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공주연산군
김윤정
방학동 산길 해 잘 드는 언덕
세종임금의 둘째 딸이 잠들어 있고
길 건너 아래쪽 그늘진 곳에 연산군이 누워 있다
해동성군의 총명하던 딸과
해동패륜 혼군이
지척에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왕궁은 금빛 가시울타리
구석구석에서 차가운 눈길을 받았던 연산과
푸짐한 아버지의 사랑에 싸여
만인이 따뜻한 눈길을 받았던 공주,
죽어서도 따뜻한 언덕을 차지한 할머니 공주와
죽어서도 응달에 손가락질받는 폐군,
오늘도 인자한 할머니가 버릇없는 손자를 달래는 소리
불뚝 툭툭!
오냐 오냐 그래!
무덤 위 잔디로 돋아나고 있다.
-전문-
▶일상성의 초월을 통한 웃음의 시적 공간(발췌)_ 김윤정/ 문학평론가
'해동성군의 총명한 딸'이므로 '만인의 따뜻한 눈길을 받았던 공주'와 '행동패륜의 혼군'으로 '죽어서도 응달에 손가락질을 받는 폐군' 사이에는 처지와 조건의 극심한 대립이 있을지라도, '지척에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정겨움이 있다. 오히려 '정의공주'와 '연산군' 사이엔 '인자한 할머니'와 '버릇없는 손자' 간에 성립되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관계가 놓여 있다. '연산군'의 패악은 '정의공주'의 인자함과 온화함에 의해 '달재지'고 순화된다. '정의공주'의 푸짐한 사랑은 연산군의 날선 광기를 부드럽게 잠재우고 누그러뜨리는 요인이 된다. '연산군'의 '불뚝 툭툭'거리는 심사는 '정의공주'의 오냐 오냐 그래!' 하는 넉넉한 마음으로 쉬이 다스려지곤 하는 것이다.
'정의공주'와 '연산군' 간의 이와 같은 관계는 대립하는 조건들이 어떻게 융합과 화해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정의공주'와 '연산군'처럼 일평생 동안 서로 상반된 조건을 짊어졌을 존재들 간에도 그들처럼 조화와 어우러짐이 가능함을 위 시는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위 시에서 알 수 있듯 상호간 사랑과 포용, 온화함과 따뜻함에서 비롯된다. 보다 좋은 조건의 존재가 베푸는 너그러움과 인자함은 악조건 속에 놓인 존재를 감싸주는 구원의 손길에 해당한다. 이러한 마음이 오고갈 때 가능해지는 조화와 화해를 가리켜 위의 시는 '무덤 위에 돋아나는 잔디'라고 표현하고 있거니와 이것이야말로 시인이 일관되게 구해왔던 초월과 승화의 국면에 해당하는 것이라 하겠다. (p. 시 213-214/ 론 216)
■ 『동안』 201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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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정 비평집 『21세기 한국시의 표정』에서/ 2020. 8. 27. <박문사> 펴냄
* 김윤정/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현재 강릉원주대학교 국문과 교수
【주요저서】 김기림과 그의 세계/ 한국모더니즘문학의 지형도/ 언어의 진화를 향한 꿈/ 한국 현대시와 구원의 담론/ 문학비평과 시대정신/ 불확정성의 시학/ 기억을 위한 기록의 비평/ 현국 현대시 사상 연구/ 위상시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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