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파트의 글 237

박용래 시인의 직업/ 윤석산(尹錫山)

박용래 시인의 직업      윤석산尹錫山    무슨 말을 하려면 눈물부터 흘리는  울보 시인.  박용래 시인의 딸이 국민학교에 처음 입학을 해서  선생님이 생활기록부를 작성하기 위해  아버지는 뭐 하시는 분이여, 하니   시 쓰는 일을 하셔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우물거리니  뭐여?  뭐?  그럴수록 더욱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생활기록부 아버지 직업란에는  '시를 파는 일'이라고 적혀졌다.  평생을 시 한 편 변변히 팔아보지 못한  박용래 시인의 직업이다.    - 전문(p. 167)   ----------------- *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석산』 '일반 시' 에서/ 2022. 9. 28.  펴냄/ 비매품 * 윤석산尹錫山/ 1947년 서울 출생, 1967년《중앙일보》신춘문예(동시)..

빈자일등(貧者一燈)/ 윤석산(尹錫山)

빈자일등貧者一燈     윤석산尹錫山    난분 옆에는 난만큼의  고요가 있다.  평생을 난같이 살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   하늘의 푸르름 속으로  빈자貧者의 희고 가는 손들이  엿보였다.   한 생애의 늪을 빠져나와  조용히 자리하며,  흩어지는 바람,   난분 옆의,  난만큼의,  고요.      가난하지 않으려는 것은  죄가 아니다.   지상의, 어둠을 견디며  작은 등 하나  오래오래 명멸하고 있다.     -전문(p. 160-161)   ----------------- *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석산』 '일반 시' 에서/ 2022. 9. 28.  펴냄/ 비매품 * 윤석산尹錫山/ 1947년 서울 출생, 1967년《중앙일보》신춘문예(동시) 당선 & 1974년《경향신문》신춘문예(시) 당선,..

익산역/ 윤석산(尹錫山)

익산역     윤석산尹錫山    어둑어둑한 승강대에서 한 사내가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한 십여 분 후면 들어올 서울행 열차, 사내가 말을 걸어온다. "이곳 사람 아니지요. 저는 이곳 사람인디요, 지금은 서울 가 살지요. 고향에 와서 벌초하고 가는 길이지요."  묻지도 않는 말을 한다. "지 형이 이곳 역장을 지냈지요." 그리고는 어두워오는 하늘을 바라본다. "젊을 때 형이 집에 일이 갑자기 생겨 친구와 야간근무를 바꾸었는데, 그날 그만 폭발사고가 났지 뭐예요. 근무를 바꿔준 형 친구는 그날 죽었어요."   멀찍이 어둠 속 서 있는 그 사내. 이승인 듯 저승인 듯, 멀리 환한 불빛 속 서울행 열차 들어오고 있다. 각자 자신의 표에 찍힌 열차를 타고, 우리 모두 저마다의 시간 속으로 떠나갈 것이다. ..

나비/ 윤석산(尹錫山)

나비     윤석산尹錫山    옛날 옛날 아들 하나 얻기를 몹시 바라던 어느 생원댁에서 그만 딸을 낳고 말았지요. 아들이 너무 갖고 싶은 생원님은 딸아이를 어려서부터, 아주 어려서부터 남장을 시켜서 키웠답니다. 남장한 생원댁 딸아이는 이웃집 남자아이와도 아무 흉허물 없이 어울려 놀며 자라났어요. 아이들은 그렇게 놀며 싸우며 정이 들었고,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어가며, 아이들은 더욱 정이 깊어졌습니다.  나이가 들어 여자아이는 집안의 중매로 시집을 가게 됐답니다. 그래서,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아주 아주 정이 깊이 든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에게 자신이 남자가 아닌 여자임을 밝히고 떠날 수뿐이 없었답니다. 상심한 남자아이는 슬프고 슬퍼 몇 날을 슬퍼하다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남자아이의 부모는 슬프고 슬픈 ..

망연히/ 윤석산(尹錫山)

망연히     윤석산尹錫山    엿 좌판 덩그마니 놓고는   초로의 사내  지하철역,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 그 다리 사이에  앉아 있다.   엿 사시오 소리도 못하고  망연히.   삶이란 이리 고단한 것인가.      -전문(p. 32)   ----------------- *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석산』 '짧은 시' 에서/ 2022. 9. 28.  펴냄/ 비매품 * 윤석산尹錫山/ 1947년 서울 출생, 1967년《중앙일보》신춘문예(동시) 당선 & 1974년《경향신문》신춘문예(시) 당선, 시집 『바다 속의 램프』『온달의 꿈』『처용의 노래』『용담 가는 길』『적 · 寂』『밥나이, 잠나이』『나는 지금 운전 중』『절개지』『햇살 기지개』등, 저서『동학교조 수운 최제우』등

10번/ 윤석산(尹錫山)

10번     윤석산尹錫山    우리 형제들이 대기하고 있는 중환자실로 운구 카터가 옮겨져 왔다.  중환자실에서 안치실로,  곧바로 하강하는 엘리베이터를 거쳐, 구불구불 끝날 것 같지 않은 복도를 지나, 우리는 그렇게 따라갔다.  철문은 열리고 닫히고, 벽에 설치된 철제 박스 문도 열리고 닫히고.  묵묵히 운구 카터만을 밀고 오던 '그'가 죄인의 모습으로 뒤따르며 도열하고 서 있는 우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10번입니다. 이 번호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는 '그'가 정해 준 10번이라는, 번호로 당분간은 기억되어야 하는 어머니.  세상은 이제 이승인 듯 아닌 듯, 온통 하얀 불빛일 뿐이었다.       -전문(p. 31)   ----------------- *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석..

바다 속의 램프/ 윤석산(尹錫山)

바다 속의 램프      윤석산尹錫山    출렁일수록 바다는  頑强한 팔뚝 안에 갇혀버린다.  안개와 무덤, 그런 것 속으로  우리는 조금씩 자취를 감추어 가고  溺死할 수 없는 꿈을 부켜 안고  사내들은 떠나간다.  밤에도 늘 깨어 있는 바다.  燒酒와 불빛 속에 우리는 소멸해 가고,  물안개를 퍼내는  화물선의 눈은 붉게 취해버린다.  떠나는 자여, 눈물로 세상은 새로워진다.  젖은 장갑과 건포도뿐인 세상은,  누구도 램프를 밝힐 순 없다.  바다 기슭으로 파도의 푸른 욕망은 아나고  밀물에 묻혀 헤매는  게의 다리는 어둠을 썰어낸다.  어둠은 갈래갈래 찢긴 채  다시 바다에 깔린다.  떠나는 자여  눈물로 세상은 새로워지는가  우리는 모두 모래의 꿈을  베고 누웠다.  世界는 가장 황량한 바다.  ..

Ⅲ 현묘지도 즉 풍류도/ 고영섭

Ⅲ 현묘지도 즉 풍류도        「고운 최치원의 풍류 이해와 삼교 인식」 中     고영섭/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최치원은 신라 경문왕 8년(868)에 최견일崔肩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2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면서 아버지로부터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니 가서 힘써 공부하라"는 말을 들었다.최치원은 '남이 백 번하면 나는 천 번을 하여'人百己千9)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결과 그는 선주宣州 율수현위凓水縣慰가 되고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때마침 최치원은 황소黃巢의 반란(875~884)이 일어나자 병마도통兵馬都統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임명을 받았다. 그는 25살 되던 881년(唐 廣明2, 辛丑) 7월..

예술가의 서재_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이영산(작가, 몽골여행전문기획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부분)        이영산/ 작가 · 몽골여행전문기획자      마르코 폴로가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몽골의 역참 덕택이었는데, 그는 당시의 역참과 우편국의 모습을 이렇게 서술한다.  "황제의 사신이 왕도에서 어디로 가든 25~40마일마다 역驛과 우편국이 있고, 역마다 사신이 묵고 갈 크고 아름다운 게르가 있다. 그 역참들을 거쳐서 10일 안에 100마일 거리 떨어진 곳에서 소식이 전해져 온다."  백일 거리의 곳에서 십일 만에 소식이 온다는 것은 유럽인들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역참간의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어야 하는지 몽골인들은 잘 알았고, 특히 말의 능력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공문서를 보낼 때는 봉투 위에 특별한 표시를 하곤 했는데, 그 표시가 우표로..

카를로 로벨리『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감수의 글」/ 이중원

과학과 철학을 넘나드는 광활한 물리학 여정     이중원/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20세기의 저명한 양자 물리학자인 머리 겔만Murray Gell-Mann은 이렇게 말했다.  "양자역학은 우리 가운데 누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사용할 줄은 아는 무척 신비롭고 당혹스러운 학문이다."  리처드 파인만도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양자 이론은 매우 유용하지만 세계의 실재, 세계상에 대해서 말해주는 바는 이해하기 어렵고 매우 혼란스럽다는 말이다. 오늘날 양자 이론이 물리학·화학·생물학·천문학 등 현대 과학의 기초이고 컴퓨터, 레이저, 원자력과 같은 현대 기술의 유용한 토대임을 생각한다면, 이는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p. 238)  카를로 로벨리는 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