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1120

디 엔 에이(DNA)/신원철

DNA     신원철    고기를 구워 이빨로 뜯어먹다가  혀와 손가락으로 뼈 속살까지 빼먹다가  동굴의 선조들,  호호 불며 나무꼬쟁이로 후벼내다가   그게 자꾸 진화해서 두 개의 젓가락  특히 매끈한 쇠젓가락   그 젓가락질 참 예술이지  엄지와 검지 사이에 그냥 놓인 것 같지만  손가락보다 오히려  능숙하게 잔치국수는 한입에 빨아들이고  라면 가락도 둘둘 말아서 건져 먹다가  미끈대는 도토리묵마저   그게 때때로 막걸리 술상 두드리며 박자마저 기막히게 맞추더니  근자에는 춤과 음악으로 세계를 붕붕 띄우고   쌀알의 몇 분지 일 반도체 칩까지 정확히 집어  딱딱 꽂아 넣는데  어떤 나라도 당할 재주가 없다는군   한국의 아기들은 엄마 배 속에서 젓가락 리듬을 타고  손가락 운동부터 시작한다니     ..

무난한 관계/ 신명옥

무난한 관계      신명옥    솔직해져도 될까요?  날것은 무모해서 두렵기도 하지요  별빛을 헤아리거나 달무리를 관찰하지 못한 채  편견을 불쑥 쏟아내기도 하니까요   드러내기보다 침묵해보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아직 내 그림자의 컨디션과 옆구리의 검정도 모르니까요    오래 말을 묶어두기 잘했어요  질긴 섬유질을 소화시키는 중이에요  거친 말머리를 손질하고 긴 꼬리도 잘라야 하지요    스스로 묻고 답하며 걸어왔어요  나보다 앞서 수많은 고개를 넘어간 당신  시간이 흐른 후 보이네요  내가 넘어야 할 말의 봉우리들   당신에 관해 내 멋대로 발설하는 것은  어쩌면 영원히 보류하는 게 낫겠어요  걸음이 생각을 기르는 동안  차이를 긍정하는 것으로 소통은 충분하니까요     -전문(p. 71-72)   ..

그 겹과 결 사이/ 노혜봉

그 겹과 결 사이      노혜봉    ㅁ이라는 방, 마음가면*의 모서리 각이 있는,  저 깊은 곳 ㅇ방은 또 어디에 갇혀 있나    불안한, 초조한, 두려운, 가끔은 오만한 ㅁ,  섣부른 이 지병은 날마다 널 보며 자꾸 보챈다  한참 모자라다 스스로 뾰족한 각을 키운다   부추를 다듬으며 매운 파를 다지며 넌, 무기력해  걸레를 빨며, 잡지는, 신문은 안 보아도 괜찮아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 말자 야단치지 말자   지난달부터 넌, 암, 쬐끔 아팠지, 고까짓 것 괜찮아  불안해하지도 말자 미련을 삭이지도 말고  죽을 만큼 기침이 심한 건, 평생 두려워해서 못한 말  무서운 부끄러움이 게으른 구석 점, 점으로 닫혔다   ㅁ ㅁ ㅁ 널 미워했던 싫어했던 거울 뒷면의  한 끗 욕심, 지루한 편견으로 쌓인 벽,..

딱한 처지/ 황상순

딱한 처지      황상순    알록달록 아름다운 물고기  비단잉어 코이는 수족관 모양에 따라  그 크기까지 달라진다고 하는데  작고 보잘것없는 어항에 담겨  가난하게 변한 코이야  너는 어쩌다 내게 코를 꿰이고 말았니  고대광실 삐까뻔쩍한 집에서  금빛 은빛 지느러미 휘저으며  얼마나 반듯하고 화려하게 크고 싶었겠니  깊은 강에 그냥 두었어야 했다  미안하다, 내 시詩야     -전문(p. 43)   ---------------  * 시터 동인 제6집 『시 터』 2021. 10. 22.   펴냄  * 황상순/ 1999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어름치 사랑』『사과벌레의 여행』『농담』『오래된 약속』『비둘기 경제학』등

너라는 귀신고래/ 한이나

너라는 귀신고래      한이나    고래를 찾아 무작정 떠난 적 있다   정말 고래를 만날 수 있을까, 멀리 가까이  파도를 뒤적이는 눈길들이 매섭다   하늘과 바다의 파란빛에 들어 있는 저 흰빛  순결과 공포의 색  모든 색의 시작이며 끝인 색  죄없이 바다에 수장된 영혼의 그림자   내가 꿰뚫어 보아야 할 것은 파도의 벽이다   포경선을 타고 망망대해, 내가 찾아  나선 것은 귀신고래  물 위로 딱 한 번 솟아올랐다가 감쪽같이 사라진  너라는 붙잡히지 않는 미래다  포경선에 포획된 것은 빈 투망에 걸린  은빛 물살 한 조각.   아득한 손님 같은 너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       -전문-    ---------------------  * 시터 동인 제6집 『시 터』 2021. 10. 22. ..

와각지쟁(蝸角之爭)/ 최도선

와각지쟁蝸角之爭      최도선    전동차 노인석에  두 여자가 일 벌였다   민쯩 까 너부터 까 이것이 어따 반말   진종일 머리채 잡히고도  순환 열차 달린다     -전문(p. 23)    ---------------------  * 시터 동인 제6집 『시 터』 2021. 10. 22.   펴냄  * 최도선/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1993년 『현대시학』 소시집 발표 후 자유시 활동, 시집『서른아홉 나연 씨』『그 남자의 손』『나비는 비에 젖지 않는다』외, 비평집『숨김과 관능의 미학』

반쪽 심장/ 정영숙

반쪽 심장      정영숙    잘 익은 수박은 정수리에 칼끝을 대자마자  저절로 두 쪽으로 짝 갈라진다  단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붉은 심장을 드러낸다   잘 익은 사랑은 이별할 때  정수리를 찌르는 서늘한 칼날을 예감하고  칼날이 심장에 닿기 전 잡았던 손을 재빨리 놓는다   신이 선물로 주신 초록의 신성한 움막에서  살과 살이 부딪쳐 어둠으로 불꽃을 피웠으니  꿀이 흐르는 낙원에서는 더 이상 피울 꽃이 없었으니  앞에 놓인 건 뛰어내릴 절벽  뿐   둘로 쪼개지기 전 그들은  어떤 사랑도 한 사람의 몫은 이분의 일*이라는 걸 알았던 걸까   절벽 위에 손잡고 서서  절벽 아래로 함께 뛰어내리고자 했을 때  뛰어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  번개처럼 정수리를 치던 서늘한 칼날의 예감  우리 사랑은 여..

아케론의 강/ 이미산

아케론의 강      이미산    슬픔을 짊어진 자 그 강을 건널 수 없다는데  나는 마냥 울었네 강가의 당신께 닿도록   내 울음의 팔 할은 당신의 살아생전  불우에 저항하듯 차곡차곡 출산과  망각을 안고 기도하는 오두막, 그렇게 불려나간  불운들   해가 뜨면  생의 근육이 키워내는 결심  내일을 위해 틀어막은 오늘의 숨구멍  누를수록 번성하는 불운의 가계   변방으로 밀려난  어느 소수민족은 공작날개 수놓은 옷을 입고 숭배하는 조롱박 달랑거리며  지칠 때까지 축제를 벌인다는데  잊으려할수록 선명해지는  기억의 속성처럼   산자의 몫이 되는 망자의 여정  그 오롯한 배 삯은 동전 한 닢   몸을 벗은 당신은 평안하고  내 슬픔 모르는 듯 평화롭고   우리 사이 남겨진 저 반짝이는 물빛  조롱의 문장들..

곤줄박이 코드/ 이명

곤줄박이 코드      이명    왜 굳이  이 조그만 산중 집에 현판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지  명필가에게 부탁해 그 두터운 나무로 제작해 보내왔는지   이덕무의 한시 족자 한 편쯤이야 들고 오지 않아도 될 일을  오겠다고 약속해 둔 날을 한 달이나 앞당겨  성하지 못한 몸으로 그 멀리서 단숨에 달려왔는지   돌아가서는 무엇이 급해 바로 숨을 거두었는지    가는 길 배웅하고 돌아와 보니 새 한 마리 현판 아래 누워있다   방파제를 넘은 파도가 비로소 절망한다      -전문(p. 132)   ---------------------  * 시터 동인 제7집 『시 터』 2022. 11. 10.   펴냄  * 이명/ 2010년『문학과 창작』 신인상 & 201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분천동 본가입..

뛰어라, 반가사유/ 윤경재

뛰어라, 반가사유         마라톤을 하는 시각장애우      윤경재    밑줄 친 두 호흡이  열두 줄 가야금 산조에 맞춰 달리고 있다   먼 저곳 사유의 길을 향해  앉음과 섬, 그리고 그 중간의 반가에  모든 게 달렸다는 듯  차마 실눈 뜨고 바라보는 뭇 숨소리도  두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인다  여러 천 년 동안 이별하여 지냈던  손목의 맥동이 만나 기뻐 뛸 때  둘 사이를 엮은 노란 리본이  펄럭펄럭 춤을 춘다   반 발짝쯤 앞서가는 육신의 신호등  뒤를 밀어 올리는 마음의 눈을 따라야 한다   누가 누구를 이끌며 가는 마라톤인지  서로 의지하는 투명 끈이  오르락내리락 마음들을 단단히 묶어준다   이곳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는 존재하지 않는다  두 분 반가사유상의 깊은 공명     -전문(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