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1120

독해/ 한선자

독해     한선자    독을 품은 연기였다   마주 잡았던 손바닥에 금이 갔다   터널 속에서 비로소  오래 믿었던 마음이 연기라는 걸 알았다   바다로 갔다  온몸에 달라붙은 독을 씻어내고 싶었다   수평선 너머 누군가 버린 것들이 타오르고 있었다   독해가 불가능한 슬픔, 고집 센 주어, 토막 난 12월까지  바다에 던졌다   타다 만 붉은 잔해들 둥둥 떠 있었다   바다가 자꾸 손바닥을 닸았다   물음표를 물고 다니던 갈매기들이   질문을 쏟아냈다   물음에 독해지기로 했다     -전문(p. 28-29)  ---------------* 군산시인포럼 제4집 『바다의 메일』 에서/ 2024. 6. 5. 펴냄  * 한선자/ 2003년 시집『내 작은 섬까지 그가 왔다』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울..

전어를 굽는 저녁/ 김지헌

전어를 굽는 저녁      김지헌    서쪽으로 가도 좋겠다  연탄 화덕에 전어 올리고  타닥타닥  굵은 천일염 소리 듣는 저녁이라면  고소한 전어의 살점을 나누는  들끓는 저녁이라면   횟집 야외 식탁에서 젓가락으로 바다를 헤집으며  전어를 구워 먹는 사람들  다 받아 줄 것처럼  수평선은 저만치 물러앉아 있다   세상 치욕이 몰려오듯  얼룩말 떼 파도 우레같이 달려들다 몰려나간다  돌아가는 길마저 보이지 않을 때면  바다를 찾는다던 남자  쉼 없이 밀려드는 삶의 파도 앞에서  넘어지고 피 흘ㄹ며 여기까지 왔으리라   서쪽으로 가도 좋겠다  들끓는 저녁 바다 앞  간절한 생의 마지막 문장을 위하여     -전문(p. 24-25)   ---------------* 군산시인포럼 제4집 『바다의 메일』 에..

폭설/ 이건청

폭설     이건청    말들이  떼 지어 달려오더라  진부령 넘어  미시령 넘어, 말들이  달려와  쓰러지더라  무릎을 꿇더라  엎어지더라  겨울 바다는 오라고  오라고, 오라고  손짓하는데  마루턱에서 마루턱으로 허위허위 달려온  추운 날들이  폭설 되어  흩날리는데  일망무제, 수평선 뜬 곳까지 달려온 내 말들이  흔들리는 손짓들 쪽으로 달려와  퍽, 퍽, 엎어지며 흩날려 내리는  겨울 화진포    -전문(p. 20)  ---------------* 군산시인포럼 제4집 『바다의 메일』 에서/ 2024. 6. 5. 펴냄  * 이건청/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실라캔스를 찾아서』『곡마단 뒷마당엔 말이 한 마리 있었네』 외 다수

붉은빛 서대/ 김왕노

붉은빛 서대      김왕노    바닥을 박차고 나왔다 장대 끝에서  노을로 꾸덕꾸덕 말라 맛 들어가며  몸은 붉게 물들어 간다.   바닥에 착 달라붙은 밑바닥 생활이었으나  온몸으로 꼬리에 꼬리를 치며  바닥을 차고 오른 것은 일생일대의 혁명  하나 그물을 피할 수 없는 서대였으므로  밑바닥을 쳤기에 아득한 장대 끝에 이르러  온몸에 소금꽃 피도록 바다를 바라본다.   입맛 잃은 세상에 짭쪼름한 서대찜으로  밥상에 놓인다 한들 한 번 바닥을 치므로  지고지순한 허공에 이르렀기에 후회 없다고  탕탕 큰소리치며 양상군자처럼 허공을  독차지하고 붉게 물들어가는 서대 한 마리      -전문(p.22)  ---------------* 군산시인포럼 제4집 『바다의 메일』 에서/ 2024. 6. 5. 펴냄  *..

바람같이 사라지다/ 황상순

바람같이 사라지다      황상순    숨바꼭질 놀이를 하다가  풀숲 고인돌 밑에 들어 몸을 숨기고  가만히 문을 닫는다  이곳은 오래전에 숨겨놓은 비밀의 방  햇빛에 바래고 월광에 물들 때까지*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리라     -전문(p. 39)   * 褪於日光則爲歷史(퇴어일광칙위역사)    일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染於月色則爲神化(염어월색칙위신화)    월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출전: 이병주 대하소설 『산하』)   ---------------  * 시터 동인 제6집 『시 터』 2021. 10. 22.   펴냄  * 황상순/ 1999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어름치 사랑』『사과벌레의 여행』『농담』『오래된 약속』『비둘기 경제학』등

새 2/ 최금녀

새 2     최금녀    새를 모았다  새의 어깨에  감정이 돋아날 때까지 닦아준다   감정이 살아난 새들은 이따금씩  눈을 감은 물고기 몇 마리  맹고나무 숲 노을 한 묶음  양말을 신은 바오바브나무 발가락 몇 개도 물고 온다   흔들릴 때마다  나는 새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아픈 과거나 고향을 열어보지 않는다   세어보지 않아도  기억하지 않아도  새들의 이름은 새이다   지친 어깨를   굳어버린 슬픔을  부드러운 헝겊으로 닦아준다   이름을 불러준다.    -전문(p. 132)   --------------- * 시터 동인 제6집 『시 터』 2021. 10. 22.   펴냄 * 최금녀/ 1998년『문예운동』으로 등단, 시집『바람에게 밥 사주고 싶다』외 6권, 활판시선집『한 줄, 혹은 두 줄』 외1권

황금빛 나무를 그리다/ 정영숙

황금빛 나무를 그리다      정영숙    희부연 하늘 등에 지고  허공에 검은 점으로 떠 있는 황조롱이  어제도 들렸고 그제도 들렸던  노랫소리 들리지 않는다   흐린 하늘에 내 귀가 물든 것인가  황사 바람이 새의 목젖에 모래알을 가득 채운 것인가  지하에 누워 있는 시황제의 영靈이  지상에 다시 무덤을 파고 있는 것인가   눈빛 나누며 마주 볼 작은 공간도 없이  허공을 떠도는 저 황조롱이  혼돈의 아우성 속  차라리 조롱 속에 갇히고 싶다   물 한 모금, 조롱 속에 넣어줄 손이 없어  순수의식은 익사한다*   푸른 하늘을 날 수 없는 시대  한 평 반의 갇힌 방에서  붉은 심장을 갈아  우리 모두 사랑 노래 부를 수 있는  황금빛 나무를 그린다     -전문(p. 118-119)     * 순수..

미워지는 밤/ 이미산

미워지는 밤      이미산    잠들기 전 꺼내보는 얼굴 하나   여긴 종일 비가 왔어요 당신도 비를 맞았나요   어두워지면 당신을 불러보죠 그곳에 어울리는 표정으로   보이는 삶과 보이지 않는 생의 매듭이 된 희미한 당신   미소로 시작된 우리의 처음이 있었고   미소로 주고받은 뜨거운 질문이 있었고   질문을 따라 간 낯선 동굴 실패를 걸어놓고 사랑이라는 게임을 하고   수없이 들락거렸죠 물방울 뚝뚝 떨어졌죠 나는 어제 내린 빗물이라 하고 당신은 아담과 이브의 눈물이라 하고   신은 언제나 동굴의 자세로 나를 안아주었죠   그리하여 우리는 각자의 동굴 이후라는 그리움   이제는 혼자 걷고 있죠 우리의 비 수억 년 떨어지는 그 물방울   한때 미치도록 궁금했던 모든 당신 자꾸만 희미해지는   이런 내..

가리비의 여행/ 이명

가리비의 여행      이명    그물에 들었어  여행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지  태어난다는 것이 기적이고 삶이 신화일 테지만  모래 속을 파고드는 일상이 지겹다 느껴질 무렵  가볍게 날아올랐어  트랩이라 생각하며 어디까지 날아갈지 모르지만  비상의 시간이야  신은 있다고 믿으니까  그 물속으로 행운이 찾아온 거지  직성이 풀렸다고나 할까  언젠가 신선들 그림에서 봐둔 남극노인성을 찾아갈 거야  머리 꼭대기가 위로 솟은 노인 말이야  그렇다고 장수할 생각은 없어  행운이 있을 거야  신앙은 누구에게나 있는 거니까  길을 찾아 떠나는 거지  그물 밖으로     -전문(p. 92)   --------------- * 시터 동인 제6집 『시 터』 2021. 10. 22.   펴냄 * 이명/ 2010년『문학과 창..

천수답/ 윤경재

천수답     윤경재    카메라를 메고 다닐 때  나는 천수답이 되는 거였다  햇살이 소나기로 쏟아져 내려도  나의 얄팍한 감광지는  찰나 한 조각만을 겨우 건질 뿐  그와 나 사이의 프레이밍  아무리 절묘하게 구도를 이리저리 잡아도  없는 것을 찍을 재주는 없다  나는 천수답, 주는 것만 받아먹을 뿐  인공강우는 실험실에서만 가능한 일  돌아와 초록빛 여행을 정리하면서  그때의 향기와 마음이 못내 아쉬워  또다시 떠남을 떠올린다  빛의 진심은 다 보여주는 데 있지 않고  한 꺼풀 감추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전문(p. 88)   --------------- * 시터 동인 제6집 『시 터』 2021. 10. 22.   펴냄 * 윤경재/ 2007년『만다라 문학』 & 2008년『문예사조』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