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1120

폭우 3/ 김차영

폭우 3 김차영 늦깎이 시인이 되어 비애 가득한 모난 돌의 상처를 언어로 씻어 광을 내자 한 권의 시집이 되었다 애주가인 친구에게 책을 건네자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우리 친구가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동네방네 술을 쏟아낸다 열이 뻗치면 친구들 사이에서 육두문자로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의 친구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술로 퍼부어댄다 자기 술처럼 술술술 퍼붓는 친구가 참, 훌륭한 사람이네 -전문(p. 102)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김차영/ 2021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미이라의 숲』

종이시계/ 이서란

종이시계 이서란 꽃이 핀 자리에 시간이 맺혔다 어떤 시간은 히말라야산 핑크 소금 빛 같은 노을로 피기도 한다 피는 것들은 쉽게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지켜보는 눈동자가 촉촉하기 때문이리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피는 시간은 시계에 의존하는 명사名詞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끊임없이 초침의 페달을 밟고 밟아야 닿는 기억 가을이 오면 흰꽃나도샤프란은 선회하는 날개로 온다 젊은 날의 격동과 혼돈 삶의 애환과 살아 숨 쉬는 욕망이 싱싱한 꽃잎으로 유영하는 시간을 정복해야 한다 시간의 집 앞에서 날갯짓으로 초인종을 눌러보지만 눌러지지 않는 돌아가는 길을 어디에다 두고 온 것인지 시간이 핀 자리에는 색이 바랜 꽃잎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전문(p. 84-85)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

미당 묘소에서/ 윤명규

미당 묘소에서 윤명규 초입의 말라비틀어진 고샅길 가파르게 구불텅거리고 시퍼렇게 날을 세운 억새들만 봉분 위로 쟁쟁했다 고개 숙인 엉겅퀴들 주홍 글씨로 속절없이 피어나 여기저기 숙명처럼 널브러져 있는가 따뤄 올린 술잔 속에 그의 아린 춤 그림자가 덩실덩실 흐느끼고 있다 첩첩으로 쌓인 세월의 더께 독침 세운 저 엉겅퀴는 언제 자기꽃 피워낼까 장수강 물바람이 상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동천冬天을 읊조린다 -전문(p. 79)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윤명규/ 2020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허물의 온기』

대패를 밀며/ 문화빈

대패를 밀며 문화빈 나는 아버지 염전이 내키지 않는다 바닷물을 가두면 나 자신도 갇혀야 한다 비옥한 햇볕은 질기다 촘촘한 햇볕의 눈치를 살피다가 장악되고, 과잉되다, 쓰러진다 그러다 바다를 방치하고,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준 건 무기력한 정차역 들이닥치는 뙤약볕 상큼을 모르는 땀방울 나는 대패를 밀며 휘적휘적 걸었다 퀴퀴 묵은 생이 발효될 때까지 길은 점점 잔인해지고 있었다 -전문(p. 63)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문화빈/ 2020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파이(π) 3.141592...』

무심(無心)/ 나채형

무심無心 나채형 엉큼성큼 무심無心 울퉁불퉁 비윗덩이 허황한 창고 무모한 사고 망상이 살고 있는 섬 붓 한 자루에서 세상이 풀려나오던 위리안치의 어두운 밤 저기 수선화 한 포기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뿐 -전문(p. 59)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나채형/ 2021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사막의 보트 타기』

파도의 걸음/ 김충래

파도의 걸음 김충래 끝이 보이지 않는 길 걷다 보면 깨알 같은 글자들이 빼곡히 쌓여 있는 모래사장에 닿는다 가볍게 흰 등짐을 내려놓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다시 일어서서 모래 속을 걷는다 떨림으로 자지러지기도 하도 가늘게 우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때때로 만나는 썩은 웅덩이 발이 흐느낀다 파고와 싸우며 무작정 걸어온 생 멀리 갈수록 가까이 있는 듯 아리송한데 뒤돌아보아도 발자국은 없다 -전문(p. 56)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김충래/ 2002년 『미네르바』로 등단, 미네르바문학회 & 군산문협 회원

버려진 닻/ 김차영

버려진 닻 김차영 갯벌 속에 처박혀 녹슬어가는 뿌리 외로움을 힘껏 움켜쥐고 있다 저 뿌리에 매달려 몸피를 키워 잎도 피우고 열매도 매달았던 것들 썰물처럼 바다로 갔다 한데로만 떠도는 뿌리를 잊어버린, 아니 잃어버린 것들 망둥어처럼 바다에 가득하다 시나브로 뻘 속에 묻혀가며 눈은 수평선 위 고깃배를 따라가는데 그리움 더욱 붉어지는 버려진 닻 -전문(p. 52)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김차영/ 2021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미이라의 숲』

광어/ 이서란

광어 이서란 해녀의 집 앞에서는 성산 일출봉이 대왕고래가 엎드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붉은 태양의 그물에 걸린 바다를 바라보며 유통기한이 언제까지일까를 생각했다 일출봉에 걸린 멍게와 소라 문어에 목을 맨 어머니 줄줄이 엮어지는 것들 살아서 결코 행복하지 못했던 삶 살아있는 것들의 유통기한을 바다는 쇄빙선처럼 부수고 있었다 고기 잡으러 먼 바다로 나간 아버지가 대왕고래인 양 엎드려 실려 온 날 어머니는 납작해져 꽃물을 흘렸다 몇 날 며칠 속을 다 비워내 조개껍데기같이 가벼워진 어머니 이어도사나 노래 박자에 맞춰 칼질하며 회를 떴다 비린내를 뒤집어쓰고 물질하는 어머니의 몸에 어느덧 비늘이 눌어붙어 있었다 햇빛의 궤적에 따라 바다의 바닥까지 누비며 어머니는 바다를 내재율로 품고 있다 나는 물질하는 어머니의 유통..

팥빛 파도/ 윤명규

팥빛 파도 윤명규 입천장에서 울음을 내려 본 적이 없다 꼬불꼬불 물 주름 사이로 양철 대문 삐걱거리듯 갯새들 목울대 세우며 햇살 비벼대고 그 찢긴 쇳소리 섬산 종아리에 쌓여 시장통 욕지거리처럼 서성인다 하늘이 옷을 벗고 뛰어들던 곳 별과 달은 저들끼리 속살 훤히 내보이도록 놀다 간 그곳 나 지금 미친 바람의 폭력으로 시린 몸 한 다발씩 허물어져 내리지만 출생의 비밀을 결코 발설하지 않았다 붉게 충혈된 서해의 눈 다리가 없는 파도 수장되듯 몸 담그고 있는 립스틱 지워진 노을의 추한 입술 퍽퍽 가슴을 치며 피울음 운다 -전문(p. 38-39)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윤명규/ 2020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허물..

바다 풍경/ 이경아

바다 풍경 이경아 흐르는 것들은 흘러가는 시간에 맡기라 노래하는 것들은 내일을 노래하게 하고 고이는 것들은 별처럼 가라앉게 하라 장밋빛 목선을 고즈넉이 저어가며 어부는 바다에 그물을 깊이 던지고 별을 건져 올려 바람 따라 갯내를 실어 나르네 놀란 파도 흰 거품 물고 젖은 머리채를 흔들어도 생사生死 넘나들 깃발을 펄럭이는 한 폭의 바다 풍경 눈에 밟힌 목선이 오래도록 바다를 어지럽게 붙들고 있네 -전문(p. 33)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이경아/ 1965년 수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물 위에 뜨는 바람』『내 안의 풀댓잎 소리』『오래된 풍경』『시간은 회전을 꿈꾸지 않는다』『겨울 숲에 들다』『지우개가 없는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