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파트의 글 237

종점에서_신기료 장수에게/ 정대구

종점에서 -신기료 장수에게 정대구 종점에서 우리는 또 걸어야 한다 돌부리를 걷어차고 진흙벌을 짓이기면서 우리는 또 걸어야 한다. 종점에서 헤지고 망가진 신을 다시 깁는다 신기료 장수는 새 신은 받지 않고 헌 신은 결코 버리지 않는다. 너덜너덜한 헌 신만을 받아서 새것보다 더 튼튼한 신으로 고쳐 놓는다. 그의 할망구는 벌써 죽었지만 헌 마누라를 얻어서 새 마누라처럼 길들여 살듯이 그는 너덜너덜한 헌 신만을 받아서 우선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정성스레 어루만진다. 먼지를 솔질해 털고 대담하게 도려내기도 하고 세심하게 꼬매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왁스를 찍어 바르고 후후 입김을 불어가며 광까지 낸다. 보람까지 불어 넣는다. 이렇게 해서 몇 푼씩 모은 돈으로 그는 그의 두 아들에게 새 신을 신겨 대학까지 보냈다. 나..

정경남_ 양산에서 만난 정대구 교수님/포구나무 : 정대구

포구나무 정대구 시인 정경남 씨 집 앞엔 그녀의 나이만큼 청청한 포구나무 한 그루 서 있고 닻을 내린 그네가 한 척 출렁거리고 있다 곧 먼 바다를 향하여 출범할 듯 시인의 남편 김양옥 씨는 퇴역한 1등 항해사 빗소리 제법 굵어지는 초여름 우산을 받치고 나온 그녀를 태우고 힘차게 그네를 민다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그녀는 꿈꾸듯 시를 쓴다 푸른 하늘 포구나무에 닻을 내리고 -전문- ▶ 양산에서 만난 정대구 교수님(발췌)- 정경남/ 시인 정대구 교수님 들꽃시인선 11번째 시집 『양산일기』 111페이지에 수록된 「포구나무」 시는 저희 부부에 대해 정대구 교수님께서 손수 쓰신 시편입니다. 정대구 교수님과 처음 인연이 된 것은 2001년 양산에 자리 잡고 있는 영산대학교 평생교육원 시창작반 새 학기가 시작..

페르난두 페소아『불안의 서』/ 209 : 배수아 옮김

209 페르난두 페소아 : 배수아 옮김 함께 일하고, 함께 행동하고, 다른 사람들과 늘 함께한다는 것은 형이상학적 시각으로는 병적인 충동에 해당한다. 모든 개인에게 주어진 영혼은 타인들과의 관계로 인해 고통받아서는 안 된다. 존재한다는 신적 사실은, 공존한다는 사탄적 사실에 점령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타인들과 공동으로 행동한다면, 최소한 나는 한 가지를 잃게 된다. 그것은 혼자서 행동하기다. 다른 사람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 건 나를 작게 만드는 것이다. 비록 겉으로는 나를 크게 만드는 행위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함께 산다는 것은 죽는 것이다. 내 자의식만이 나에게는 실제다. 이 자의식 속에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불확실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타인들에게 현실적인 실제를 부여한다는 것은 질..

김건형_인간의 바깥에서 재난을 말하는 방법(발췌)/ 두개골의 안과 밖 : 서이제(소설가)

「두개골의 안과 밖」 서이제/ 소설가 병든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아픈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자주 아픈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시름시름 앓는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체력이 좋지 않은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알을 잘 낳지 못하는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알을 낳지 못하는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살이 잘 찌지 않는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체구가 작은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근육이 너무 많은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날고 싶은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호기심이 많은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고집이 센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질투가 많은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선한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산만한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똑똑한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그리 똑똑..

전영주(필명, 전해수)_1960년대 동인지『산문시대』와 최하림(발췌)

1960년대 동인지 『산문시대』와 최하림(발췌) 전영주(필명: 전해수) 『산문시대』는 1962년 목포에 근거지를 둔 김현, 김승옥, 최하림이 의기투합하여 발행한 동인지였다. 1964년 10월까지 3년간 총 5호로 종간되었으며, 『산문시대』의 표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문학의 산문정신을 표방하며 1960년대 4 ·19세대의 새로운 문학장을 열게 된다. 1호 발간 이후 김치수, 염무웅, 곽광수, 강호무, 김산초, 김성일, 서정인 등 총 10인이 동인으로 합류했으며, 4 ·19 이전의 문단이 기득권 등단작가 중심의 안정적인 문단질서를 토대로 형성되었다면, 이들은 패기로 가득 찬 지방 출신 서울대학교 재학생 신인 중심으로 창간된 것이 특징적이다. 요컨대 『산문시대』는 목포 중심의 지방 출신 대학생 등단자들이 모여..

권성훈_전후의 혼란, 불교로 위로하다(발췌)/ 생부처 : 박병순

생부처 박병순(1917-2008, 91세) 오직 지아비를 위하여 청춘을 고스란히 바쳤다. 아들을 못 낳는다는 죄 아닌 죄로 하여, 산처럼 외로운 고독을 참아 가는 생부처! 단 하나 핏줄인 딸자식을 데불고, 빠끔히 트이는 희망을 의지하여, 어디든 살아 보겠다는 갸륵하다 생부처! 그대 생부처로 야생을 곱게 나서, 저승에 다시 만나 겁을 두고 누리다가, 인간에 되 태어나는 날 엉킴 없이 펴세나 -전문(p. 256-257.)/ 『구름재 시조전집』 가꿈, 1993. ▶전후의 혼란, 불교로 위로하다_1950년대 전후 시조(발췌)_권성훈(시인, 경기대 교수) 박병순의 「생부처」는 살아있는 부처, 즉 생불生佛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시에서는 아들을 낳지 못하는 아내를 표상한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유교 이념이 팽배한..

권성훈_전후의 혼란, 불교로 위로하다(발췌)/ 다보탑 : 김상옥

다보탑 김상옥(1920-2004, 84세) 불꽃이 이리 뛰고 돌조각이 저리 뛰고 밤을 낮을 삼아 정 소리가 요란터니, 불국사 백운교 위에 탑이 솟아오르다. 꽃쟁반 팔모 난간 층층이 고운 모양! 임의 손 간 데마다 돌옷은 새로 피고, 머리엔 푸른 하늘을 받쳐 이고 있도다. -전문(p. 250.)/ 『백자부』 시인생각, 2013. ▶전후의 혼란, 불교로 위로하다_1950년대 전후 시조(발췌)_권성훈(시인, 경기대 교수) 1950년대 이르러 시조시인들은 자유시 시인들과 함께 동인을 결성하고 활동했다. 예를 들면 시동인 '아芽' '맥' '시예술' '양지문학' 등은 자유시 시인과 시조 동인들이 함께 편집한 동인지를 발간했다. 모더니즘의 수용 과정에서 민족의 전통적 가치를 공유한 이들 시조시인과 자유시 시인들은 장..

누가 불가능을 꿈꾸는가(부분)/ 엄경희

누가 불가능을 꿈꾸는가(p.16~19/ 21~22) 엄경희 누가 진정으로 숭고함과 고귀함을 갈망하는가?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미 수없이 많은 이들에 의해 인용되었던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1915)의 서문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 문구가 사람들에게 여전히 깊은 울림을 주는 까닭은 그것이 '잃어버린 시대'를 꿈꾸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구를 이제 "불가능을 꿈꾸었던 시대의 문학은 얼마나 고귀했던가?"로 바꿔 말하고 싶다. 문학 정신은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데서 발흥할 때 그 본령을 사수할 수 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꿈꾸는 정신적 활동은 '지금 여기'와 쟁투하며 솟구치려하는 역능을 뜻한다. 여기에..

전해수 문학평론집『푸자의 언어』(발췌)/ 푸자 : 최애란

푸자 최애란 강가*의 신을 만나러 사이클릭샤를 타고 가트로 간다 해는 이미 떨어졌고 신을 부르는 불의 의식이 한창이다 푸자, 산 자를 위한 힌두 의식이라는 걸 오늘에야 알았다 무심히 흐르고 있는 강가에서 강가가 허락한 강가에서 신을 생각하다 신을 벗었다 홀가분한 그거면 충분하다 그것, 참 좋다 제단 위로 꽃비가 내리고 죽은 자가 스치는 사이 꽃가지, 곱내를 드리우는데 타다 남은 꽃잎을, 두 손으로 받아 낸 아버지 살아남지 못한 나를 강물에 띄우고 있다 -전문- ▶ 바람이 짚고 가는 푸자pooja의 언어(발췌)_전해수/ 문학평론가 최애란 시인에게도 여행 중 '푸자pooja'를 직접 만난 경험은 매우 특별한 일이었을 것이다. 위 시를 보면 시인은 분명 '푸자pooja'를 목도目睹한 것이 틀림없다. 사진을 보..

최종고_세계문학 속의『한국전쟁』中/ 데이비드 핼버스탬

07 데이비드 핼버스탬 David Halberstam, 1943-2007, 64세 『콜디스트 윈터 The Coldest Winter』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 1943-2007, 64세)은 미국의 작가, 언론인, 역사가로 베트남전쟁, 정치, 역사, 민권 운동, 비지니스, 미디어, 미국 문화, 스포츠 저널리즘 등과 관련된 많은 책을 썼다.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 중 한 사람인 그는 1934년 4월 10일 뉴욕에서 태어났다.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후 작은 일간지 기자로 일하다가 ⟪네쉬빌 테네시⟫에서 일했다. 이후 ⟪뉴욕 타임스⟫ 재직 시절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밝히는 보도로 1964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핼버스탬은 민권운동을 취재한 기록인 『아이들(The ch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