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1120

민초/ 윤명규

민초      윤명규    베어져 스러지는 풀들을 보라  갈가리 찢긴 조각들이 하늘로 솟구친다  다른 풀들의 품 안에 떨어져 안기고  그들을 껴안은 풀들도  다가올 운명의 무게만큼 허리를 꺾는다   어린 멸치 숨결 같은 것들  결코 생을 구걸하는 법이 없구나  보리밥처럼 눌어붙은 울혈만이  소리 없는 비명을 털고 있다   이름 모를 들꽃과  개고사리, 나팔꽃들도 섞여  의연히 죽음의 칼날을 기다린다   목을 쑥 뽑아 잘리면서도  풋풋한 풋내를 뿌리며  감싸듯 받아주고 그도 스러지고  우는 듯 웃는 듯  몸 조각을 나부끼는  죽어도 죽지 않는 저 이름들   고사리 손 잘라지고  나팔수 사라지면 그 누가 나팔 불어  새벽을 일으킬까     -전문(p. 80-81)   ---------------* 군산시인포..

모자/ 문화빈

모자     문화빈    나는  막내로 태어나 귀염을 받았다  그러나 심심함이 부록처럼 따라다녔다   텅 빈 마당에서  지나가는 개미를 건드려 보다가  소쿠리를 뒤집어쓰고  누렁이에게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장화 신은 딱정벌레 이야기   그때 눈을 끔뻑이며 내 말을 듣던 누렁이는  우리 집 가난을 혹처럼, 달고 다니다가  별이 되었다   가난을 얼기설기 꿰매서 입는 우리 집을 탈출한 것이다  손 있는 날이었다  그날 밤에도 나는  누렁이가 UFO를 타고 떠났다는 생각을 지었다   이제 누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그것이 제일 걱정되는 밤이었다      -전문(p. 78) ---------------* 군산시인포럼 제4집 『바다의 메일』 에서/ 2024. 6. 5. 펴냄  * 문화빈/ 2020년 ..

그날의 바다/ 윤정희

그날의 바다      윤정희    하나의 배경이 되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바닷가를 거니는  모네의 양산을 든 여인이 되어   은빛 잔물결이 노를 젓듯  억겁의 시간 위에 흔들리는 배  해풍에 그을린 낯선 사내  맨발에 다부진 몸짓  생의 그물에 걸린 야성이  날 생선처럼 펄떡였다.   바다가 펼쳐 놓은 풍경 속으로  흠뻑 젖어드는 내게  눈에 익은 사내는 뱃사람 앞에선  낭만을 말하지 말라  속, 뒤~ 빈다고~!  목숨 걸고 배 띄워 갯바람에  살 터지는 그날그날이  뱃사람의 삶이라고···,   거친 산맥을 넘어오다 지친 바람처럼  한, 호흡을 내려놓은 사내의 눈에  육신이 농기구라던 아버지모습 얼비쳐  설움처럼 붉어지던 하루.   절로 나는 들풀처럼  달려드는 그날의 바다  지느러미를 흔들며  세월..

수평선/ 문화인

수평선      문화인    늘 흔들리는 몸  늘 방황하는 마음   멀리 달아날까 봐  바람 불면 더 멀리 날아갈까 봐   생을 지상에 꼭 묶어놓은 선  고무줄 하나   흔들리는 바다에 늘었다 줄었다  몸을 대단하듯   눈물을 닦아주고  보폭을 맞추며   긴 세월 홀로 가는 바다를  꼭 안고 있다     -전문(p. 62)   ---------------------* 군산시인포럼 제4집『바다의 메일』에서/ 2024. 6. 5.펴냄  * 문화인/ 2012년 『한국시』로 & 2024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언젠가』

바다 4_간월도/ 나채형

바다 4        간월도     나채형    얼굴 모양  이상 표정이 다르듯  물의 깊이 결이 다르고  소리 높이도 무두 달랐지만   심장을 담은  파도 소리의 느낌은 모두 같았어   사람이 만든 바닷길에  새들이 모여 살고   제비꽃 향기를 품고 있는  온기를 느낄 수 있었지   익어가는 표정들  바이올린처럼  내 곁에 값진 사람으로 남았으면···    -전문(p. 58)   ---------------* 군산시인포럼 제4집『바다의 메일』에서/ 2024. 6. 5.펴냄  * 나채형/ 2021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사막의 보트 타기』

치열한 바다/ 김충래

치열한 바다     김충래    소리치며 파도는 달린다  닿았다 사라지는 거품 같은 내일  너를 붙잡기 위해 저 멀리에서  멍든 몸을 넘고 넘어 처절히 사무친다  고비마다 부서지고 깨지면서  다가서면 돌아보지 않고 늘 그만큼의 거리로 도망치는  끝나지 않는 전쟁  술래 같은 널 잡으려 달려들면  모래 속으로 모레로 가고  글피로 사라진다  가까이 있지만 결코 오지 않는 너  어제를 부정하며 오늘도 미친 듯 뛰지만  끝은 늘 허무에 찬 미지수   오기로 약속했지만  오지 않을 두터운 내일이라 해도  포기는 없다 파멸될지언정*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놓아 주는 것이고  지나가는 것이며  잊어버리기 위함이라고  애써 넘실대며 내일을 향해  오늘도 쉼 없이 짠 눈물에   쓸 말을 찾아 흐느낀다     -전문..

길을 찾아가는 바다/ 김차영

길을 찾아가는 바다      김차영    실개천에 태어나  강을 지나 바다로 나가 보았다   섬으로 가는 길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심해의 터널   바다가 환해질수록 쌓이는 어둠,   투잡, 쓰리잡을 해도 멀어지는 섬  성장하는 물고기 포기부터 배워  삼포, 오포, 칠포 세대로 이어지다  다포 세대가 되어가는 요지경 바닷속   그 속에서  남이 아닌 내가 되어  하찮은 조개껍질을 모으며  나만의 바닷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전문(p. 49) ---------------* 군산시인포럼 제4집『바다의 메일』에서/ 2024. 6. 5.펴냄  * 김차영/ 2021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미이라의 숲』

무녀도 갈매기/ 이서란

무녀도 갈매기      이서란    더 끄슬릴 것도 없는 얼굴을  햇빛 가리개로 가린  동티모르의 사나이   길을 묻는 말에 애써 피하며  그쎈미소*로 땀방울을 흘리면서  찢어진 어망을 깁고 있다   옆에서는 집게다리를 높게 들며  괴발개발 그물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달랑게가 재바르다   바다가 겨우 뭉쳐놓은 모래성 위에  노을 한 조각  물고 날아오는 갈매기   살림살이는 나아지기는커녕  하얗게 질린 파도 발자국만  덩그러니 통장에 찍혀 있다   밀려오는 그리움  휴대전화에 내장된 두 살배기 아들  얼굴 위로 주르륵 쏟아진다      -전문(p. 44-45)   * 그쎈미소: 눈은 웃지 않고 입으로만 웃는 모습, 가짜미소---------------* 군산시인포럼 제4집『바다의 메일』에서/ 2024. ..

바다의 착시(錯視)/ 윤명규

바다의 착시錯視      윤명규    무슨 일로 햇살은 조각조각 깨어졌나  수평선에 부유하는 태양의 살점들  포충망 휘저으며 바람은 달려오고   아직 잡을 그 무엇이 있기라도 한 것일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황금 깃털  그물코를 빠져나간다   주저앉고 싶기도 했을 텐데    꺼지지 않는 욕망의 무게가  도대체 얼마였길래  몸뚱이 깎이는 줄 모르고 있을까   추락해 익사한 하늘이  그보다 더 짙게 젖는 오늘     -전문(p. 40) ---------------* 군산시인포럼 제4집『바다의 메일』에서/ 2024. 6. 5.펴냄  * 윤명규/ 2020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허물의 온기』『흙의 메일』

장군섬 근처/ 문화빈

장군 섬 근처     문화빈    마을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장군섬 근처까지 가서 주낙을 폈다   왕창 잡으면  청소기도 사 주고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도 보내주고   파도 더미가 편측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선체는 주낙의 방향과는 전혀 딴 데로 튕겨져 나간다   멀리 갈치밭에  수십 척 떠 있는 주낙배의 어화 불빛이  나를 안쓰러워한다   바다가 말을 듣지 않는다  바다가 나를 거부하고 있다     -전문(p. 35)   ---------------* 군산시인포럼 제4집 『바다의 메일』 에서/ 2024. 6. 5. 펴냄  * 문화빈/ 2020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파이(π) 3.1415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