 한 가족처럼 지냈다. 아이는 눈만 뜨면 눈사람 엄마 옆에 가서 놀았다. 눈사람 엄마에게 말을 붙이고 아이가 대답을 하는 걸 바라보는 할머니는 마음이 쓰렸지만 해줄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기에 묵묵히지켜보고만 있었다. '아비라도 좀 연락을 하고 살면 좋을 텐데, 돌 벌러 서울로 간다더니 아무 소식도 없고······ 아이고 불쌍한 것, 저 어린 것이 무슨 죄야.' 할머니는 툭하면 속상해서 중얼거리곤 하다가 마지막으로는 크게 한숨을 토해 냈다. '아이고, 명도 짧기도 하지. 시퍼렇게 젊은 것이 저렇게 어린애를 두고 어떻게 가냐고.' 그러면서 연이어 팔자타령을 했다. '이놈의 사나운 팔자······' 어느 추운 날 여느 때처럼 마당에서 ..

양수덕_단편집 『눈 숲으로의 초대』/ 눈 숲으로의 초대(부분)

눈 숲으로의 초대(부분) 양수덕/ 시인 그는 길을 떠나면서 눈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눈은 내릴 때가 가장 좋은 것이다.' 눈은 순간의 미학이라고 생각했다. 눈이 내리는 모습이야말로 더없이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그것이야말로 눈의 축제라고. 회색빛 세상을 지워 새로 탄생한 그 하얀 빛을 마주하는 기쁨을 벅차게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눈 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선명하게 남기는 즐거움도 맘껏 누리고 싶었다. 그는 눈 숲으로 향했다. 내리는 눈에 목말라하고 있을 때 마침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를 위해서 눈들이 하늘 길을 타고 서둘러 내려오는 듯했다. 그는 눈을 맞으며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풍요로움으로 가슴이 벅찼다. 그의 소리 없는 탄성이 허공을 울렸다. 이 장면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

나무는 매미의 집/ 엄창석(소설가)

나무는 매미의 집 엄창석/ 소설가 어딜 바삐 가느라고 급히 차를 몰고 있는데 뒷좌석에 파묻혀 아이스크림을 빨던 애가 발딱 일어나 내 귀에 대고 종알거렸다. 울창한 가로수가 있는 길이었다. "아빠 조심, 나무는 매미의 집이야." 액셀레이터에서 발을 떼고 애의 말을 곱씹었다. 차가 가로수에 부딪히면 사람이 다치는 게 아니라 매미가 나무에서 떨어진다니! 아이의 말엔 쉽게 접근하기 힘든, 문명과 생명에 관한 진리가 포함돼 있었다. 놀랍다. 영혼에 육체의 껍질이 두껍게 쌓이기 전에는 우리는 누구나 선지자요, 명상가요, 예언자가 아니었던가. -전문 (p. 24-25) --------------------------- * 『문학과의식』 2022-가을(128)호 에서 * 엄창석/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박상륭 장편소설『죽음의 한 연구』/ 발췌 셋

中 박상륭 장편소설 『죽음의 한 연구』/ 발췌 셋 中 글쎄 나는, 울지는 않았다. 미음을 끓여 소반에 받쳐 왔던, 저 죽은 옌네의 친구가 또한 그녀의 죽음을 알고, 울며 돌아갔다가 다른 친구들과 함께 와서, 곡비哭婢들처럼 울어댔으나, 나는 울지 않았다. 그녀들은, 저 죽은 것을 목욕시키며 그녀에의 추억을 넋두리해댔으나, 난 울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삽과 괭이를 찾아 들어, 그녀가 자기 묘지 삼기를 바랐던 바로 그 자리에, 그 흙을 퍼내기나 시작했다. 나는 울지는 않았다. 그리고 석양이 비꼈는데, 나는 저 싸늘한 것을, 수의도 없이, 알몸인 채 두 팔에 안았다. 그녀의 친구들은 곡비들처럼 무덤 전에 둘러서 있었다. 내 팔 안엔, 이 세상에서 그중 아름다웠던 것 중의 한 개가 안겨 있고, 그 얼굴 위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