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1120

파도 보호무역/ 김영

파도 보호무역 김영 해안은 음모를 거래한다 이 파고를 다독이지 못하면 더 높은 바람이 찾아온다 수평선이 오늘도 몇몇 사건을 보내온다 집어등은 늦은 새벽까지 물결의 동선을 추적한다 해외 직송의 물품은 좀 더 찰랑이는 상품으로 바꾸어 팔기도 한다 매진되기 전에 주문하라는 광고를 우리는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질 좋은 부패는 유통기한이 지날수록 싱싱하다 각종 물목이 차오르는 해안에서는 한물간 파도가 최신 유행이다 - 전문 (p. 30)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김영/ 1996년 시집 『눈감아서 환한 세상』으로 등단, 시집『벚꽃 지느러미』『파이디아』『나비편지』외 다수

낙월도, 물안개에 갇힌/ 김금용

낙월도, 물안개에 갇힌      김금용    전남 영광 끝머리  서쪽 바다 낙월도에서  당분간 나는 패랭이꽃이나 되리   어쩌다 찾아오는 외지인에게  꺾이고 휘둘리며 묻어뒀던 사랑  종아리에 달라붙는 끈끈이주걱풀꽃인 듯  하얗게 가슴 부풀려 서 있을 터   달은 져서 비릿한 갯벌에 숨고  물안개에 갇힌 낙월도  사흘째 뭍으로 나갈 기미도 없이  당분간의 이 유예가 행복할 뿐,  법성포 순도 높은 증류수 몇 잔에 취해  한 눈빛으로 돌아드는 꺽새 춤사위  열 손가락 닿는 대로 화들짝 깨어나는  자귀나무의 연지빛 사랑  때늦은 설렘 빈 잔에 채워  새벽 열리는 퍼런 하늘가로 뿌려 버릴 터   품에 안기면 곧 부스러질  눈물 일렁이며 뱃전 쫓는  하얀 포말로 달려가 서 있을 터      -전문(p. 24) -..

바다/ 강우식

바다 강우식 1 바다 곁에 오면 시끄러운 세상사 파도에게 도거리 줘 말끔히 밀어내고 싶다 바다 곁에 오면 갑자기 율리시즈처럼 배 밑창이 울리도록 가슴을 쾅쾅 치고 싶다 2 바다에 한번 빠지면 그 심연의 밑바닥까지 간다 그 심연의 세상은 너무 어둡고 캄캄하다 절망의 외침보다 더 크고 묵중한 침묵이 있다 경험한다는 거 배운다는 거 안다는 치 너무 하찮다 물이 커서 놀기 좋고 뜨기 좋다고 하지만 그 죄여 오는 압력을 어이 감당하랴 발버둥질 친다는 거 자체가 꿈속의 행동 같다 모든 것이 항공모함 같은 육중한 문이면서 모든 것이 문이 없는 첩첩산중과 같은 감옥이다 인간은 그런 바다에서 허우적대며 살아간다 3 생맥주 잔 만한 내 머리가 바다 쪽으로 기운다 파도가 흰 거품을 일으키며 출렁 담긴다 젊은 날에는 가슴에 ..

바다 2/ 박두진

바다 2 박두진 바다가 와락 달려든다. 내가 앉은 모래 위에······ 가슴으로, 벅찬 가슴으로 되어 달려오는, 푸른 바다! 바다는, 내게로 오는 바다는, 와락 와락 거센 숨결, 날 데릴러 어디서 오나! 귀가 열려, 머언 바다에서 오는 소리에 자꾸만, 내, 귀가 열려, 나는 일어선다. 일어서며, 푸른 물 위로 걸어가고 싶다. 쩔벙 쩔벙 머언 바다 위로 걸어가고 싶다. 햇볕 함빡 받고, 푸른 물 위를 밟으며 오는 당신의 바닷길······ 바닷길을 나도, 푸른 바다를 밟으며 나도, 먼, 당신이 오는 길로 걸어 가고 싶다. - 전문(p. 10-11) * 블로그 註/ 참고 문헌: 韓國現代文學大系 20 『朴 斗 鎭』 (1983, 지식산업사. 49-50쪽)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솔방울 소리 천둥 치는 밤/ 최동호

솔방울 소리 천둥 치는 밤 최동호 폐교 작업실에서 혼자 잠들면 달밤에 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 나고 몇 밤 더 지나면 지붕 뚫어져라 천지를 때리는 솔방울 소리 야심한 밤 폐교에서 메아리칠 거요 -전문(p. 7) ----------------------- * 서정시학회 『미래 서정』(제12호) 에서/ 2023. 12. 29. 펴냄 * 최동호/ 시인, 고려대 명예교수

종소리/ 손민달

종소리 손민달 땅 속에는 거대한 종이 있음이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저 많은 새싹들이 한꺼번에 눈 뜰 리 없지 수많은 매미들이 일제히 세상에 나올 리 없지 그래서 굼벵이도 씨앗도 제 몸에 귀가 있다고 하지 그런데 말이야 그 큰 종을 사람이 친다는 말이 있어 혹독한 겨울 지나 온 땅 간질이는 새싹 돋는 일과 숨 막히는 여름 시원하게 울리는 소리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겠어 사람들은 큰 종을 울리기 위해 수신자 없는 편지를 눌러 쓰고 멀리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한동안 울기도 한다지 어떤 지혜로운 자는 사람이 스스로 종이 되어 울기도 한다는데 어느 따뜻한 봄날 갑자기 울렁이는 가슴과 여름밤 내리는 소나기에 누군가 그리워 우는 것이 명백한 증거라고 땅속에는 사람들이 울리는 소리가 사람..

이문동 도루묵 지붕/ 노해정

이문동 도루묵 지붕 노해정 비술나무 서 있는 동네 어귀에 소복한 눈 위로 삽 긁는 소리 골목 모퉁이 작은 가게엔 담배 과자 김치 콩나물 없는 게 없고 새끼줄 같은 골목길로 들어가면은 도루묵 만한 하숙집들이 연탄 내를 여기저기 연신 풍겼다. 기차가 오가는 철길 건널목 댕댕댕 소리 맞춰 늘어선 행렬 플랫폼에 올라 바라보면은 흰 눈 맞아 하얗게 된 여러 두름의 도루묵 지붕들이 연기를 냈다. 즐비하던 하숙집들 사라져 가고 철길 건널목도 없어졌지만 지금도 가끔, 눈 오는 날엔 도루묵 지붕 그리워서 전철을 탄다 -전문(p. 129-130) ------------------------- * 서정시학회 『미래 서정』(제12호) 에서/ 2023. 12. 29. 펴냄 * 노해정/ 2023년『서정시학』 겨울호 신인상 수상

모자 벗은 여인/ 황규영

모자 벗은 여인 황규영 여인이 모자를 벗고 왔다 처절했던 여인의 암 투병 기간 입안이 붇고 곳곳이 헐어 물 한 모금 삼키기 어렵고 온몸의 피부는 불난 듯 붉게 벗겨지고 근육 찢기는 듯 통증에 불면의 긴긴밤 지나고 이제 막 자라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 아래로 깊어진 눈빛 자잘한 것에도 우러나는 감사의 인사 병 얻기 전 까칠하던 성격은 간데없이 모든 것이 고맙다는 사람 등뼈가 옆으로 휘어 삐딱하게 앉은 채 피식 웃는다 상처 덮어주던 모자 벗고 고통의 굴레 벗어던진 여인 똑바로 앉기도 어려운 굽은 등에 내 손길 머문다 생의 한가운데서 몸부림치는 시간을 지나 한 꺼풀 고통의 껍데기 벗었다 -전문(p. 118) ------------------------- * 서정시학회 『미래 서정』(제12호) 에서/ 2023. ..

그림자가 타고 나면/ 전길구

그림자가 타고 나면 전길구 바람 없는 여름 한낮 그림자가 타오르고 있다 그림자가 타고나면 무엇이 남을까? 열 살 무렵 도시 구경하겠다고 찾아간 대구에 짐 자전거로 빙과 배달을 하던 삼촌이 있었다 회색 벌판 위에 군림君臨하던 태양은 자전거 뼈대를 달구고 한낮 짧아진 그림자는 숨 가쁘게 페달을 밟았다 까맣게 탄 등허리를 구부리고 달그락거리며 늦은 저녁을 삼키던 삼촌 집도 사고 트럭도 사고 포도 넝쿨 같은 시절도 있었지만 칠순 앞에 얻은 것은 폐암肺癌 곁을 떠난 적이 없던 매연과 고단했던 검은 저녁과 타오르던 그림자는 응고되고 고향으로 돌아와 산속에 눕던 날 유독 밝았던 한 사람 몫의 햇살 그림자가 타고난 자리에는 하얀빛만 남아있었다. -전문(p. 103-104) -------------------------..

고통의 간격/ 최은진

고통의 간격 최은진 농담이었다고 하면 빛이라도 생길까요 오늘, 지난밤에 당신의 안테나는 무사합니까 언제든 누를 준비가 되어 있는 나는 끝없이 늘어나는 발목으로 당신의 파문을 훔칠 겁니다 소리보다 먼저 가 닿은 빛의 속도는 당신의 손바닥을 파고들겠죠 이른 아침이면 검게 그을린 고목에 기댄 소문들 아파트 잔여세대 분양 현수막이 파격으로 내몰리고 유치권 행사 중이라는 문장 아래 이 년 동안 빌려 산 생生은 궁극으로 치닫습니다 저녁이 뱉어낸 하늘에 번지는 어둠 빛보다 빠르게 가닿는 귓속말 이제 당신의 안테나를 늘려 보아요 진담을 말한다면 거울 속에 당신 어둠을 깨워줄 환한 빛이 생길까요 어디에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전문(p. 86-87) 겨호 ------------------------- * 서정시학회 『미래..