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파트의 글 237

등단이 중요한가? 시집이 중요합니다(부분)/ 김언

등단이 중요한가? 시집이 중요합니다(부분) 김언 등단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이들을 배려한 측면도 간과할 수 없는 이 용어에 대해 누군가는 다시 딴지를 걸고 싶을 겁니다. 그래서 미등단이라는 말과는 어떤 실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냐고요. 어감이 조금 달라졌을 뿐 비등단과 미등단, 이 둘을 체감하는 입장에서는 실제로 별다른 차이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괜히 배려하는 척 허울 좋은 용어로만 대체해서 부르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마치 '지방'을 대신하여 '지역'이라는 말로 바꿔 부른다고 해서 서울 중심의 구도에서 소외된 지방의 현실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듯이, 미등단 대신 비등단이라는 용어를 쓴다고 해서 등단하지 않은 이들의 현실적인 여건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 까요? 비등단자든..

배홍배_시에세이『빵 냄새가 나는 음악』/ 음악가들의 마지막 남긴 말

음악가들의 마지막 남긴 말 - J.S. Bach- Come, Sweet Death 배홍배 □ 바흐: 내 죽음을 슬퍼 말아라. 난 음악이 태어난 곳으로 간다. 그의 임종을 지키던 가족들에게 남긴 말이다. (p. 420) □ 하이든: 아이들은 보호받아야 한다. 나는 잘 살았다. 전하는 사람들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하이든이 마지막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말이다. 하인들 집에 대포 탄이 떨어지자 그들을 위로하고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p. 420) □ 모차르트: 죽음의 맛이 입술에서 느껴진다. 이 맛은 세상의 것이 아니다. 죽는 순간에도 천재다운 말이다. (p. 420) □ 베토벤: 애석한 일이다, 아 너무 늦었어. 그가 주문한 와인이 제날짜에 도착하지 않고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은 날 와인을 받..

내 시에 대한 백서(부분)_어떻게 쓰는가/ 오세영

내 시에 대한 백서(부분) 오세영 3. 어떻게 쓰는가 세간의 작용이 발생하는 것은 모두 아집我執에서 생긴다. 자아에의 집착을 제거하면 세간의 작용은 일어나지 않는다. [『화엄경』 제22장「십지품十地品」] 『성경』도 마찬가지이지만, 『경전』에는 여러 좋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중에서도 『화엄경』에 있는 경구를 마음에 새기고 삽니다. 시창작의 본질을 설파해주는 촌철의 비의秘意가 적시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내게 있어서는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출한 것을 시라 믿습니다. 대부분이 그렇게 씁니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의 주체이지요. 주체가 진실하지 못하다면 '생각' 역시 진실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도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하..

날 외 1편/ 김윤

날 외 1편 김윤 지는 해를 보다가 나도 저물다가 주머니에 손 넣으면 조선 칼 하나 있다 날은 닳아서 서러운 아무 것도 베이지 않고 상처는 질겨서 찢겨질 때 내 속에서 누군가 자꾸 사랑이라고 항변할 때 칼에 독이 있다 목숨 바꾸어 베어 낼 무엇이 틀림없이 내게 있었던 거다 날이 제 힘을 다하느라 상했다 이제 벼리지 않을 거다 큰 절 아래 골목에 오래된 대장간이 있어서 젊은 장인이 금방 나온 쇠를 허공에 몇 번이고 세워보면서 흰 날을 일으켜 붙잡는다 칼긑을 담금질하는 치밀한 시간 꽃이 지고 봄이 가고 날 끝에 파랗게 독이 섰다 베어야 할 것들이 문득 다 사라졌다 -전문(p. 16-17) ------------- 순장자 거긴 언제나 밤이어서 그는 울다가 잠이 들었다 귓바퀴 뒤쪽 물렁뼈를 타고 칠흑 같은 슬픔..

김언_'기술창작시대'의 문학과 인공지능(발췌)/ 오래된 집 : 시아(SIA)

오래된 집 시아(SIA) 나는 오래된 집에 산다 생나무를 때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렇게 튼튼한 나무들 사이에서 이제는 주인을 잃어버린 집 나는 나무의 나이테를 세어 보며 시간을 짐작한다 지붕은 비가 새지 않는지 도통 관심이 없다 아버지는 생전에 술을 좋아하셨다 할아버지는 평생 술을 담그셨고 아버지는 평생 술을 받으셨다 나는 아버지가 심어 둔 나무의 가지를 하나씩 흔들어 본다 시간을 알기 위해서는 가지를 아주 많이 펴야 한다 지붕의 이끼는 매년 풍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술을 마시며 아버지는 자주 바람 속에 나무의 나이테가 없다고 노래하셨다 내가 이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이다 겨울엔 누구나 집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집에 살면서부터 나는 점점 집처럼 되어 간다 이 집에 살면서부터 나는 점점 집..

임지훈_독자로서의 비평가, 혹은 비평가로서의 독자(발췌 셋)/ 임지훈

독자로서의 비평가, 혹은 비평가로서의 독자(발췌 셋) 임지훈 비평가는 잘 훈련된 독자이자, 그와 같은 해석상의 난맥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것에 숙달된 존재이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독자로서의 비평가란 작품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일련의 답변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답변은 다만 불완전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품 내에 존재하는 해석상의 난맥에 대한 일종의 불완전한 마개이자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비평가가 던지는 질문은 늘 이와 같은 작품 내의 해석상의 난맥을 향해 있지만, 근원적으로 이 소실점은 일정한 답변에 의해 닫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최인훈의 『광장』과 같은 소설에 있어 명준의 죽음에 대해 일정한 답변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다른 관점을 통해 접근함..

시작 메모, 2018년 4월 15일/ 허수경

시작 메모, 2018년 4월 15일 허수경(1964-2018, 54세) 이 시들은 귤 한 알에서 시작되었다. 암이 재발하고 난 뒤 병원에서 더이상 수술조차 받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온 일주일이 지난 뒤쯤이었다. 오랜 입원도 그랬지만 위암으로 도려낸 위와 커진 종양 때문에 더이상 음식을 마실 수도 먹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인공적인 영양 공급만을 받을 수 있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차피 의사들은 몇 주 몇 달을 버티지 못할 거라고 진단했으나 나 역시 더이상 살아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창으로 바깥을 바라보니 삼월의 눈이 내리고 있었다. 베란다 창틀에 작은 귤이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병원으로 가기 전 무슨 생각인지 귤 한 개를 베란다 창틀 위에 올려둔 모양이었다. 언 귤을 먹..

시작 메모, 2017년 4월 2일/ 허수경

시작 메모, 2017년 4월 2일 허수경(1964-2018, 54세) 봄이 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있다. 올봄이 그랬다. 겨울 동안 그런대로 열심히 잘하고 살았던 것 같은데 무슨 잘못을 하고 벌을 받는 양 봄은 좀체 올 기척이 없었다. 식구 가운데 하나가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였다. 겨울을 그런대로 잘 넘기겠구나 싶었는데 그는 결국 이월 중순에 대학병원에 입원을 하고 말았다. 원래 심장질환 외에도 여러 병이 있어서 아슬아슬하기는 했다. 그리고 겨울 끝자락에 결국 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겼다. 신종 독감 바이러스가 그의 몸에 서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입원한 지 이틀 만에 그는 격리병동으로 옮겨졌다. 그를 방문하려면 감염을 피하기 위해서 마스크와 장갑, 수술하는 의사들이나 입을 법한 일회용 가운을 입어야만 했..

시작 메모, 2014년 3월 30일/ 허수경

시작 메모, 2014년 3월 30일 허수경(1964-2018, 54세) 오늘부터 시작된 여름 시간. 한 시간이 갑자기 사라진 날. 이것은 무슨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 다만 정치적인 결정일 뿐. 아침에 일어나 어제 바깥으로 내놓은 화분들을 보았다. 겨울이 없었으니 이 아이들도 올봄 못다 잔 잠을 계속 잘 것이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은 무엇을 해도 좋을 듯하다. 다들 마당에 나와서 마당 청소를 하거나 새 꽃을 심는다. 나는 이제 세 살이 된 가죽나무에 새순이 나오고 일본에서 온 수국 세 그루가 지난겨울 동안 한 녀석도 죽지 않고 새순을 내는 것을 보았다. 다행이다, 그 어린것들이 다 살아남아서. 내가 사라지고 난 뒤 이 정원을 가꿀 사람은 이 정원에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까. 하긴 그 모두 내 영혼의..

시작 메모, 2011년 12월 21일/ 허수경

시작 메모, 2011년 12월 21일 허수경(1964-2018, 54세) 역이라는 것은 스쳐지나는 곳이 아니다. 역이라는 곳은 스쳐지나온 모든 것을 버리는 곳이다. 저녁이었다. 저 미지의 역에 도착해서 철로를 바라보는 마음은 언젠가 돌아갈 곳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었다. 이 세계에 희망이 없다면 나는 이 세계에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당신에게로 갈 수 없을 거라는, 혹은 당신이 날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모든 낯선 말 앞에서 문장의 슬픔으로 일생을 보내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 일인가. 나는 아직도 사랑할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과 함께 나서야 할 길이 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아프다. 내 잘못이다. 그립다, 당신 말로 하지 못할 슬픔의 강이 가슴속을 지나간다. 그 강에 비친 노을 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